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인생에 많은 유익을 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습니다. 대개는 자신이 보고 싶은 책을 사서 읽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도서관 등에서 빌려 읽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 무계획적으로 책을 읽을 것입니다. 여기서 무계획적이라는 말은 일련의 계획에 따른 책읽기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책 즉 관심 있는 저자, 현재 나의 관심사에 부합하는 책 등을 선택하여 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썩 바람직한 책읽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책읽기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 정, 의에 만족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서 지란 지식을 말하고, 정이란 정신 혹은 감성을 말하며 의는 윤리를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겠습니다. 지식이란 자기계발 등 현재나 미래를 위한 지식 혹은 기술 향상을 위한 것입니다. 실용성 추구입니다. 감성이란 시나 소설 등을 통한 정신적 즐거움의 추구입니다. 윤리란 인격 성장을 통한 인간다움의 추구를 말합니다(원용일. 『요셉의 인생수업』p207-208 참고.). 그 세 가지를 고루 누리는 것이 균형 잡힌 책읽기이고, 바람직한 책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내적, 외적 만족과 발전을 이루어 현재 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와 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획성 없는 책읽기는 한쪽으로 편중된 책읽기를 하게 합니다. 그것은 결국 지성과 영성의 균형적인 발전을 저해합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물론 계획적이지 않은 책읽기를 하더라도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 책을 읽는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왕 책을 읽을 거라면 좀 더 나은 방법을 통하여 더 큰 도움을 얻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쨌든 자신의 내적 성장과 외적 성장과 그것을 통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균형 잡힌 책읽기를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계획적인 책읽기가 필요합니다. 책을 계획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당연히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앞서 말한 세 가지 영역으로 큰 틀을 잡고, 각각의 영역에 세부 사항을 작성하면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책을 골라서 읽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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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
박철수 지음 / 대장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마 많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곳, 피안의 세계로만 생각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만 맞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 그리고 미래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천국으로도 번역이 되는데 그것은 유대적 문서인 마태복음에서 유래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기에 유대인을 대상으로 썼던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 즉 Kingdom of God을 Kingdom of Heaven 이라는 말로 대체하여 사용한다. 그것이 천국으로 번역 되었다.    

  천국은 단지 죽어서만 가는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이미 이곳에 임한 세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미치는 그 어느 곳이든 천국이다. 그렇기에 그곳은 저 너머의 세계도 되고, 바로 이 세계도 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곧,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즉 하나님 나라는 저 너머의 세계인 것은 물론 이 세상과 나 자신인 것이다.   

 

  위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 하였다. 하지만 다음의 책에서는 그것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 한다.   

  '하나님 나라' 

  이 책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초반부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부터 시작하여 그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한다. 그리고 중후반부에서는 현시대에 대한 대안으로써의 하나님 나라를 설명한다. 한 시대를 살면서 겪는 다양한 일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말한다. 가난, 정치, 환경 등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야기 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아마 많은 이들이 처음 들어봤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 다시 말해서 천국에 대해 단지 죽어서 가는 장소적 개념을 가진 일종의 피안의 세계로 배우거나 생각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먼저 이야기 했듯이 반만 맞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반만 알고 있을까?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신학도는 물론이고, 평신도에게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평신도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 있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개념 정리와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므로 꼭 읽어 볼 것을 권한다. 하나님 나라와 정치에 대한 설명 등 몇몇 부분에서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 책을 추천한다. 참고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생소한 사람은 마지막 장인 '요약과 평가'를 먼저 읽고, 본문을 읽을 것을 당부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미치는 모든 곳이  하나님 나라, 천국이다.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저 너머의 세계라는 장소적 개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세상, 곧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 어디나 천국이다. 그 천국은 기뻐하는 자들의 세계이다. 여기에 그리고 내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만 바라고, 기다려서는 안 된다. 반대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만 누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되, 지금 여기 임한 나라에서는 그에 맞는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은 임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동시에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지경을 넓히는 데 전심전력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천국은 단지 인간이 만든 유토피아가 아니다.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이상 세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분의 나라이다. 분명한 현실이다. 천국에 대한 환상을 깨고, 그것을 바로 직시해야 한다. 천국에 대해 바로 알고, 누리며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현실을 보지 못한다면 망상에 빠져 장차 임할 좁은 천국의 문을 통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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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_jidong 2009-07-19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마지막을 먼저 읽었어야 했는데..상당히 방대한 말씀인지라 나무들에 가려 숲을 볼 수 없다는 느낌이 좀 들었어요. 지도를 먼저 보는게 현명합니다.
 
