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말로만 아니 글로만 무성히 듣던 그 이슬아를 만났다. 물론 책으로.  우리의일상 모든 것이 글감이  될 수 있고 책이, 글이 부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서비스가 아닌 먼저 찾아가는 서비스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이슈가 되었던 바로 그 작가. 


처음에는 그냥 아이들 글쓰기 가르치는 이야기인가 보다 했다. 초중반부에 아이들 이야기가 많아서 처음에는 새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지만 좀 늘어진다 싶을 때 이슬아의 글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주변을 세밀하게 관찰해서 글로 옮기는 능력을 갈고 닦은 느낌이었다. 


다년간 경험한 초등학생 글쓰기 교사로서의 관록도 묻어났다. 학생들 다루는 솜씨가 좋고 그러면서도 귀여워서 소위 선생님같지 않은 선생님이었다. 최대한 아이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려는 자세가 돋보였다. 글감도 좋고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주는 것도 좋았다. 공교육 제도교육에도 이런 선생님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이슬아 선생님에게 글쓰기를 배운 학생들은 참으로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이슬아선생님에게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은선생님과 어딘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존재여야 하는데 요즘은 그게 참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특히나 '코로나 시대의 글방 꼭지'가 의미심장했다. 줌으로 하는 글쓰기 수업. 올 한 해도 아무래도 계속 이 상황이 지속될 테니 더 시사점이 크다고 하겠다. '나의 유년과 어딘 글방' 꼭지도 좋고. 


에세이는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내면서 교묘히 뺄 것은 빼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었다. 소위 드러내고 싶은 부분만을 드러낸다는 이야기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어느 부분에선가 작가가 솔직한지 솔직하지 않은지 느끼게 된다. 그렇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튼 이슬아는 모든 것을 드러낸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솔직했고 그의 성장을 계속 해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물론 그가 거쳐온 길도. 부지런히 그의 전작들을 찾아봐야 겠다. 간만에 포근하면서도 톡톡 튀는 글들을 읽은 것 같다. 요즘 참 재주많은 사람들이 많다. 



어쨌든 우울은 평생 자주 보는 친구 같은 것이다. 10대 후반의 아이들이 감당중인 우울은 20대 후반인 나에게도 종종 찾아온다. 아마 30대 후반이나 50대 후반에도 비슷할 거라고 우리는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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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21-01-08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JYOH님 서재에 와서 프로필 사진 클릭해보고 빵터졌어요. 평소에는 북플로 접속하니까 잘 모르지만, 가끔 이렇게 PC로 접속할 때마다 한번씩 웃게 되네요. 하하하하. 재밌는 사진 공유해주셔서 고맙습니다.

JYOH 2021-01-08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요. 재미있으셨다니 기쁩니다. ^^
 
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으며 외국어로 말하는 일이 이전까지가지고 있던 모국어 중심의 인식 틀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준다는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어떤 의미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은 모국어로 지어진 집 한쪽에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내는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낸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을 때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얼마나 흥미진진한 모험으로 가득할까?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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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작가는 이번 여름 우연히 교보문고에 갔다가 베스트셀러 소설 코너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봐서 너덜너덜해진 책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책이 바로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 였다. 진열된 책이 너덜너덜해졌다니 요즘에는 실로 보기 드문 일이다 싶어서 인상적이었다. 요즘엔 서점엘 가도 전혀 속을 들여다볼 수 없게 투명 비닐로 꽁꽁 싸매어 놓는 책도 많기 때문이다. (만화책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일반 인문 서적도 신간이면 그렇게 꽁꽁 싸매어 놓는다. 매우 아쉬운 대목.) 얼마나 재미있길래 책이 저렇게 됐을까. 그런데 다들 왜 사서 보지는 않고 다 여기서 봤을까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도 틈 날 때마다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를 도서관에서 빌려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늘 대출중이었다. 역시나 인기가 있나보군 싶었다.  그리고 내 손에 들어온 책은 백수린 작가의 다른 짧은 소설집이었는데 내가 짧은 소설을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한 두 작품을 읽고 그냥 읽기를 그만두어버리고 말았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의 신간 소식을 접했다. 내가 좋아하는 제빵과 책의 만남이라 신기했다. 거기에 백수린 작가의 조합이라니. 바로 구매해서 보고 싶었지만 절약모드라 꾹 참고 샘플을 보니 예전에 읽었던 다른 책이랑 비슷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바로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소설과 음식, 번역 이야기로 모아지는 이 책에도 서양음식들이 많이 나온다. 소설 번역을 하면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와 관련된 서양 음식을 이야기한다. 이 책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어찌보면 비슷한 조합일 수 있겠다 싶었다. 요즘은 이런 분위기가 유행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이 조금 딱딱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백수린의 '다정한 매일매일'은 '생강빵과 진저브레드'의 소위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 만큼 더 유연했다. 


