금요일과 오늘 기다리고 기다리던 책이 도착했다. 금요일에 네 권, 오늘 두 권이 도착했다.
금요일에 도착한 네 권 중 한 권은 아직 인터넷 서점에 등록 되지 않은 책이다. 세상에나... 
발행일이 09년 12월 11일인, 아직 풀리지 않은 책을 먼저 받아보게 되다니... 영광이다. ㅎㅎ 

오늘은 일요일인데 택배가 왔다. 보통 주문 후 다음날이면 오는데 이틀이 늦은 오늘에야 
왔다. 그래서 금요일부터 왜 안 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세상에... 월요일에 올 줄 알았는데 
오늘 왔다! 택배 아저씨는 쉬시지도 않나!? 너무 고생하신다. 안쓰럽다.

요녀석들을 어떻게 요리할지... 어서 요리 해 주고 싶다! 빨리 읽자! 근데 뭐부터 읽을까?
아~ 이 행복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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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매달린 원숭이
헤르만 요세프 초헤 지음, 박병화 옮김 / 열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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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고도 부족함을 느낀다. 더 얻기 위해, 더 누리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선은 악으로 바꾸고, 악은 더 악하게 만든다. 욕망을 줄이고, 선(善)을 지키는 것이 그토록 힘들다는 말인가? 
 산업혁명 후 물질주의, 물량주의, 자본 축적이 극대화 됨에 따라 인간의 탐욕은 더욱 카졌다. 남이 아닌 내가 우선 시 되었다. 남이 아닌 나에만 집중하기 시작 했다. 내 것을 채우기에 급급하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윤리는 조금씩 멀리하고, 오로지 나의 쾌락, 나의 탐욕만 찾게 되었다. 선을 지키는 것이 더욱 힘들게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을 죄라고 한다. 카톨릭에서는 그 죄를 대죄, 즉 죄의 근본을 7 가지로 정한다. 교만, 인색, 음욕, 탐욕, 나태, 분노, 질투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것이다. 태초부터 인간은 이 죄들을 끊임 없이 범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이 죄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이 범하고 이는 죄는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날까?

 '십자가에 매달린 원숭이'

 이 책에서는 현대사회에 만연한 7 가지 대죄를 고발한다. 쾌락, 탐식, 무관심, 시기심, 분노, 자만심, 탐욕이 현대인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이야기 한다. 7 가지 죄가 경제와 개인 생활에서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 설명한다. - 과대해석 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 저자가 고발하는 오늘날의 죄악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시 하며 행했던 일들이 사실은 우리의 이기심을 부추기고, 진정한 가치와 윤리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죄악에 빠진 우리는 공공의 선이 아니라 개인의 악을 위한 가치만을 추구하여 왔다. 개인의 악이 모여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자신의 죄악, 공공의 타락에 흡족해 한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7 가지 죄는 누구나 범하는 작은 죄이기에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죄의 문제는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범하느냐, 범하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죄는 그 자체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 물론 죄의 원인과 크고 작음에 대해서는 더 깊이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 따라서 죄를 계속 범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른 행동이 아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계속 범하게 된다면 사회는 점점 더 타락하고, 부패하게 될 것이다. 사회는 개인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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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예수 - 인류의 영원한 참 스승
레기 캠벨 지음, 천종수 옮김 / 크리스천석세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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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누구일까? 물론 그는 하나님이자 동시에 그분의 독생자이시다. 그리고 또한 당연히 사람이시다. 이것은 그분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하면 어떨까? 예수님은 인류의 대속자요 구원자이시다. 이것은 그분의 궁극적 역할이다. 그분의 다른 역할, 즉 그분의 부차적 역할은 인류의 선생, 곧 멘토이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훌륭한 선생이셨다. 부처,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등 인류사에 있어 손에 가장 뛰어난 선생으로 손꼽히는 이들 중 단연 으뜸이다. 그것은 그 제자들이 증거한다. 앞서 세 선생들도 물론 위대한 사상을 남겼다. 위대한 성찰를 제자들에게 남겨 깊은 깨우침과 행동의 변화를 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말만 남긴 것이 아니라 그분은 행동을 남겼다. 당신의 말과 어울리는 행동을 스스로 먼저 보였다. 그것이 다른 선생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역시 그분은 인류사에 있어 가장 뛰어난 멘토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멘토란 어떠한 사람인지, 어떠한 멘토가 되어야 하는지 당신의 삶으로 친히 가르쳐 주셨다. 물론 그분이 의도하고, 그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기에 그 방법이 세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분의 삶을 통해 멘토링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조금만 살펴보자.

