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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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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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그리스도인 -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 잉글랜드 P&R 5
매튜 미드 지음, 장호익 옮김 / 지평서원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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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 자신이 마치 그리스도인이 된 것마냥 착각을 한다. 주일 예배에 꼬박 참석하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줄 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교회에 알곡과 가라지가 있을 것이고, 재림하시면 가라지는 다 뽑힐 것이라 말씀하셨다. 주께서 다시 오시면 겨는 다 날릴 것이다.
 성경 말씀을 뒤집어 보면 교회에는 참된 그리스도인과 거짓 혹은 유사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말로 풀이된다. 즉 진정한 성도가 있는가 하면 단지 종교적 의무만 이행하는 모양만 신자가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외형상 이 둘을 구분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참 성도라면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할 것이다. 열심히 예배 드리고, 교제하며 봉사할 것이다. 그러나 때론 낙망하여 그 열심이 줄어들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유사 신자라 하더라도 종교적 의무의 이행으로 꼬박 예배 드리고 교제하며 봉사를 한다. 자신은 참 성도가 아닌 줄도 모른 채 말이다. 그리고 이들도 신앙에 곡선이 그려진다. 따라서 교회에서 드러난 모습으로는 이 둘을 구분하기 어렵다.

 '유사 그리스도인'

 17세기 영국의 목사였던 매튜 미드는 이 책에서 참된 그리스도인과 유사 그리스도인을 구분할 수 있는 귀한 대척점을 제공한다. 말씀을 깊이 고찰하여 참된 그리스도인과 유사 그리스도인 사이의 차이점을 알려준다.
 이 책 제시되어 있는 기준은 참으로 엄격하다. 유사 그리스도인은 물론이고 참된 그리스도인 마저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동안 간직해 왔던 신앙생활의 모습들은 자신이 유사 그리스도인이었음을 지적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힘차게 뛰던 심장의 박동을 멈추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사람들을 낙망하게 하고, 시험에 들게 하려는 데 있지 않다. 이 책은 유사 그리스도인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종용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은 신앙과 그 생활에 진보를 이루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믿음의 검증 통한 자신의 확증을 돕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거의 그리스도인으로 보이는 유사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보여도 참된 그리스도인인이 궁금한 이라면 이 책을 통해 자신을 검증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혹 자신이 유사 그리스도인으로 판단된다면 어서 마음과 자세를 돌이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사 그리스도인을 얼마나 불쾌해 하시는 지와 유사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아 어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 열심히 예배 드리고,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며 봉사를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든 유사 그리스도인이든 그것은 쉬운 일이다. 어떠한 의미에서 그것은 그저 종교적 의무의 이행에 불과하다.
 유사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부인하겠지만, 자신은 의식하지 못한 채로) 그것들을 그저 자기 만족과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들에게 종교적 의무는 하나의 '일' 또는 유희에 불과하다. 유사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서는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만 혼자 있는 곳에서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일에 집중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기 위해서 한다. 이와 같은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갖고 그것들에 전력을 다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 한다. 그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기 위해 애쓴다. 회개, 말씀, 기도, 개인 생활 등 모든 면에 있어 하나님의 즐거움을 위한다. 하나님의 기쁨이 곧 자신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유사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자신을 점검하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라. 그렇지 않은 채 보이는 열심은 결국에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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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구원 -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과 청교도의 조직신학 : 구원론 성령론 한국신학총서 15
노병기 지음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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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의 교리 중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구원론은 특히 열심히 들여다 봐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교리들도 모두 인간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모든 교리 중 구원론이 인간과 가장 직접적이고, 큰 관련성을 띈다. 따라서 그것은 구원 받은 택자가 구원 받아가는 중에 자기점검을 위해 꼭 깊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무지의 상태에서 부으심을 입은 택자는 구원 받았고, 구원 받고 있으며 구원 받을 것이다. 이것을 시간적으로 살펴보면 구원 받았음은 과거에 속하고, 구원 받고 있는 것은 현재에, 그리고 구원 받을 것은 미래에 속한다. 여기서 구원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구원 받고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앞으로 구원 받을 것이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하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구원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원 받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은 현재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우리의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다른 두 부분은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구원 받아감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탕으로 우리가 노력하며 이루어 나가야 할 부분이기에 특히 중요하다. 