백 작가 말로는 책을 소개하기 위한 글을 연재했던 것을 산문집으로 모은 것이라는데 책 소개라고 하면 딱딱하고 그 책을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다양한 빵과 케이크와 얽힌 이야기들, 그리고 책이야기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서양빵이 많으니 서양의 이곳저곳으로 독자를 데려다주기도 하고 서양빵과 관련된 여러 상식에서부터 자신의 추억 등등을 어우러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나도 제빵을 좋아하는데 작가와 제빵에 대한 생각이 비슷하다. 제빵을 해서 선물하는 것은 자제. 왠지 맛있다는 반응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정확한 양을 계량하는 것과 순서를 잘 지키는 것이 생명인 서양빵 굽기에서 그것을 그리 정확하게 지키지는 않는다는 것. 그래서 맛이 완벽하지는 않고 게다가 빵을 굽다보면 나만의 레시피라는 것이 생겨서 본인의 기호에 따라 뺄 것은 빼고 줄일 것은 줄이고 버터는 식물성 오일로 바꾸는 식으로 굽게 되기도 한다는 것. 그래서 더더욱 선물용으로는 적합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제빵을 포기하지 못하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내 경우는 바로 막 구었을 때의 그 맛 때문이다. 또 구워지는 동안의 그 향긋한 기다림의 순간 때문이다. 집에 퍼져가는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와 마술처럼 부풀어져 나온, 오븐에서 갓 꺼낸 빵은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그 감동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정도이다. 반죽하기는 꽤 노동집약적인 일이라서 체력소모가 크지만 우리 식구가 먹을 만큼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굽는다면 이보다 더 마법같은 일이 또 없을 것 같다. 다 처분하고온 내 제빵 기구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맛있는 빵이 널려있는 서울에서라면 제빵은 이제 접어도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왔지만 역시나 빵을 직접 구워서 먹어본 사람에게는 그 맛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있는 요즘이라 이 책이 더 향긋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제빵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주 조금 나오는 편. 


슈톨렌, 바움쿠헨 등 이 책에는 요즘 시즌에 맞는 빵들도 많이 나오는데 나도 성탄 전야에 귀국 후 처음으로 사과호두파이를 구웠었다. 원래는 애플피칸파이인데 피칸은 구하기 쉽지 않아 그냥 집에 있는 호두로 대체했다. 이런 것이 제빵의 묘미이기도 하니까. 덕분에 집에 있던 설탕은 바닥이 났고 지금도 바닥인 채로 있지만 오랜만에 제빵을 하니 평화로워졌다. 모든 것이. 식구들도 모두 추억에 젖고. 


이렇게 빵을, 파이를 굽는다는 것, 소중한 것들을 추억하는 것, 따끈하고 향긋한 갓 구운 빵의 풍미를 느낀다는 것, 빵에 어울리는 와인이나 차를 준비하는 것. 이 모든 소소한 것들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주는 요즘이다. 그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참으로 고운 책이다. 곱다.  


+ 옥의 티라면..내가 좋아하는 '애프터눈 티'가 '애프터티'로 되어 있었다는 것. 이렇게도 쓰이나 싶어서 찾아보았지만 아닌 것 같다. '애프터눈 티'나 '하이 티'로 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홍차가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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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히 지역도서관에서 레이먼드 카버의 'Cathedral' 을 발견하고 맨 앞에 실린 단편 한 편만 읽어보았더랬다. '어라. 생각보다 좋네.'가 내 간단 소감이었다. 카버는 내게는 공감이 잘 안 가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술술 읽히는 데에는 장편이 더 나았고 단편을 시도해보았지만 존 치버나 레이먼드 카버 모두 몰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한테는. 


카버는 일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도 하고 하루키가 사랑한 작가로 알려져 있고 우리도 그 영향 아래서인지 카버 팬들이 많았다. 그러한 영향때문인지 나도  2004년에 문학동네에서 레이먼드 카버 소설 전집이 나왔을 때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읽어보았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런 소설이 왜 좋은 소설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었고 조금의 감흥도 없었다. 왜 이런 작품에 열광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강산이 변할 만큼 세월이 흐른후  '대성당'으로 다시 만난 카버는 그 느낌이 달랐다. '대성당'은 내가 읽어볼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원서라서 더 느낌이 달랐을 수도 있다. 폴 오스터처럼 번역을 하면 그 맛이 확 떨어져버리는 작가일 수도 있겠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던 차에 내가 좋아하는 시리즈 중 하나인 아르테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 '레이먼드 카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성당'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기대없이 사전지식이나 쌓을 요량으로 읽었던 책이었는데 읽고 보니 곡절많은 그의 생애를 쫓다보니 마지막에는 눈물까지 흘릴 정도였다. 레이먼드 카버의 인생 자체가 웬만한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했고 온갖 수난과 역경의 집합체였다. 어느 누구의 일생도 다사다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다간 작가가 얼마나 될까 싶었다. 


