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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8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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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1.11~1881.2.9). 여기까지는 널리 알려진,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남긴 많은 걸작들을 모두, 최소한 한 개라도 완독을 한 이는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떤 작가일까?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그에 대해 간단히 정리 해보면, 모스크바 말린스키 시립병원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838~4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846년에 처녀작《가난한 사람들》발표 하였다. 1849년에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시베리아로 유형 되었는데 이때 총살 직전에 황제의 특사로 감형된 그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후《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惡靈)》(1871∼1872) 등을 발표한다.(자료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48095)

 도스토예프스키가 남긴 대작들을 모두 읽고,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수많은 고전이나 걸작들이 그렇듯이 그의 작품들 또한 깊은 의미와 사색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모든 작품을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욕심을 내어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여건 상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그의 여러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고 생각되는 죄와 벌만 읽고자 마음먹었다.

 죄와 벌은 1866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근대 도시를 배경으로 법과 대학을 중퇴한 가난한 라스꼴리니꼬프를 그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기아상태에 빠져 자신이 가진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돈으로 하숙방 비를 해결하는 등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는 전당포를 몇 번 드나들며 헛된 공상을 하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다. 전당포의 노파를 살해한 것이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별다른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그러나 한 여인으로 인해 차츰 동요가 일어난다.

 

 죄란 무엇일까? 사회적인, 성문법 안에서의 죄는 법에 반하고, 그것이 정해 놓은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의 죄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벌은 무엇일까? 법적 측면에서는 잘못을 하거나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것에 합당한 고통을 주는 것이다. 심리학적 측면에서는 어떠한 행동의 빈도수를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 유쾌한 자극을 빼앗고, 불쾌한 자극을 주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객관화 시킬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생각과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죄와 네가 생각하는 죄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도모하기 위하여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나로 제한하기 위한 강제적 장치인 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로 인한 벌의 종류와 강도를 정하는 데에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에 그것을 하나로 제한하기 위하여 법적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죄는 상대적이다. ‘너와 내’가 ‘특정한 상황에서의 어떠한 행동은 죄’라고 합의 하였기에 그것이 죄라고 인식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합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인식 된다. 살인을 예로 들어보자. 내가 평상시에 누군가를 살인 하였다면 그것은 명백히 죄이다. 그러나 전시에 적군을 죽였다면 누구도 그것을 죄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살인, 곧 죄를 ‘법과 제도적 측면’에서 이해하였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죄 인식은 다른 측면에서도 가능하다. 전시에 적군을 살인하였다고 해도 나의 마음속에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이 생긴다. 이것은 죄를 ‘도덕과 양심의 측면’에서 이해한 결과이다. 어느 측면으로 인식하든 ‘너와 내’가 죄라고 합의한 - 혹은 교육에 의해 그렇다고 인식된, 어쩌면 인간이 날 때부터 이미 그 내부에 죄를 인식할 수 있는 잠재된 기준이 있을지도 모르는 이유로 - 행위에 대해서만 죄라고 인식하기에 그것을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꼴리니꼬프는 무척 빈궁한 생활에 허덕였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죄를 짓게 된다. 그것은 개인의 양심에 국한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작은 죄’가 아니라 인류가 정한 ‘가장 극악한 죄’인 살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무감각 했다. 그저 여느 살인범과 같이 자신의 죄를 숨기고, 벌을 피하려 할 뿐이었다. 그처럼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의 죄에 대해 - 법학도이기에 누구보다 자신의 죄의 잘못과 심각성을 (법적 측면에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 무감각 했던 이유는 ‘너와 나’라는 죄의 상대적 충족조건 중 ‘너’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결핍 중에 한 여인으로 인해 자수를 하고, 벌을 받게 된다.

