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예배자 솔로몬의 축복 - 일천 번의 예배로 기적을 일궈낸 솔로몬의 축복이야기
김병태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여러 잘못된 신앙이 퍼져 있다. 그 중 하나는 복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다. 물론 복 그 자체가 나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복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복만 주시는 분으로 착각한다. 자신도 모르게 그분을 단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한다. 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했을 때 따라오는 것이다.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순종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주객이 전도 되어 순종은 뒤로 한 채 복 받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어쨌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그런데 복을 무조건 주시지는 않는다. 자녀들이 옳고, 착한 행동을 했을 때 칭찬을 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바를 때에만 복을 주신다. 당신의 뜻을 따르고, 당신께 순종 했을 때에만 주신다. 그 한 예로 성경에서 다윗과 솔로몬을 들 수 있다. 춤추는 예배자로 유명한 다윗, 일천번제로 유명한 솔로몬. 그 둘은 비록 하나님께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럼에도 큰 복을 받았다. 두 사람 중 아들인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닦아 놓은 터 위에서 아버지보다 더 큰 복을 받았다. 그는 살다보니 얼떨결에 복을 받게 된 게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복을 받은 비결은 무엇일까? 도대체 그가 무엇을 했기에 그토록 넘치는 복을 받은 것일까?

 

 '춤추는 예배자 솔로몬의 축복'

 

 이 책에는 솔로몬이 복을 받은 비결이 담겨 있다. 솔로몬이 어떻게 엄청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는지 알려주고 있다. 총 7장, 28개의 소주제를 통해 솔로몬의 복의 비결을 조목조목 가르쳐 주고 있다. 아쉬운 점은 복은 이런 것이다 라고 직접적으로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솔로몬을 예로 듦으로 오늘날 세속화된 관점에서의 복, 즉 많은 물질을 가지는 것만이 복을 받은 것처럼 여기도록 한다는 것이다. 물론 복을 받는 비결을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솔로몬은 복의 대명사이기에 그를 예로 든 것이겠지만 그래도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신자나 불신자나 복의 척도는 물질적 부유함이다.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통해 얼마나 큰 안락과 여유를 누리는지를 통해 복을 판가름 한다. 물질적 부유함은 복의 한 형태이지 반드시 그것만이 복의 척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세속화된 복의 관점을 신자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돈이 없으면 저주 받은 것인가? 그렇다면 사도들은 모두 저주 받은 이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저주를 받은 가장 불행한 이들이다. 

 

 복의 형태는 반드시 물질의 부유함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 자족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 할 줄 아는 게 가장 큰 복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분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게 가장 큰 복이다. 그것이 일차적인 복이다. 물질은 부수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은연중에 라도 부수적인 것을 생각하기보다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고, 바라봐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란 무엇인가 -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3판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3
E. H. 카 지음, 권오석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로는

 

  "인류 사회의 흥망과 변천의 과정. 또는 그 기록"

 

이라고 한다. 저명한 역사가인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그의 책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라고 말했다. 기존의 역사가들의 역사에 대한 견해를 비판하는 말이다. 정치인이자 사학자였던 카는 그 책 - '역사란 무엇인가'는 카가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한 연속 강연을 하나로 묶어 출판한 책이다. - 에서 역사가들의 기존의 관점을 반박한다. 그것을 통해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꾸어 준다.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역사를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읽고나면 역사에 대한 새로운 조망을 얻게 될 것이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 (반박의 여지가 있는 말이지만) 인류의 역사는 반복 된다는 말과 같이 - 역사는 미래의 이정표이다. 그것은 미래의 단초를 제공한다. 역사에는 역사가에 의해 가치가 있다고 판단 되어 선택된 내용만 담기지만 어쨌든 그것은 미래를 대비하고, 설계하는데 도움을 준다. 아니 미래를 대비하고, 설계 하기도 전에 어쩌면 역사에 의해 미래가 결정 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미래를 역사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래는 역사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투영이라고 본다. 미래는 역사의 영향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역사가 미래를 100%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개인이든 국가든 역사의 올바른 이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역사를 절대적으로 바라 볼 수는 없다.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이 상대적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대함에 있어서 최대한의 합리적 기준과 보편성을 적용해야 한다. 그러한 기준을 바탕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현재를 살아갈 때에 보다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말론 - 2012 마야력부터 노스트라다무스, 에드가 케이시까지
실비아 브라운 지음, 노혜숙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불안한 시대마다 종말론이 대두 되었다. 세상이 멸망하여 모두가 죽을 것이라는 일단의 주장에 어떠한 사람들은 현혹 되어 불안에 떨었다. 극단적인 이들은 자살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최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다. 가장 최근에는 세기말 예언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최근인 요즘 2012 종말론으로 일각이 시끄럽다.

