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8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1.11~1881.2.9). 여기까지는 널리 알려진,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남긴 많은 걸작들을 모두, 최소한 한 개라도 완독을 한 이는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떤 작가일까?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그에 대해 간단히 정리 해보면, 모스크바 말린스키 시립병원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838~4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846년에 처녀작《가난한 사람들》발표 하였다. 1849년에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시베리아로 유형 되었는데 이때 총살 직전에 황제의 특사로 감형된 그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후《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惡靈)》(1871∼1872) 등을 발표한다.(자료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48095)

 도스토예프스키가 남긴 대작들을 모두 읽고,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수많은 고전이나 걸작들이 그렇듯이 그의 작품들 또한 깊은 의미와 사색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모든 작품을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욕심을 내어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여건 상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그의 여러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고 생각되는 죄와 벌만 읽고자 마음먹었다.

 죄와 벌은 1866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근대 도시를 배경으로 법과 대학을 중퇴한 가난한 라스꼴리니꼬프를 그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기아상태에 빠져 자신이 가진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돈으로 하숙방 비를 해결하는 등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는 전당포를 몇 번 드나들며 헛된 공상을 하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다. 전당포의 노파를 살해한 것이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별다른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그러나 한 여인으로 인해 차츰 동요가 일어난다.

 

 죄란 무엇일까? 사회적인, 성문법 안에서의 죄는 법에 반하고, 그것이 정해 놓은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의 죄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벌은 무엇일까? 법적 측면에서는 잘못을 하거나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것에 합당한 고통을 주는 것이다. 심리학적 측면에서는 어떠한 행동의 빈도수를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 유쾌한 자극을 빼앗고, 불쾌한 자극을 주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객관화 시킬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생각과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죄와 네가 생각하는 죄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도모하기 위하여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나로 제한하기 위한 강제적 장치인 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로 인한 벌의 종류와 강도를 정하는 데에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에 그것을 하나로 제한하기 위하여 법적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죄는 상대적이다. ‘너와 내’가 ‘특정한 상황에서의 어떠한 행동은 죄’라고 합의 하였기에 그것이 죄라고 인식 되는 것이다. 그러한 합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인식 된다. 살인을 예로 들어보자. 내가 평상시에 누군가를 살인 하였다면 그것은 명백히 죄이다. 그러나 전시에 적군을 죽였다면 누구도 그것을 죄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살인, 곧 죄를 ‘법과 제도적 측면’에서 이해하였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죄 인식은 다른 측면에서도 가능하다. 전시에 적군을 살인하였다고 해도 나의 마음속에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이 생긴다. 이것은 죄를 ‘도덕과 양심의 측면’에서 이해한 결과이다. 어느 측면으로 인식하든 ‘너와 내’가 죄라고 합의한 - 혹은 교육에 의해 그렇다고 인식된, 어쩌면 인간이 날 때부터 이미 그 내부에 죄를 인식할 수 있는 잠재된 기준이 있을지도 모르는 이유로 - 행위에 대해서만 죄라고 인식하기에 그것을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꼴리니꼬프는 무척 빈궁한 생활에 허덕였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죄를 짓게 된다. 그것은 개인의 양심에 국한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작은 죄’가 아니라 인류가 정한 ‘가장 극악한 죄’인 살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무감각 했다. 그저 여느 살인범과 같이 자신의 죄를 숨기고, 벌을 피하려 할 뿐이었다. 그처럼 라스꼴리니꼬프가 자신의 죄에 대해 - 법학도이기에 누구보다 자신의 죄의 잘못과 심각성을 (법적 측면에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 무감각 했던 이유는 ‘너와 나’라는 죄의 상대적 충족조건 중 ‘너’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결핍 중에 한 여인으로 인해 자수를 하고, 벌을 받게 된다.

 왜 인간은 죄를 지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피의자에게 심한 고통을 줌으로 같은 고통을 다시 맛보지 않으려는 인간의 심리와 육체적 거부를 이용하여 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양심과 종교적 측면에서는 죄로 더럽혀진 순결한 영혼을 벌을 통하여 깨끗했던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의식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순결한 영혼을 악(죄)으로 물들이지 않으려는 영혼의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수를 하여 벌을 받지만 죄질에 비해 가벼운 벌인 8년의 시베리아 유형을 받게 된다. 벌인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죄에 대한 물리적 벌은 - 비록 합당한 만큼은 아니지만 - 받았지만 양심에 대한 벌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단지 범인으로서 들킨 것에 대한 자책을 할 뿐이다. 그의 자수는 죄를 법적 측면에서만 인식한 결과이다. 여전히 그의 죄 인식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런데 소냐라는 한 여인으로 인해 그는 결핍된 ‘너’가 충족됨으로, 다시 말해서 죄 인식에 대한 상대성이 완성됨으로 마침내 그의 마음은 동요를 일으킨다. 이제 자신의 죄와 그 잘못을 양심으로 인식하게 된다. ‘너와 나’의 합의가 드디어 모든 측면 - 법과 양심 - 에서의 죄 인식을 가져 온 것이다.

 

 인간의 죄 인식은 법과 양심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하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합의된 것이다. 교육에 의해 강제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넣어 준, 날 때부터 갖게 되는 프로그래밍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든 죄 인식은 인간의 편의, 즉 서로의 안녕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보편적 상황에서는 그것에 일조를 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편의만을 추구한다. 상대의 피해는 생각하지 않는다. 죄를 저지른다. 과연 죄에 대한 벌로 보편적 상황을 넘어 특수한 상황에서까지 죄에 대한 욕구를 소멸시켜서 마침내 모두의 안녕을 이룰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법은 그것에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법도 범죄를 막지 못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가 증명한다. 오늘의 뉴스가 증거 한다. 그렇다면 양심은 어떠할까? 그 또한 법과 다를 바 없다. 보편적 상황에서는 법과 양심이 모두 발동을 하여 죄의 충동을 막는다. 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 둘 다 힘을 잃는다. 과연 인간에게 희망이 있을까? 안녕을 이룰 수 있을까?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사랑’이 아닐까 싶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마침내 양심으로까지 죄를 인식하게 된 것은 소냐의 사랑 덕분이다. 그에 대한 소냐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는 죽기 전까지도 죄 인식의 완성을 이루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냐의 사랑은 그의 양심을 흔들었고, 마침내 그의 죄를 - 진정한 의미에서 - 알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앎은 어떠한 의미에서 그에게는 진정한 벌이 된다.

 

 인간이 정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죄는 분명히 나쁜 것이다.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한 벌은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양심은 죄에 대한 법의 태도에 동의하지만 벌에 대해서는 - 부분적으로 -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인권에 호소하여 사형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죄를 지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다수의 인권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한 사람에 의해 다수의 인권이 침해 된다면 그 사람의 인권이 어느 정도 희생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영혼은 귀하다. 따라서 아무리 나쁜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영혼은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죄에 대한 일정한 벌을 주되 범법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 만약 내가 피해자가 된다면 솔직히 말해서 나의 주장을 실천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만약 반인륜적인 죄를 저지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참회하지 않고, 떳떳하다면 어찌 해야 할까? 죄에 찌들고, 악에 철저하게 물든 그의 영혼도 사랑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사랑’이 그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떠한 경우의 예외도 두지 않는다. 만약 예외를 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인 것이고, 그러한 사랑이 있기에 인류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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