 

 '멘토 예수'

 

 이 책에서 예수님은 목적을 가지셨다고 한다. 세상에 오신 목적이 분명하시다는 말이다. 그와 같이 멘토는 멘티에게 무엇을 가르칠지 멘티가 어떠한 사람이 되도록 할 것인지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고 한다. 멘토는 그룹으로 일하셨다. 그분은 12 제자를 부르셨다. 그리고 그 그룹 안에 특별히 가까이 하시던 제자 몇이 있다. 또한 그분은 기도하셨다. 그분은 무엇을 하시든 가장 먼저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행동으로 가르치셨다. 그분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의 말을 증거하셨다. 그분의 말은 곧 삶이었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간 부분은 예수님은 멘티를 직접 선택 하셨다는 주장이다. 보통은 멘티가 멘토를 찾는다. 자신의 스승이 되어 줄 사람을 택해서 자신의 멘토가 되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멘티를 찾으셨다. 당신께서 가르칠 이들을 친히 선택하셨다. 그것이 오늘날 많은 멘토와 멘티의 다른 점이다. 물론 어느 것이 무조건 맞다고 답을 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아무 흠도 없는 뛰어난 선생이셨기에 제자들을 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나, 모두가 멘티를 먼저 택할 수는 없다. 예수님과 같이 잘 준비된 멘토만이 멘티를 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멘토링은 매우 귀한 일이다. 사람을 세우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군사를 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과 같다. 따라서 멘토링에 임할 때는 열정을 다해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 모두 열정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가르침과 배움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 관계는 금방 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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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가시 - 그리스도인의 고통을 다루는 안내서!
스티븐 스타일스 지음, 소진호 옮김 / 베다니출판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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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근래에 내 마음에 작은 가시 하나가 박혔다. 그 가시가 자꾸만 나를 찔러서 아프게 만들었다. 그 고통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다른 이들의 아픔은 볼 수 없었다. 내 고통에 신음하며 다른 이들의 신음은 아프지도 않으면서 관심을 받기 위해 아픈 척 하는 거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면서 내 아픔이 진짜라고 자위했다. 내 가시는 쉽게 뽑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뽑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남들을 손가락질하기 위해 악한 마음을 품은 탓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히려 내가 관심을 받기 위해 아픈 척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뽑지 않은 가시는 점점 살 속 깊숙이 파고 들었다. 내 마음에 박힌 가시는 그렇게 점점 내 속에 상처와 아픔을 더해만 갔다.

 