 왜 인간은 죄를 지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피의자에게 심한 고통을 줌으로 같은 고통을 다시 맛보지 않으려는 인간의 심리와 육체적 거부를 이용하여 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양심과 종교적 측면에서는 죄로 더럽혀진 순결한 영혼을 벌을 통하여 깨끗했던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의식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순결한 영혼을 악(죄)으로 물들이지 않으려는 영혼의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수를 하여 벌을 받지만 죄질에 비해 가벼운 벌인 8년의 시베리아 유형을 받게 된다. 벌인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죄에 대한 물리적 벌은 - 비록 합당한 만큼은 아니지만 - 받았지만 양심에 대한 벌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단지 범인으로서 들킨 것에 대한 자책을 할 뿐이다. 그의 자수는 죄를 법적 측면에서만 인식한 결과이다. 여전히 그의 죄 인식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런데 소냐라는 한 여인으로 인해 그는 결핍된 ‘너’가 충족됨으로, 다시 말해서 죄 인식에 대한 상대성이 완성됨으로 마침내 그의 마음은 동요를 일으킨다. 이제 자신의 죄와 그 잘못을 양심으로 인식하게 된다. ‘너와 나’의 합의가 드디어 모든 측면 - 법과 양심 - 에서의 죄 인식을 가져 온 것이다.

 

 인간의 죄 인식은 법과 양심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하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합의된 것이다. 교육에 의해 강제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넣어 준, 날 때부터 갖게 되는 프로그래밍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든 죄 인식은 인간의 편의, 즉 서로의 안녕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보편적 상황에서는 그것에 일조를 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편의만을 추구한다. 상대의 피해는 생각하지 않는다. 죄를 저지른다. 과연 죄에 대한 벌로 보편적 상황을 넘어 특수한 상황에서까지 죄에 대한 욕구를 소멸시켜서 마침내 모두의 안녕을 이룰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법은 그것에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법도 범죄를 막지 못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증명한다. 오늘의 뉴스가 증거 한다. 그렇다면 양심은 어떠할까? 그 또한 법과 다를 바 없다. 보편적 상황에서는 법과 양심이 모두 발동을 하여 죄의 충동을 막는다. 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 둘 다 힘을 잃는다. 과연 인간에게 희망이 있을까? 안녕을 이룰 수 있을까?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사랑’이 아닐까 싶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마침내 양심으로까지 죄를 인식하게 된 것은 소냐의 사랑 덕분이다. 그에 대한 소냐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는 죽기 전까지도 죄 인식의 완성을 이루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냐의 사랑은 그의 양심을 흔들었고, 마침내 그의 죄를 - 진정한 의미에서 - 알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앎은 어떠한 의미에서 그에게는 진정한 벌이 된다.

 

 인간이 정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죄는 분명히 나쁜 것이다.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한 벌은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양심은 죄에 대한 법의 태도에 동의하지만 벌에 대해서는 - 부분적으로 -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인권에 호소하여 사형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죄를 지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다수의 인권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한 사람에 의해 다수의 인권이 침해 된다면 그 사람의 인권이 어느 정도 희생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영혼은 귀하다. 따라서 아무리 나쁜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영혼은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죄에 대한 일정한 벌을 주되 범법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 만약 내가 피해자가 된다면 솔직히 말해서 나의 주장을 실천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만약 반인륜적인 죄를 저지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참회하지 않고, 떳떳하다면 어찌 해야 할까? 죄에 찌들고, 악에 철저하게 물든 그의 영혼도 사랑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사랑’이 그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떠한 경우의 예외도 두지 않는다. 만약 예외를 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것이고, 그러한 사랑이 있기에 인류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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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 완역본 하서 완역본 시리즈 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재남 옮김 / (주)하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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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월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하면 어떤 사람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넣는다. 그만큼 그 작품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졌고, 가장 친숙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로미오와 줄리엣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것은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 

이다. 이 4대 비극을 모두 읽어 본 이는 얼마나 될까? 아니 넷 중 단 하나라도 읽어 본 이는 얼마나 될까? 문학을 좋아하는 이라면, 아니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졸지 않은 이라면 네 작품 모두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 작품을 직접 끝까지 읽어 본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본인도 그 중 한 명이기에 영문학도로서 참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다 이번에 4대 비극 중 햄릿을 읽을 좋은 기회가 생겨서 부끄러움을, 영문학도로서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게 되어 위안이 된다. 

 햄릿은 왜 4대 비극에 속할까? 우선 비극과 희극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비극적인 결점(tragic flaw)'에 있다. 주인공이 그것을 가지고 있는냐? 그렇지 않느냐? 그것을 극복하면 희극이 되는 것이고, 극복하지 못하면 비극이 되는 것이다. 햄릿은 비극적인 결점을 극복하지 못하였기에, 비극적 요소가 강하기에 4대 비극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면 햄릿의 비극의 시작을 잠깐 살펴보자. 

