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꽃게잡이 배에서 돼지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라는 부제가 달렸던 책이 표지와 제목을 바꿔 ‘퀴닝‘으로 재출간되었다. 2013년작인데 십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한승태 작가가 경험한 그 노동환경이 얼마나 변화되었을까 생각해보게 됐다. 최저임금은 두 배 가까이 올랐으나 십년간 상승한 집값과 물가 등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작업환경이 그다지 좋아졌을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의 마인드와 문화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안의 미묘한 감정-위기의 상황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자세 등- 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정말 다양하게도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할 수 있었다. 신간 ‘어떤 동사의 멸종‘이 매우 궁금하다. 양돈장, 비닐하우스, 부품조립공장, 꽃게잡이 등에서 일하던 그가 지난 십여년간 콜센터 상담, 택배 상하차, 뷔페 식당 주방, 빌딩 청소 등에서 일을 했다고 하니 우리네의 노동환경이 얼마나 바뀌었고 노동착취가 얼마나 더 교묘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기대기대. +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한 ‘고기로 태어나서‘도 읽으려고 했으나 그 끔찍한 실태를 접할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직장인이라면 가장 친근한 곳인 ‘탕비실‘이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탕비실 빌런의 유형을 대면서 어느 빌런이 제일 싫으냐고 묻는 이 책의 광고 문구를 보자마자 너무 구미가 당겨 바로 구매해(택배기사님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다가) 배송 즉시 한 시간 내에 읽어버린 책. 속전속결이로세. 전자책 동시출간이었으면 정말 한 시간 걸릴 일이었는데 종이책을 기다리느라 하루를 소비했다는 것이 아쉬울 뿐. 티비를 보지 않아 관찰예능이나 리얼리티 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순전히 ‘탕비실‘ 하나에 꽂혀 읽게 된 셈. 전개는 내 예상과 달랐지만 결말은 이 생각 저 생각하게 만들었다. 특히나 인간이란 얼마나 다차원적인지, 인간 관계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됐다. 꽤 오랫동안 유행했다는 소위 리얼리티 쇼를 보지 않는데 보는 사람들-그러니까 이 책의 포맷이나 스텐스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하다.책 겉표지도 감각적인데 표지 안쪽도 ‘합숙 리얼리티 쇼‘를 알리는 포스터라 새로웠다. 책 자체는 시집 정도의 사이즈와 두께로 눈에 띄는 표지와 그림이 있는,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을 표방하는, 여러 모로 통통 튀는 감각적인 소설.
아무튼 시리즈와 천선란 작가의 조합이 매우 바람직하게 느껴져 예약 구매를 해서 보았으나 ‘다지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기에 진입 장벽이 있었다. 중후반부에 나오는 작가의 디지몬 ‘엄마‘이야기가 나오자 비로소 읽기에 몰입이 됐달까. 이 이야기는 ‘디지몬과 헤어지는 이야기‘이자 떠나간 줄도 모르고 작별 인사도 없이 헤어지게 된 우리의 유년 시절과의 작별 이야기일 수도 있다. 작가에게는 밝히고 싶지 않았던 인생 고백과 이를 통한 한 단계 성숙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유년 시절과 이렇게 작별을 하고 우리는 소위 어른이 되는 것인가.
적어도 내게 산다는 건 그저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 너무 의미가 많아 모든 것강 이 무의미해진 모순적인 세상에서, 너무 많은 존재속에서 의미를 잃은 내가 꿋꿋하게 존재하는 것. 방법은 간단하다.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위험 요소로부터 도망치면 된다. - P85
내 유년과는 작별 인사없이 헤어지잖아. 떠나간 줄도 모르게. - P124
싸이 파이를 좋아하지 않아 테드 창 정도밖에 몰랐었는데 편성준의 ‘읽는 기쁨‘에서 알게 되어 찾아 읽어보았다. ‘종이 동물원‘이 제목이자 맨 앞에 실려있는 작품인데 읽으면서 울었다. 어쩜 그리 이민자 엄마를 둔 아이의 성장과정을 뚜렷하게 그려냈는지. 어렸을 때는 엄마가 전부인 줄 알다가 커가면서 영어를 잘 못하는 엄마를 무시하고 엄마와 멀어지게 된다. 본인도 살려고 그러는 것이긴 한데. 그러다가 아이는 돌아오지만 엄마는 기다려주지 못 하고..스테레오 타입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일련의 그 상황이 엄마가 숨을 불어넣은 종이 호랑이들을 통해 그려지는데 그 부분이 압권. 어릴 때 종이호랑이를 향한 아이의 마음이 환상적으로 그려진다. 이 작품은 사이파이가 아니고 그냥 환상 문학인 듯. 왜 내로라하는 상 세 개를 동시에 석권했는지 알 것 같다. 싸이 파이에서 이런 감동을 느끼다니 놀라울 뿐. 읽어보니 켄 리우는 테드 창과는 정말 다르다. 그의 소설에는 역사와 문화와 감성이 있다. 다루는 주제도 참 폭 넓다. 중국에 뿌리를 둔 미국 작가가 731부대를 다룰 줄이야. 2011년 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금의 우리 현실이 그대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천생연분‘에는 알고리즘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도 결정해주는 경우. ‘레귤러‘는 레귤레이터, 삽입 카메라 등을 삽입한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액션 스릴러 영화같았고. 일본, 타이완, 중국, 홍콩, 미국을 넘나들며 개화기에서 2차 대전 이전에서 근미래까지 다 나온다. 순간포착영상이나 인터페이스 칩, 시간 여행 같은 것들을 소재로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소설을 쓰다니 실로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프로그래머와 변호사로 활동했고 법률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밤에 쓴 소설이 이런 수준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57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에 푹 빠져 이틀 동안 읽었다. 행복한 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