 '거룩한 구원'

 본서는 인간의 현재와 직결되어 있는 구원론을 다루고 있다.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영적 대각성 운동의 중심에 있던 설교자들과 그 외에 위대한 청교도들을 통해 구원론을 살펴 보고 있다. 종교 개혁가인 존 칼빈과 청교도인 리처드 백스터와 존 오웬, 그리고 명설교자인 조지 윗필드,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피니, 이렇게 7명을 통해 거룩한 구원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을 꼽는다면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내용에서, 그리고 둘째는 구조에서 말이다. 본서가 갖고 있는 내용상의 특징은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개혁파 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존 칼빈, 그의 신학을 계승 발전시킨 존 오웬, 그리고 같은 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조나단 에드워즈 및 옥외 설교자로 살다간 개혁주의자 휫필드, 이들의 신학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개혁주의적 구원론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외에 다른 이들, 리처드 백스터는 알미니안 요소를 가지고 있고, 존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이며 찰스 피니는 펠리기안의 요소를 갖고 있지만 통상 청교도 혹은 복음주의자로 칭하기 때문에 본서의 내용은 외견상으로는 개혁주의적 혹은 복음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실제로는 청교도 및 개혁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서의 구조적 특징으로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의 조화를 통해 구원론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먼저 제 1부에서는 구원론에 대해 성경적으로 고찰한다. 다시 말해서 조직신학적 전개를 바탕으로 성경의 내용과 위에서 언급한 7인의 견해를 통해 구원론을 살펴본다. 그리고 2부에서는 교회사적 고찰을 한다. 여기서는 먼저 7인의 역사적 인물의 생애를 각각 간략히 살펴보고, 그들의 거듭남의 체험과 중생론을 살펴본다. 교회사적 접근을 통해 구원론에 대해 단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살펴본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한국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거듭남에 대한 가르침을 살펴봄으로 역사적으로 우리가 이어받은 거듭에 대한 이해는 어떤지 살펴본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본서는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이라는 두 가지 구조를 통해 구원론을 면밀하고, 균형감 있게 살펴본다. 이론으로만 따져보거나 체험만으로 구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그 구원론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증거되고 이해 되었는지 알아본다. 본서에 담겨 있는 구원론은 언급된 인물로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리고 저자의 입장에 따라 보수적 구원론이라고 볼 수 있다. 입장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각자가 취하고 있는 신학적 견해에 따라 내용에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위에 두 가지 이유로 신학적 견해와 상관없이 구원론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책장에 꽂아 두고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특히 청교도 개혁주의 구원론에 관심이에게는 적극 추천해 주고 싶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과 구원 받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달려 있다. 그러나 구원 받아감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우리의 노력도 필요하다. 성화, 즉 거룩함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조금의 거짓도 없는 날마다의 진실된 회개와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론을 모른다면,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방법을 모른다면 그 무지로 인해 그리스도인에게 죄를 부추기는 사탄의 전술에 동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성경을 날마다 깊이 상고함으로 거룩의 방법을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룩을 위해 선배들은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그들에게 그 방법을 배우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성령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그렇게 우리는 날마다 노력하고, 구원 받아감을 이루어간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마침내 구원의 기쁜 영광을 입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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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 마이클 호튼 시리즈 7
마이클 호튼 지음, 윤석인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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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관은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는지를 압축한 것이다. 그러한 세계관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가는 방향이 결정된다. 따라서 어떠한 세계관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독특하다. 그것은 성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일반의 세계관과는 매우 다르다. 도덕적인 부분에서는 보다 청결하고 확고하다. 의지적인 측면에서는 (성령의 감동에 의한 그러나 스스로 그것을 통제한다는 의미에서) 자율적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신적 의지를 반영하고, 신적 명령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다. 일반의 관점에서 이는 다소 교만하거나 완고해 보일 수도 있다.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

 본서는 엄격한 개혁주의자인 마이클 호튼의 책이다. 그의 이력과 지식, 성경에 입각한 확고한 신앙을 바탕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잘 풀어준다. 그는 기독교인의 생각과 행동을 보다 옳다고 보여지는 방향으로 이끌어 준다.
 호튼은 문화와 학문, 예술과 과학, 직업 등 여러 부분에 있어 방향을 제시해 준다. 결코 얕지 않은, 꽤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제시한 주제들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쉽지 않은 책이기 때문에 세계관에 관한 다른 책을 먼저 읽고 생각하여 토대를 마련한 후에 이 책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유의해야 할 사항이 또 있다. 호튼이 제시한 방향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자신이 고백하듯 호튼이 제시한 방향들은 하나의 대안이다. 다만 더 좋은 대안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따라서 독자는 다른 책을 통해 세계관을 쌓고나서 본서를 읽거나, 그리할 여건이 안 된다면 본서를 여러 번 읽어서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를 쌓은 후 부분부분 다듬어 나가면 좋을 것이다.