 

 

 

 또 다시 종말론이 대두 되고 있는 지금 그에 관한 많은 책이 쏟아지고 있다.

 

 '종말론 - 2012 마야력부터 노스트라다무스, 에드가 케이시까지"

 

라는 책은 그 중 하나로 여러 문명과 종교, 그리고 예언가들에 의한 종말론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저자 실비아 브라운은 카톨릭과 유대교, 감리교와 루터교 등 여러 종교적 배경을 가진 가족구성원들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녀는 심리학과 비교종교학을 전공 했고, - 한국에서는 낯설지만 - 자신의 집에서 몇몇 사람들에게 상담을 겸해 예언을 해주어 유명해졌다(책 날개 저자 소개 인용).

 

 예언가이자 영매인 실비아 브라운은 이 책에서 지구의 멸망 혹은 존속은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종말론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될지는 우리하기 나름이라고 말한다. 각각의 종말론은 종말에 대해 분명히 주장하기에 비관적이지만 그녀의 주장은 다소 희망적이다. 그녀의 주장을 비판한다면 주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둔 교묘한 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불길한 주장대로 종말이 찾아 든다면 인간의 잘못 때문이라고 하면 되고, 찾아들지 않는다면 인간이 잘 한 덕이라고 하면 된다. 그러면 그녀에게 날아오는 화살이 줄어 들 것이기에 그녀의 주장이 참으로 치사하게 느껴진다. 어쨌든 책 말미에서 그녀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예언하고 있으니 그녀는 또 다른 사기 꾼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보다는 좀 더 나은 예언가인지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책에 적힌 문구와 같이 종말론은 신의 경고 일까? 인간의 사기일까? 종말은 신의 저주일까? 인간의 책임일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종말이 정말 일어날 것인지, 그것은 신에 의해 계획된 일인지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일인지, 그도 아니면 지극히 자연적인 일인지 말이다. 중요한 것은 종말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죽게 될 존재이다. 인간 각각의 종말은 어떠한 기술로도 막을 수 없는 분명한 것이다. 따라서 지구의 종말이 일어날 것인지 일어나지 않을 것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유한한 인생을 얼마나 가치있게 사느냐이다.

 

 지구 종말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종말은 분명하기에 그 종말을 어떻게 준비하고, 그 종말까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보다 더 중요하다. 그것이 더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 알 수 없는 미래로 인해 불안해 떨기보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더욱 가치 있게 살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다. 한번 뿐인 인생 막 살다 가면 아깝지 않은가? 누려보고 싶은 것들을 누려보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죽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사는 것. 그것에 매진 것이 더 나은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 꿈이 있는 자유, 한웅재가 들려주는
한웅재 지음 / 좋은생각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의 인생은 어떠한 의미에서 노래이자 시이다. 특별한 인생을 살다간 사람의 인생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이의 인생이 노래와 시이다. 그만큼 모두의 인생은 역동적이고, 아름답다. 그 안에 담긴 수많은 기쁨과 아픔은 나름의 사연이 있고, 가치가 있다. 그 노래를, 그 시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이자 시이다.

 

 한웅재, 그는 목사이자 CCM 아티스트이다. 꿈이 있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그의 노래는 어느덧 15년 째. 그는 그동안 6장의 꿈자 앨범과 1장의 솔로 앨범을 낸, CCM 계의 어엿한 중견 뮤지션이다. 짧지 않은 그 시간 동안 그는 많은 이들에게 말씀으로, 노래로 하나님을 전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노래에 공감하며 함께 한 가사로, 한 곡조로 하나님을 고백 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노래가 아닌 글로, 가수가 아닌 작가로 자신의 시간을, 주님을 이야기 한다.