삭개오의 고백
E.K. 베일리 지음, 문지혁 옮김 / 가치창조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복음서에서 예수님 만나기를 무척 갈망 했던 이들을 여럿 볼 수 있다. 그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삭개오'이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다. 한 지역에서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던 관리 중 가장 높은 이였다. 당시에는 세금을 통한 부정축재가 가능 했다. 삭개오가 세리장이었다는 것은 부당한 방법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 했을 거라는 걸 짐작하게 한다. 그의 이름의 뜻이 '의로운 사람', '순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름 값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눈에 띄는 이유는 그런 이력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마음과 태도 때문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다. 게다가 사람이 많아서 예수님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다. 그가 예수님을 보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병 고침을 받고 싶은 간절함이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한 호기심에 그분을 보려 했다. 예수님에 대한 삭개오의 관심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짐작해 볼 수 있다. 큰 부를 축적 했지만 마음에 만족을 누리지 못했고, 동족들의 멸시를 받아 그분으로 그러한 마음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었다고 말이다(톰슨 2 성경 주석, p128). 아무튼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고, 결국 근처에 있던 나무 위로 올라갔다.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다! 나무 위로 올라간 게 왜 놀라운 일일까? 그 행동은 물질적, 사회적 지위 등으로 인한 체면을 아랑곳 하지 않은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부당한 행동으로 주목 받는 이었는데 예수님이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다른 이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나무 위로 올라갔을까? 결국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분을 집으로 모시는 큰 영광과 새사람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입었다! 예수님과는 너무나 먼 삶을 살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단 한 번 만나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가 눈에 띄는 것이다.

 

 '삭개오의 고백'

 이 책은 위에서 이야기 한 삭개오를 묘사한 책이다. 예수님에 대한 삭개오의 갈망, 그분에 대한 고백을 담고 있다. 동화 형식으로 내용은 무척 짧다. 그래서 읽기 쉽다. 금세 읽을 수 있다. 내용은 비록 쉽고 짧지만 다 읽고 난 후 여운이 남는다. 잔향이 오래 간다.

 본문에서 삭개오가 예수님에 대한 갈망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는지 묘사하고 있다. 여러 사건을 통해 커져만 가는 예수님에 대한 삭개오의 궁금증과 갈망을 보고 있으면 결말이 기다려진다. 책을 읽는 동안 삭개오의 입장이 되어 보았다. 그러자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삭개오가 느꼈던 영적 갈증이 나 또한 느껴졌다. 예수님에 대한 궁금증과 갈망이 점점 크게 일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놀라운 감격이 일었다!

 이 책의 내용은 특이하다. 전체적인 내용은 복음서에 나온 삭개오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삭개오가 겪는 사건들은 모두 성경에 나온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들을 한데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래서 참으로 특이하고, 신선하게 느껴진다.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다른 사건들을 하나로 이었기 때문에 픽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이 너무 싱겁게 끝나 버린다. 단순히 성경에 나온 이야기대로 그치고 만다. 이왕 픽션으로 하려 했으면 좀 더 이야기를 구성 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삭개오의 변화 되는 심경 묘사가 세밀하지 않아 아쉬웠다. 삭개오가 느끼는 감정 표현이 너무나 밋밋하고, 단순한 감탄이나 찬송시로 그칠 뿐이다. 그의 감정의 변화를 좀 더 세밀하게 그렸으면 감동이 더 컸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때문에 이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뜻 읽어보라고 추천하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삭개오에 대한 책이 없다시피 하기에 복음서에 나온 짤막한 구절보다는 그에 대해 조금 더 느끼고 싶은 이라면 한번 쯤 읽어 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삭개오는 자신의 체면을 전혀 무시하고, 예수님을 보기 원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보기 원하나? 그분을 얼마나 갈망하나? 둘의 갈망의 이유가 무엇이든 삭개오와는 너무나 차이나는 내 모습에 부끄러움이 일었다. 삭개오는 구원 받지 못했기에, 반면 나는 이미 구원 받았기에 여유가 있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식어 버린 내 마음에 삭개오를 보며 다시 한 번 불을 지핀다! 예수님 목마릅니다! 당신을 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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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역사, 이슬람 - 서양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이슬람 문화의 황금기 역사
마이클 모건 지음, 김소희 옮김 / 수북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이 말은 흔히 들어 본 말일 것이다.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승자가 역사를 기록한다"

그리고 위의 두 말을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

 "승자는 자신을 정당화 하고, 추앙 한다. 그러나 패자는 왜곡 하고, 은폐 한다."

 물론 위의 말들이나 본인의 풀이를 100% 맞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틀리다고 할 수도 없다. 역사는 일반적으로 승자 중심으로 씌어 지기 때문이다. 승자의 편에 선, 혹은 승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이가 역사를 쓰기에 역사는 승자 중심일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부당하게 사라진 역사가 상당히 많다. 그 중 하나가 이슬람의 역사이다.

 이슬람은 기독교, 불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기독교에 비해 남겨진 역사적 자료가 적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기독교에게 패배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패배라는 말은 현재 세계의 주류는 서구 사회와 문화인데 그 기저에는 기독교가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 대한 상대적 의미이다.