 기독교는 세상과 구분된 그 자신만의 세계관이 있다. 물론 어느 종교가 그렇지 않겠냐만은 기독교는 특히 더 뚜렷하고, 확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세상의 생각과 길을 달리하기에 답답하거나 고집 있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방향이 분명하다. 선과 의, 진리를 향하고 있는 그 방향은 세상과 다를 뿐만 아니라 세상을 이끌 최상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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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 어떻게 되는가 비교신학 시리즈 3
존 샌더스.가브리엘 파크레.로날드 내쉬 지음, 박승민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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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태어난 사람, 예수님이 오신 후에 태어났지만 복음 전도자가 그에게 이르지 못한 사람. 이렇게 복음을 듣지도, 들을 수도 없던 시대와 지역에 살던 사람은 어떻게 될까? 과연 그런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성경에서는 이에 대해 답을 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사고와 관점에서는 이렇게 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하실 것이다."

라고 말이다.
 


 '복음을 듣지 못한사람 어떻게 되는가?'

 이 책은 미전도인의 운명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을 담고 있다. 포괄적 구원론, 신적 견인론, 제한적 구원론이라는 세 관점에서 미전도인의 운명을 예상한다.
 먼저 포괄적 구원론은

 "성부는 일반 계시와 양심, 인간 문화를 통해 성자와 성령으로 미전도인에게 다가가신다. 오직 예수님의 구원 사역만이 미전도인을 위한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속죄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에게조차 적용하신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계시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한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그들에게 적용하실 것이다."(51, 52p)

라고 본다.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미전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복음을 직접적으로 듣지 못해도 계시에 기초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참으로 기쁜 말이 아닐 수 없다. 미전도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 믿음이, 그 계시가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주장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고 한 말과 전면 배치된다. 그리고 계시가 아니라 독생자를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요 3:16)고 한 말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에 이른다는(롬 10:9, 10) 말씀과 어긋난다. 포괄적 구원론은 그 의도는 좋으나 말씀과 너무도 대조적이다.
 신적 견인론은 사후에도 믿음의 여지가 주어져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관점은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그 영원한 안전으로 구원에서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견인의 교리를 이렇게 해석한다.  

 "하나님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인류 전체에게 알리시기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다시 말해 복음을 모든 개개인에게 전파하시는 끝까지 인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110p)

 즉 하나님의 인내하심으로 불신자의 죽음 후에도 하나님은 선택한 불신자를 얻으려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옆에 있던 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는 말씀을 통해 유추해 볼 때 인간은 죽음 즉시 구원의 여부가 판가름 난다고 할 수 있다. 죽음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 이후에도 구원의 여지가 있다면 급기야 어떠한 악한이라도 구원 받을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제한적 구원론은 익히 알고 있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전통적 주장이므로 생략한다. 다만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본 관점의 논찬자는 다른 두 관점의 논찬자들을 반박하기 위해 자신의 지면을 다 써버린 점이 무척 아쉽게 느껴진다. 그 마음은 이해하나 올바른 논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점을 대변하는 것이 더 적절한 응수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반박은 (지면으로 인해 한계가 있지만) 논평을 통해서만 함이 더 올바른 처사였을 것이다.
 다양한 의견을 살펴봄으로 처음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 한다면 실패할 것이다. 머리만 아프고, 답은 더욱 오리무중이 될 것이다. 인본위적으로 본다면 포괄적 구원론이 더 맞는 듯하다. 반대로 철저히 성경적으로 본다면 제한적 구원론이 맞는 듯하다. 사랑과 인내를 강조하면 신적 견인론이 더 그럴 듯하다. 어느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본서는 학문적 논의를 위해서라면 참고하기에 좋은 책이지만, 신앙을 위해서라면 결코 도움이 안 되는 책이다.
 이제 본인의 의견을 제시함으로 처음의 질문에 답을 하고, 본 평을 마무리 하려 한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서두에서 말했듯이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게 가장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리는 그 답을 하나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간접적으로 이에 대해 답을 한다.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답을 찾을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귀기울이고, 말씀을 따라야 한다. 성경에서 뭐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못 박아 말한다. 이것 하나로 충분한 답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을 듣긴 하였으나 그 자신의 고집으로 믿음을 거부한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전도인이 이르지 못하여 복음을 듣지 못하고 따라서 믿지 못할 수밖에 없던 사람들은 어쩌면 좋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에 대한 답도 할 수가 있다.
 간단히 말하면 그런 사람들은 택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택자에게는 분명히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복음을 들어야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도인이 이르지 못하여 불신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택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 가혹하게 들리는가? 그렇다 하여도 어쩔 수 없다. 택자가 아니라면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설령 복음을 수백, 수천 번 들어도, 아무리 믿음을 권유 받아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 자신의 죄와 악으로 인함이지 하나님의 차별로 인함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전도인이 이르지 않아 구원을 얻지 못한 불신자도 그 자신의 죄와 악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이는 참으로 이해가 안 되고, 무척 기가막히는 말이다. 인간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 악해 보인다. 그러나 본인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가 쥐락펴락 할 수 없고, 그릇의 운명은 토기장이에게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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