 

 말하듯이 노래하고, 노래하듯이 말하고 싶다는 그. 이번에는 노래하듯이, 그리고 말하듯이 글을 쓴다. 그의 글 한 자 한 자에서 묻어나는 그의 삶의 노래. 그의 사진 한 장 한 장에서 묻어나는 그의 인생의 여정. 그의 그림 한 장 한 장에서 묻어나는 그의 마음의 향기. 모두가 한편의 시이자 노래이다. 그의 살아있음을 알리는 그 고백들이 참으로 소박하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갈한 그의 고백들이 참으로 곱다. 어떠한 고백들은 앞뒤가 없고, 뜬금 없지만 그런 부족한 고백들마저도 그의 향기이니 기꺼이 맡아줄 수 있다. 노래 같은 그의 글, 시와 같은 그의 고백. 그의 고백들을 보노라면 그의 노래를 들을 때와 같이 정겨움이 든다. 소백한 삶의 그 고백들에 귀기울이며 그의 마음을 느낀다.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은 그의 삶을 엿보며 나의 삶을 돌아본다. 그리고 또 한 편의, 나의 노래를 감상한다.

 

 노래와 같은, 시와 같은 우리의 인생. 그것은 단 한 순간도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때론 밝고, 또 때론 어두운 그 노래와 시.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울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
김진 지음 / 위즈덤로드(위즈덤하우스)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주여, 주여." 부르짖는다고 다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그렇게 고백한다고 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겉으로는 아무리 신실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내면은 전혀 다른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 구원은 외면의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내면의 믿음과 그에 맞는 행동의 발현으로 받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입으로 주님을 부르짖어도 구원이 보장 되지는 않는다.

 

 

 

 '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

 

 이 책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앙 행태를 지적한다. 모양은 붕어와 같은데 그 안은 전혀 달라서 진짜 붕어라고 할 수 없는 붕어빵과 같이 모양은 기독교지만 그 안에는 주님이 없는 붕어빵 기독교를 고발한다. 짝퉁 예수를 가르치고, 전하는 붕어빵 기독교의 잘못을 밝힌다.

 

 특이한 점은 이야기를 'MBC 100분 토론' 이라는 TV 프로그램의 형식을 빌려 인물들의 대화로 진행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형식을 통해 다소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를 비교적 쉽게 풀어나간다. 따라서 읽는데 기교적 지루함과 부담이 적고,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 책은 현재 한국 교회의 오류를 밝힌다. 강단에서 행해지는 잘못들과 교회의 문제점 등 한국 교회의 위태한 모습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제시한다. 이야기의 마무리로 비판을 하더라도 사랑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작금의 한국 교회의 문제를 되돌아 보고, 그것을 반성 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단지 그것으로 그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잘못하고 있는 것은 바르게 고치고, 잘 하고 있는 것은 더 잘해야 한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 함께 말이다.

 

 

 

 예배 시간에 복음을 듣는 게 쉽지 않다. 이 말에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설교에 담긴 게 복음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그러면 이렇게 대답 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되는 대부분의 설교에는 복음이 아닌 복음이 담겨 있다라고. 성도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 축복의 말, 긍정의 말만 가득한 설교에 복음은 없다. 단지 복음처럼 교묘하게 위장한 말만 담겨 있다. 물론 모든 설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문제는 많은, 거의 대부분의 설교가 그렇다는데 있다. 그로 인한 문제점은 성도들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나아가 구원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목회자들의 어깨가 매우 무겁다.

 

 로마서에서는 율법주의자에 대하여 믿음이 강조 되었고,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강조 되었다. 그 두 가지를 고루 갖추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입으로만 시인하는 믿음, 혹은 믿음 없는 행위는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성도들이 전자 혹은 후자에 머문다. 그래도 구원을 받을 줄로 착각하고 말이다. 왜 그렇게 됐을까? 목회자들의 잘못이 크다. 성공제일주의에 빠져 성도들의 눈치를 보며 설교를 한 까닭이다.

 

 한국 교회의 미래가 밝지 않다. 물론 하나님의 큰 틀 안에서는 지금의 상황도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문제는 없다. 다만 이대로 간다면 마지막 날에 구원 받는 영혼의 수가 적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기에 한국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을 하루 빨리 수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가 영혼을 소홀히 한 책임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