 이 책을 읽으며 내 마음에 가시, 현재 나의 심리 상태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차료하라는 몸의 신호라고 한다. 상처 부위에 집중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통을 분산시키기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한다. 그렇다. 몸에 상처가 나면 고통스럽다. 신음을 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고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검사를 한다. 치료를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근래에 내 마음에 가시 하나가 박혔다. 그것으로 인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어서 아픈 부위를 치료하라는 그 신호를 부시했다. 상처를 치료 하지 않고, 아픔을 키워갔다. 그러곤 고통을 잊기 위해, 고통을 분산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손가락질 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보며 그건 관심을 받기 위한 거라며 비난 했다. 상처를 치료하지 않은 탓에 고름이 생기고, 썩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내가 관심을 받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아픔이 이렇게 크니 나 좀 봐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방법을 잘못 택한 것이다. 빨리 상처를 치료하고,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돌보는 것이 교회에서 내가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역할을 무시했다. 결국 나는 고통 중독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을 악용하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나를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고 나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것이 어디서 기인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치료하면 되는지 직시하게 되었다. 나의 고통을 감상적으로 바라 본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 고통을 객관적으로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가시를 두 손 가락으로 잡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것을 있는 힘껏 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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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8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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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1.11~1881.2.9). 여기까지는 널리 알려진,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남긴 많은 걸작들을 모두, 최소한 한 개라도 완독을 한 이는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떤 작가일까?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그에 대해 간단히 정리 해보면, 모스크바 말린스키 시립병원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838~4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846년에 처녀작《가난한 사람들》발표 하였다. 1849년에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시베리아로 유형 되었는데 이때 총살 직전에 황제의 특사로 감형된 그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후《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惡靈)》(1871∼1872) 등을 발표한다.(자료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48095)

 도스토예프스키가 남긴 대작들을 모두 읽고,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수많은 고전이나 걸작들이 그렇듯이 그의 작품들 또한 깊은 의미와 사색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모든 작품을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욕심을 내어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여건 상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그의 여러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고 생각되는 죄와 벌만 읽고자 마음먹었다.

 죄와 벌은 1866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근대 도시를 배경으로 법과 대학을 중퇴한 가난한 라스꼴리니꼬프를 그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기아상태에 빠져 자신이 가진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돈으로 하숙방 비를 해결하는 등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는 전당포를 몇 번 드나들며 헛된 공상을 하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다. 전당포의 노파를 살해한 것이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별다른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그러나 한 여인으로 인해 차츰 동요가 일어난다.

 

 죄란 무엇일까? 사회적인, 성문법 안에서의 죄는 법에 반하고, 그것이 정해 놓은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의 죄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벌은 무엇일까? 법적 측면에서는 잘못을 하거나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것에 합당한 고통을 주는 것이다. 심리학적 측면에서는 어떠한 행동의 빈도수를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 유쾌한 자극을 빼앗고, 불쾌한 자극을 주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객관화 시킬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생각과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죄와 네가 생각하는 죄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도모하기 위하여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나로 제한하기 위한 강제적 장치인 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로 인한 벌의 종류와 강도를 정하는 데에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에 그것을 하나로 제한하기 위하여 법적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죄는 상대적이다. ‘너와 내’가 ‘특정한 상황에서의 어떠한 행동은 죄’라고 합의 하였기에 그것이 죄라고 인식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합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인식 된다. 살인을 예로 들어보자. 내가 평상시에 누군가를 살인 하였다면 그것은 명백히 죄이다. 그러나 전시에 적군을 죽였다면 누구도 그것을 죄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살인, 곧 죄를 ‘법과 제도적 측면’에서 이해하였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죄 인식은 다른 측면에서도 가능하다. 전시에 적군을 살인하였다고 해도 나의 마음속에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이 생긴다. 이것은 죄를 ‘도덕과 양심의 측면’에서 이해한 결과이다. 어느 측면으로 인식하든 ‘너와 내’가 죄라고 합의한 - 혹은 교육에 의해 그렇다고 인식된, 어쩌면 인간이 날 때부터 이미 그 내부에 죄를 인식할 수 있는 잠재된 기준이 있을지도 모르는 이유로 - 행위에 대해서만 죄라고 인식하기에 그것을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꼴리니꼬프는 무척 빈궁한 생활에 허덕였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죄를 짓게 된다. 그것은 개인의 양심에 국한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작은 죄’가 아니라 인류가 정한 ‘가장 극악한 죄’인 살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무감각 했다. 그저 여느 살인범과 같이 자신의 죄를 숨기고, 벌을 피하려 할 뿐이었다. 그처럼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의 죄에 대해 - 법학도이기에 누구보다 자신의 죄의 잘못과 심각성을 (법적 측면에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 무감각 했던 이유는 ‘너와 나’라는 죄의 상대적 충족조건 중 ‘너’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결핍 중에 한 여인으로 인해 자수를 하고, 벌을 받게 된다.