 이야기는 성 위에서 시작한다. 두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는데 저 멀리서 유령이 나타난다. 그 유령은 선왕, 현재 왕의 형이었다. 선왕은 주인공 햄릿의 아버지였기에 보초들은 햄릿에게 그 사실을 보고한다. 햄릿은 유령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동생인 현왕에게 독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령은 햄릿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햄릿은 수락한다. 

 햄릿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감춰진 진실을 알게 된 후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아버지가 죽은지 두어 달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그 동생에게 시집을 가서 그의 품에 안긴 어머니를 생각하니 심사가 뒤틀린다. 어머니로 인해 여자에 대한 증오로 이어져 사랑하던 오필리아를 버리는 몹쓸짓을 한다.  

 이 작품은 주인공 햄릿의 심리적 갈등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내적 갈등과 의문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한다. 그런 그의 갈등은 다음의 유명한 대사에 매우 잘 나타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그의 정신적 방황은 결국 되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상황을 이끈다. 모두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과연 상황을 개선 할 여지가 조금도 없었을까? 모두의 죽음이 아닌 화해와 공존은 불가능 했을까? 

 우리는 원인은 다르지만 종종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갖는다. 그때 나에게 행한 잘못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습과 교육 등으로 인한 심리적 제어 장치가 작동하여 용서해야 한다고 나를 설득한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아우성을 친다. 사회의 성문법이나 도덕법에 견주어 죄질이 가볍다면 쉬이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햄릿의 경우와 같이 부모를, 가족을 살해한 이를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피의자가 나와 매우 가까운 이였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아마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그런 상황에서 용서를 발휘하기란 누구도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연극의 주인공이다. 우리의 인생에는 '비극적인 결점'이 있다. 그것을 극복하면 희극의 주인공이 될 것이고, 극복하지 못하면 비극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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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왕과 마주치다 - 하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
제임스 W. 골.마이클 앤 골 지음, 신상문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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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의 왕과 마주치다!!! 천사의 임재에도 압도되는 우리인데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하나님과 대면했을 때는 어떠할까? 말씀을 통해 그것을 짐작 할 수 있긴하지만 실제로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평소에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지만 초자연적인 현상은 글쎄... 믿지 못하는건 아니지만 워낙 사기극이 많아서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의심했던 것이 나의 솔직한 모습이다. 우상을 섬기는 무당과 주술사들도 갖가지 기적을 행한다. 그들도 초자연적인 일을 겪고 일으키는데 어느 것이 하나님으로 인한 것일까 항상 의문이 들었다. 여러 책에서 증거하는 기적들이 과연 하나님의 역사일까 의심했다.

 이 책도 그러한 마음으로 읽었다. '같은 내용이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의 혹은 그분의 종의 영을 만났다거나 하는 다른 간증과 다름 없는 내용이겠거니 생각하며 솔직히 큰 기대없이 읽었다. 내심 다르길 기대하며...

 물론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책 만큼은 다르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상황과 내 마음의 상황이 그것을 다르게 받아 들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


 해가 바뀌어 2008년이 되었지만 나의 영적 상태는 점점 어두워졌다. 청년부 찬양 인도를 아주 기쁜 마음으로 맡았지만 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정죄 했다. 자발적으로 시작했지만 후회와 함께 그만 하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작년 말에 청년부 목사님이 갑작스레 사임을 하셨고 여러 달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더구나 믿고 있던, 듬직한 소그룹(우리 교회에서는 셀) 리더들이 모두 함께 그만두고 경험 없는 이들이 새로운 셀의 리더로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찬양 인도자까지 바뀌게 되었으니 어찌 혼란이 없을 수 있으랴? 모든 것들이 동시에 바뀌어 버렸는데!!! 그때부터 공동체의 매우 힘든 시기가 시작 되었고, 그 가운데 놓인 나도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휩쓸리게 된 것이다. 그러다 지난 주에 하나님에 의해 공동체가 회복될 수 있는 있는 힘을 얻었고, 그 상황에서 나는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다. 골(Goll) 부부가 현대 의학적으로 결코 임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하나님의 치유를 받고 무려 네 자녀를 얻게된 사연과 골 여사가 무려 9주!!! 동안 하나님의 방문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두렵고 놀라운 일인가? 단 한 순간의 방문에도 놀라자빠질 우리인데 9주 동안이나 눌렸다는 것(물론 좋은 의미에서)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우리가 구원 받은 것만큼이나 놀라운 기적이다! 누구는 단 한 번도 방문을 받지 못하는데 9주라니!!! 그들을 얼마나 쓰시려기에 그러나 기대와 질투가 들었다!