50세라는 이른 나이에 죽었고 정말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고 심각한 알콜의존증이 있었으며 말년의 몇 년을 빼놓고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카버. 처음에는 '레드넥' - 다분히 비속어라 함부로 쓸 수 없는 말이지만(이 책의 본문에 나와있는 대로. 하지만 백인은 유일하게 white trash 라고도 불리는 특이한 부류이기도 하다.) 출신의 작품이 왜 이렇게 인기였던 걸까. 이렇게 마초적인 사람의 글을 읽고 우리가 감동해야 하는가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읽어내려가다 보니 그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경험했던 것들을 특유의 간결하고 관찰자적인 시각의 문체로 서술해 나갔던 것이 시대의 흐름에 맞물려 주목을 받고 각광을 받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어린 나이에 결혼해 유망한 여성을 가정에 들어앉히고 뭔가 아내가 더 잘 나가려는 느낌이 드는 순간순간 일과 가정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카버를 볼 때마다 책을 읽어내기가 힘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마초들의 작품을 멋지다고 생각하면서 읽고 있는 셈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결혼을 여러 번 하면서 그 결혼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던 헤밍웨이의 그녀들이나 피츠제럴드의 젤다는 소위 있는 집 여성들이라 이렇게 극도의 가난을 감당해야 하거나 절대적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어서  씁쓸했지만 그렇게까지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카버는 카버의 아내는 달랐다. 그녀가 어린 나이에 유망했던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며 전적으로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생활을 했다. 이것이 다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그의 시절이 우리의 현 시절과 더 가깝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또 카버의 그 하층민 생활이 도도한 소설이라는 분야에 파고들어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감내해야했을 고생을 생각하니 모든 아내들이 떠올라 숨이 막힐 정도였다. 고생은 같이 했지만 열매는 남편이 갖고 결국에는 늘 그렇듯이 그들은 이혼을 한다. 카버는 당연히 새 아내를 얻고. 왠지 이 대목에서 카버보다는 카버의 첫번째 아내 메리앤과 그 두 자녀에게 더 관심이 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발상 자체가 논지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나머지 책을 읽어 나갔다. 다행히도.) 


무엇이 극도의 가난에서도, 극심한 알콜의존증의 고통 속에서도 그를 문학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주었을까. 오리곤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며 어렵게 영문학부를 졸업하고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창작에 더 도움이 될 만한 직업을 고르려고 했던 그. 하지만 '낯선 것을 싫어하고 특히 이국적인 것이라면 무조건 배격하고 보는 미국 백인 노동자의 계급의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는 카버를 내가 실제로 봤다면 아마 도망쳤을 수도 있다. 그들의 눈초리는 저자도 당해봤다지만 꽤나 섬뜩하고 무섭기 때문이다. 또 초기 작품에서 흑인을 그냥 니그로로 명명하기도 할 정도로 백인 노동자 계급적 시각을 갖고 있었던 카버. 이렇게 우리와는 이해의 극단에 놓여있는 그를, 그의 작품을 정말 작품 그것만 놓고 봤을 때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작품 자체보다는 미국문학사를 좀 알아야 적어도 카버의 작품에 감동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30년대의 재즈시대를 알아야 '위대한 개츠비'가 좋고 헤밍웨이가 좋아지지만 그래도 그들의 작품은 나름 그런 사회역사적 배경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 같은데 카버의 작품도 과연 그럴까 생각해 보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보통 사람의 삶이 아니 보통 그 이하의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하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간결하게 문학 속으로 파고들었던 것. 단지 그것만으로 외국인들이 그의 작품에 감동할 수 있을까는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인 것 같다. '1960년대의 환상을 넘어 환멸을 경험한 시대적 분위기 자체도 그에 못지 않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카버의 어둡고 강박적이며 기이하게 현실주의적인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독자군이 서서히 형성되어간 것이다'라는 이 글의 언급처럼 미국인들도 뭔가 준비가 필요했던 것 같다. 카버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의 글은 정말 어둡고 강박적이고 기이하게 현실주의적이었기에. 이 판단은 내가 '대성당'을 다 읽어보고 다시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 


마지막 5년 정도 더이상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던 시기를 그는  '그레이비' 시절이라고 했다고 한다. 맛없는 고기의 맛을 북돋아주는 기름진 맛 하지만 일시적인 그 맛. 그도 그 풍요로운 시절이 길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나보다. 평생을 궁핍에서 보내면서도 문학에의 집념을 놓지 않고 매진해 마지막에는 최고의 반열까지 올랐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인가. 왜 사람은 살 만 해지면 죽을 때가 오는 것인지. 


