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의 고백
E.K. 베일리 지음, 문지혁 옮김 / 가치창조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복음서에서 예수님 만나기를 무척 갈망 했던 이들을 여럿 볼 수 있다. 그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삭개오'이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다. 한 지역에서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던 관리 중 가장 높은 이였다. 당시에는 세금을 통한 부정축재가 가능 했다. 삭개오가 세리장이었다는 것은 부당한 방법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 했을 거라는 걸 짐작하게 한다. 그의 이름의 뜻이 '의로운 사람', '순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름 값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눈에 띄는 이유는 그런 이력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마음과 태도 때문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다. 게다가 사람이 많아서 예수님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다. 그가 예수님을 보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병 고침을 받고 싶은 간절함이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한 호기심에 그분을 보려 했다. 예수님에 대한 삭개오의 관심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짐작해 볼 수 있다. 큰 부를 축적 했지만 마음에 만족을 누리지 못했고, 동족들의 멸시를 받아 그분으로 그러한 마음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었다고 말이다(톰슨 2 성경 주석, p128). 아무튼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고, 결국 근처에 있던 나무 위로 올라갔다.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다! 나무 위로 올라간 게 왜 놀라운 일일까? 그 행동은 물질적, 사회적 지위 등으로 인한 체면을 아랑곳 하지 않은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부당한 행동으로 주목 받는 이었는데 예수님이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다른 이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나무 위로 올라갔을까? 결국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분을 집으로 모시는 큰 영광과 새사람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입었다! 예수님과는 너무나 먼 삶을 살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단 한 번 만나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가 눈에 띄는 것이다.

 

 '삭개오의 고백'

 이 책은 위에서 이야기 한 삭개오를 묘사한 책이다. 예수님에 대한 삭개오의 갈망, 그분에 대한 고백을 담고 있다. 동화 형식으로 내용은 무척 짧다. 그래서 읽기 쉽다. 금세 읽을 수 있다. 내용은 비록 쉽고 짧지만 다 읽고 난 후 여운이 남는다. 잔향이 오래 간다.

 본문에서 삭개오가 예수님에 대한 갈망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는지 묘사하고 있다. 여러 사건을 통해 커져만 가는 예수님에 대한 삭개오의 궁금증과 갈망을 보고 있으면 결말이 기다려진다. 책을 읽는 동안 삭개오의 입장이 되어 보았다. 그러자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삭개오가 느꼈던 영적 갈증이 나 또한 느껴졌다. 예수님에 대한 궁금증과 갈망이 점점 크게 일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놀라운 감격이 일었다!

 이 책의 내용은 특이하다. 전체적인 내용은 복음서에 나온 삭개오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삭개오가 겪는 사건들은 모두 성경에 나온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들을 한데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래서 참으로 특이하고, 신선하게 느껴진다.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다른 사건들을 하나로 이었기 때문에 픽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이 너무 싱겁게 끝나 버린다. 단순히 성경에 나온 이야기대로 그치고 만다. 이왕 픽션으로 하려 했으면 좀 더 이야기를 구성 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삭개오의 변화 되는 심경 묘사가 세밀하지 않아 아쉬웠다. 삭개오가 느끼는 감정 표현이 너무나 밋밋하고, 단순한 감탄이나 찬송시로 그칠 뿐이다. 그의 감정의 변화를 좀 더 세밀하게 그렸으면 감동이 더 컸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때문에 이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뜻 읽어보라고 추천하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삭개오에 대한 책이 없다시피 하기에 복음서에 나온 짤막한 구절보다는 그에 대해 조금 더 느끼고 싶은 이라면 한번 쯤 읽어 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삭개오는 자신의 체면을 전혀 무시하고, 예수님을 보기 원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보기 원하나? 그분을 얼마나 갈망하나? 둘의 갈망의 이유가 무엇이든 삭개오와는 너무나 차이나는 내 모습에 부끄러움이 일었다. 삭개오는 구원 받지 못했기에, 반면 나는 이미 구원 받았기에 여유가 있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식어 버린 내 마음에 삭개오를 보며 다시 한 번 불을 지핀다! 예수님 목마릅니다! 당신을 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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