 두 저자는 기적의 내용을 담은 다른 책들과 비교하면 하나님을 통해 자신들이 겪은 기적을 그리 많이 이야기 하지 않는다. 아마도 기적을 다루하는 책 중에 가장 기적을 적게 증거하는 책일 것이다.

 다른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 기적, 기적... 어떠한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며 계속 기적만 언급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무슨 기적이 일어났다"라는 기적적인 일에 대한 언급은 생각보다 적다. 대신 기적에 대한 이론(?)을 많이 알려준다. 때문에 다른 책은 참 식상 했는데 이 책은 마음에 든다. 

 이 책은 기적, 정확하게는 "예언적 은사'를 다룬다. 앞서 말한 그에 대한 이론이란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예언적 은사의 목적, 계시적 은사에 들어갈 때 피해야 할 함정, 초자연적 사역에서 피해야 할 다섯 가지, 초자연적 사역에서 꼭 해야 할 다섯 가지 등이다. 자신들을 부러워하게 만드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신들과 같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우리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누구를 치유했다거나 미래를 예언 했다거나 하는 이야기 말이다. 그것들은 모두 은사에 의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는 다양하다. 각 사람에게 맞는 은사를 주신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에게 맞는 은사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막무가내로 자신이 원하는 은사를 달라고 조른다. 모두 같은 은사, 특히 가시적인 은사 받기에만 매달린다. 본질과는 매우 동떨어졌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주께 순종하고 겸손할 때, 그의 일을 더욱 구하고 바랄 때 우리 삶 가운데서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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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富論 선부론 - 능력 있는 자, 먼저 부자가 되라
던컨 휴잇 지음, 송희령.김민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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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서운 속도로 몸집을 불리고 있는 중국. 우리나라는 선조 때부터 그들에게 당해 왔다. 그렇기에 그들의 급속한 성장은 우리에게 또다시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너머 전세계에 위협이 되고 있는 중국이다. 

 우리나라와 중국, 양국의 지난 역사 속에서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두 나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두 나라의 관계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성장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이 매우 흥미롭다.

 저자 '던컨 휴잇'은 20 여년 간 중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중국의 속속들이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는 이 책 '선부론'을 통해 객관적 시각으로 개혁개방의 언저리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시대상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총 13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각 파트의 주제는 사회의 다방면에 걸쳐 있다. 교육, 문화, 미디어, 복지, 삶의 스타일, 성, 종교, 등 사회의 주요 부분들에 대해 기자라는 그의 이력을 잘 살려 날카롭게 다루고 있다. 그것들은 상당히 자세하고, 매우 객관적이다. 

 던컨은 지인들을 통해 보고 들은 사실들과 취재한 내용들을 가감없이 기술 하였다. 그 때문에 여과없는 중국의 모습이 더욱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중국의 모습을 한눈에 이해하기 쉽다. 글 또한 어렵지 않아 600 페이지가 넘음에도 술술 읽힌다.

 책을 읽다보니 왠지 우리나라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들의 과도기적 모습들이 우리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여 비록 다른 나라지만 크게 공감이 되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그렇지 않은듯 하면서도 슬며시 시장경제 체제로 모습을 바꾸어 가고 있는 중국. 과도기에 있기 때문에 적잖은 진통을 겪고 있다. 그것이 사회 다방면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첫 파트인 '변화하는 도시'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들은 오랜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귀한 유물 유적들이 많다. 하지만 발전을 위해서 도시 내에 있는 소중한 유적들을 망설임 없이 허물어 버리는 그들. 깨끗이 무너 뜨리는 능력 만큼이나 다시 세울 수 있는 능력도 있음을 과시하는 그들. 다른 파트들은 어느 정도 공감하고, 이해 했으나 이 부분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중국의 여러 부분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나에게 매우 유익한 책이 되었다.