 이슬람은 7세기 초 예언자 무함마드부터 시작하여 한때 중근동 지역은 물론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유럽의 일부를 아우르는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였다. 중세 및 근대에 유럽에 맞서는 당시 세계의 강자였다. 그러나 마지막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멸망을 끝으로 세계의 패권을 기독교에 내주었다. 결과적으로 이슬람은 패자가 된 까닭에 그 역사의 대부분이 사라지게 되었다. - 물론 그것을 모두 기독교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몽골 제국의 침입, 자신 내부의 다툼 등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이슬람 제국에 대해 상당 부분 왜곡되고, 가려졌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유럽의 많은 기술과 문화는 이슬람에서 왔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역사, 이슬람'

 이슬람의 역사는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슬람의 역사는 표면적 역사일 뿐 실제적 역사는 대부분 사라져서 모를 것이다. 그나마 알고 있는 것도 이슬람 '종교'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이 책은 사라져버린 이슬람의 역사를 발굴하여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표면적 역사나 종교에 대해서가 아니라 실제적 역사를 말이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은 단지 '종교로써의 이슬람'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과학 등 '실제로써의 이슬람'을 보여준다. 사라져버린 이슬람 세계의 모습을 우리의 눈앞에 펼쳐준다.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는 이슬람 세계의 비밀, 즉 서양 세계는 이슬람 세계의 지식을 발판으로 세워졌다는 그 놀라운 비밀을 밝힌다. 이슬람 세계가 얼마나 지적이고, 멋있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마도 그것을 몰랐던 이들은 상당히 놀라게 될 것이다.

 아쉬운 점은 내용 전개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진행 되는 것이 아니라 각 주제에 따라 시간을 넘나들며 진행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용이 이어지지 않아 산만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료의 한계로 이슬람 세계를 온전히 재조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두 가지를 제외하면 이 책은 승자 중심의 시각으로 낮게 바라보았던 이슬람 세계가 아니라 나와는 다른 문화로써, 존중된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해준다.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종교로써의 이슬람'이 아니라 '실제로써의 이슬람', 이슬람의 세계를 보여 주기에 혹 기독교 입장에서는 편견을 가지고 이 책의 내용을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책은 우리에게 이슬람의 사라진 역사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있다. 그렇기에 - 비록 더 깊이 있는 부분은 알 수 없지만 - 이슬람에 대해 몰랐던 사실에 대해 알고 싶은 이는 읽어보면 좋은 것이다.

 


 승자는 역사에 자신의 치부를 가린다. 혹 그것을 드러내더라도 미화한다. 반면 패자의 치부는 더욱 드러내고, 좋은 점은 왜곡한다. 물론 그러한 행위가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손의 입장에서는 그로 인해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나의 자랑거리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치부도 함께 고백할 수는 없을까? 남의 자랑거리도 높여주고, 치부는 가려줄 수 없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타인에게는 냉혹하다. 만약 모두가 나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관대 할 때에, 모두에게 객관성을 유지할 때에 누구는 승자가 되고, 또 누구는 패자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둘로 나뉘어 싸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참으로 이상적인 생각이지만 지금 만큼은 이상 속을 거닐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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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는다. 그런데 어떠한 사람들은 단지 열심히 읽는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잘 읽는다. 그러면 책을 열심히 읽는다는 것과 잘 읽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두 개념을 독서법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책을 열심히 읽는다는 것은 다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잘 읽는다는 것은 숙독 혹은 정독이라 할 수 있다. 두 가지에 대해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쉽게 했을 때 열심히 읽는 것은 단지 많이 읽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책을 겉핥기 식으로 읽는 것이다. 책에 담긴 주제나 저자의 주장, 숨은 뜻을 파악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책을 음미하기 보다는 단순히 쭈욱 읽어나가는 것이다. 뭔가 느껴지면 느끼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리는 독서라 할 수 있다. 반면 책을 잘 읽는 것은 주제, 주장, 숨은 뜻 등을 생각하며 책을 음미하는 독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책을 열심히 읽거나 잘 읽을 수 있을까? 우선 책을 열심히 읽기 위해서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책에 대해 흥미와 재미를 가져야 한다. 꾸준함과 규칙성을 유지해야 한다. 정리하면 흥미와 꾸준함 즉 인내가 요구된다. 그러면 책을 잘 읽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책의 주제는 무엇인지 상기하고, 저자의 주장은 무엇인지 파악하며 읽어야 한다. 아니면 책에 나타난 몇몇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며 읽어야 한다. - 그 외에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 그러한 방법들을 이용하며 책을 읽으면 잘 읽을 수 있다.  

 책은 잘 읽어야 한다. 그것이 좀 더 나은 독서법이다. 그렇다고 모든 책을 잘 읽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책 중에도 잘 읽어야 하는 책이 있고, 열심히 읽기만 하면 되는 책이 있다. 카테고리로 예를 들면 인문 서적 등은 잘 읽어야 한다. 반면 몇몇 잡지와 만화 등은 열심히 읽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아무 책이나 열심히 읽거나 잘 읽지 말고, 잘 읽어야 할 책과 열심히 읽어야 할 책을 구분하여 그에 맞게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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