 왜 인간은 죄를 지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피의자에게 심한 고통을 줌으로 같은 고통을 다시 맛보지 않으려는 인간의 심리와 육체적 거부를 이용하여 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양심과 종교적 측면에서는 죄로 더럽혀진 순결한 영혼을 벌을 통하여 깨끗했던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의식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순결한 영혼을 악(죄)으로 물들이지 않으려는 영혼의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수를 하여 벌을 받지만 죄질에 비해 가벼운 벌인 8년의 시베리아 유형을 받게 된다. 벌인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죄에 대한 물리적 벌은 - 비록 합당한 만큼은 아니지만 - 받았지만 양심에 대한 벌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단지 범인으로서 들킨 것에 대한 자책을 할 뿐이다. 그의 자수는 죄를 법적 측면에서만 인식한 결과이다. 여전히 그의 죄 인식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런데 소냐라는 한 여인으로 인해 그는 결핍된 ‘너’가 충족됨으로, 다시 말해서 죄 인식에 대한 상대성이 완성됨으로 마침내 그의 마음은 동요를 일으킨다. 이제 자신의 죄와 그 잘못을 양심으로 인식하게 된다. ‘너와 나’의 합의가 드디어 모든 측면 - 법과 양심 - 에서의 죄 인식을 가져 온 것이다.

 

 인간의 죄 인식은 법과 양심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하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합의된 것이다. 교육에 의해 강제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넣어 준, 날 때부터 갖게 되는 프로그래밍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든 죄 인식은 인간의 편의, 즉 서로의 안녕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보편적 상황에서는 그것에 일조를 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편의만을 추구한다. 상대의 피해는 생각하지 않는다. 죄를 저지른다. 과연 죄에 대한 벌로 보편적 상황을 넘어 특수한 상황에서까지 죄에 대한 욕구를 소멸시켜서 마침내 모두의 안녕을 이룰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법은 그것에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법도 범죄를 막지 못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증명한다. 오늘의 뉴스가 증거 한다. 그렇다면 양심은 어떠할까? 그 또한 법과 다를 바 없다. 보편적 상황에서는 법과 양심이 모두 발동을 하여 죄의 충동을 막는다. 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 둘 다 힘을 잃는다. 과연 인간에게 희망이 있을까? 안녕을 이룰 수 있을까?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사랑’이 아닐까 싶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마침내 양심으로까지 죄를 인식하게 된 것은 소냐의 사랑 덕분이다. 그에 대한 소냐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는 죽기 전까지도 죄 인식의 완성을 이루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냐의 사랑은 그의 양심을 흔들었고, 마침내 그의 죄를 - 진정한 의미에서 - 알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앎은 어떠한 의미에서 그에게는 진정한 벌이 된다.

 

 인간이 정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죄는 분명히 나쁜 것이다.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한 벌은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양심은 죄에 대한 법의 태도에 동의하지만 벌에 대해서는 - 부분적으로 -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인권에 호소하여 사형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죄를 지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다수의 인권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한 사람에 의해 다수의 인권이 침해 된다면 그 사람의 인권이 어느 정도 희생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영혼은 귀하다. 따라서 아무리 나쁜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영혼은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죄에 대한 일정한 벌을 주되 범법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 만약 내가 피해자가 된다면 솔직히 말해서 나의 주장을 실천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만약 반인륜적인 죄를 저지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참회하지 않고, 떳떳하다면 어찌 해야 할까? 죄에 찌들고, 악에 철저하게 물든 그의 영혼도 사랑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사랑’이 그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떠한 경우의 예외도 두지 않는다. 만약 예외를 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것이고, 그러한 사랑이 있기에 인류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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