 사실 책에서 선부론과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은 없다. 다만 덩샤오핑의 선부론에서 시작된 경제개혁 정책으로 인한 중국의 변화 모습을 다룰 뿐이다. 그래서 선부론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기 원했던 나에게는 다소 아쉬운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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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라무슈
프로메테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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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출간 되어 작가 라파엘 사바티니를 인기 작가로 등극 시켰다는 활극소설 '스카라무슈'.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제대로된 활극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활극소설의 주 요소인 싸움, 도망, 모험 등이 제대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이 이제야 완역 되어 나오다니! 지금과 같이 유명 외서들을 재깍재깍 번역 소개하는 한국 출판 시장에 아쉬움이 들면서 동시에 안도감이 든다.

 시대배경은 '프랑스' 하면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의미 있고, 격동적 시대라 할 수 있는 프랑스 혁명기의 한복판이다. 떄문에 그 시기의 주요 사건들이 일부 그려져 있다. 
 

 
 주인공인 앙드레 루이는 부모가 없는 고아이다. 그런 그의 양육과 교육을 가브리악의 영주 켕텡 드 케르까디유가 대부로서 책임 졌다. 때문에 가브리악 사람들 사이에 여러 추측들이 오고갔다.

 루이의 직업은 총 세 번 바뀌는데 그것은 변호사, 연극배우, 검객이다. 그것의 원인은 그의 친구 빌모렝이 드 라 뚜르 다쥐르 후작의 모략으로 죽음을 당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빌모렝의 부당한 죽음에 격분한 루이는 대부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렌에 있는 국왕대리인의 법정을 찾간다. 비롯 높진 않지만 변호사라는 조금은 도움이 될 만한 지위와 그만의 영민함 그리고 뛰어난 말솜씨로 다쥐르 후작을 고발한다. 하지만 거기서도 다쥐르의 후작이라 높은 지위에 부딪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다. 재판소를 나오던 길에 거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특권계급을 고발, 비난하고 그들을 선동한 죄로 도망자 신세, 즉 본격적으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된다.

 두 번때 직업인 연극배우로서의 삶은 초반에 비교적 순탄하게 흐른다. 하지만 다쥐르 후작과의 악연으로 그 삶은 막을 내리게 된다. 

 세 번째 검객, 정확히 말하자면 펜싱 마스터로서의 삶 또한 초반에는 굴곡 없이 이어지나 결코 끊을 수 없는 다쥐르와의 악연이 또 다시 발동해 막을 내리게 된다.

 주인공 루이는 그렇게 세 가지, 아니 총 네 가지의 직업(펜싱 마스터 이후에 짤막한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갖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높은 사람들 그리고 증간 계층의 사람들까지 사회가 정한 각 계층의 사람들을 모두 만나게 된다. 실로 파란만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이다! 그 모든 원인이 다쥐르 후작으로 인함이었고, 그의와 질긴 악연은 소설이 막을 내릴 때까지 이어진다.

 처음에는 다쥐르에 대한 분노와 원한으로 시작된 루이의 삶의 굴곡이 사실은 그게 아니었음이 말미에 밝혀진다. 다른 원인에 의해 발생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출생의 비밀 또한 마지막에 밝혀져 소설을 읽는 동안 쌓인 모든 궁금증이 한번에 속시원히 풀어진다.

 우리에게는 익숙치 않은 프랑스어 몇 가지가 등장하여 낯선 느낌이 들게한다. 그리고 어느 부분에서는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지나가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는 흐름이 너무 빠르고, 세밀하지 못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500 페이지가 넘는 긴 내용임에도 상당히 몰입이 되어 개인적으로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사회 계급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갈등은 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남용하고, 악용한 지배 계층의 폐단으로 발생했다. 민중의 요구를 무시함으로 발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쥐르 후작의 말과 같이 계급은 결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없애기 위해 개혁을 이루어 새 집단을 만들어 내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어떨 수 없이 계급이 다시 정해지게 된다. 단체 유지를 위해 계급 형성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그렇기에 계급 발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 계급, 각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악용하지 않고, 모두의 이로움을 위해 얼마나 그 자리에 충실하고 책임을 다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에서 그것은 이룰 수 없는 이상향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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