카버는 묘비에 새겨진 대로 이 세계로 부터 '사랑'받다가 떠나간 것일까. 정말 그런 것일까. 그는 작품으로 미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므로 그의 고난은 충분히 보상받은 것일까. 과연 그런 것일까. 사랑받은 것일까. 


'...

기억해줘 나 그리고 우리가 함께한 모든 일들.

이제, 날 꼭 안아줘. 그래 그렇게. 키스해줘.

진하게 입술에. 그렇지. 이제

날 보내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여, 가게 해줘.

우린 이번 생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 거야.

그러니 이제 작별의 키스를 해줘. 자, 다시 해줘.

한 번 더. 그래. 이제 됐어.

이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여, 가게 해줘.

떠날 시간이야. 


                                                               -'필요 없는',"폭포로 가는 새로운 길"


내가 읽어본 시 중 제일 슬픈 시였다. 그가 세상을 뜨기 얼마 전 남긴 바로 이 시가.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십수년이 지났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레이먼드 카버의 삶을 반추해보면서 동시에 그의 족적을 따라 미국 여행도 하면서 미국의 문학사도 살펴 보게 되는 정말 유익한 책이었던 것 같다. 한 편의 문학 작품 같은 감동도 있다. 내가 이 시리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2021년을 감동적인 책으로 시작하게 된 것 같아 감사. 


+ '미국인들은 대도시는 진정한 미국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체 진정한 미국은 어떤 곳인가? 대도시 몇 개를 제외한 미국적 삶의 가장 두드러지고 공통된 특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심심함'과 '단조로움'일 것이다. 해가 뜨면 일과를 시작하고, 해가 지면 '일제히' 귀가함으로써 집 밖에서의 활동은 막을 내리는 규칙성, 주중에는 일을 하고, 금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외출하거나 파티에 참석하고, 토요일에는 야외 활동을 하고, 일요일에는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규칙성,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이 엄격히 구분되는 획일성, 이 규칙성과 심심함, 단조로운 생활 패턴은 사람들을 스포츠와 독서, 음악과 같은 취미 생활로 이끌기도 하지만, 술이나 마약 같은 자기 파괴적인 것들로 유도하기도 한다.'

이 대목이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잘 이해한 대목. 


++ 북이십일 출판사는 아르테에서 출판사라면 그것도 문학 출판사라면 누구나 펴내고 싶은 책을 이 아르테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로 현실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멋진 시리즈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부분 부분 안타까울 때가 있다. '피츠제럴드' 편의 지도가 그랬다면 이번에는 명칭. 문예창작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미국의 대학은 아이오와 주에 있고 그 대학은 '아이오와 대학'이다. 카버가 공부를 시도했던 곳이자 강의를 했던 곳이기도 한데 책에서는 아이오와 주립대라고 두 번 언급하고 아이오와 대학이라고도 몇 번 언급한다. 하지만 이 두 대학은 엄연히 다른 대학이다. 문예창작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대학은 아이오와 대학교로 University of Iowa 로 Iowa city에 있고 아이오와 주립대학교는 ISU로 일컬어지는 Iowa State University라고 하며 Ames 라는 도시에 있다. 아이오와 주 전체에서 Ames는 정중앙에 있고 Iowa city는 오른쪽에 치우쳐져 있어 시카고 쪽에 훨씬 가깝다. 물론 자세히 보면 두 대학 모두 주 정부의 지원을 받는 주립대학이지만 하나는 엄연히 아이오와 대학교로 불리고 다른 하나는 엄연히 아이오와 주립대학교라고 불린다. ISU는 아무래도 공학계열 중심의 학교라 카버나 존 치버가 배움이나 강의를 하러 올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부분들이 아쉬운 부분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전혀 영문 표기가 없이 모두 번역문으로만 제시되어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영어가 많이 사용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던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한 번쯤은 영어로도 언급이 되었어야 하는 부분들이 있지 않은가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말로야 아이오와 대학이나 아이오와 주립대학이나 그게 그것 같지만 영어로는 University of Iowa와 Iowa State University로 완전 다르니까 말이다. 


+++ 표지 그림도 무척 마음에 든다. 처음에는 카버의 얼굴이 숨어있는 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 그림을 그린 화가와 카버의 우정도 아름답고 눈물겨웠다. 모든 예술인들은 통하는 것이 있는 것인지. 그림 자체도 멋지고 그 이면에 우정까지 있다니 정말 잘 고른 표지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표지만 봐도 눈물이 글썽여질 정도. 


++++ 옥의 티 하나 더. 카버의 전처 메리앤이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장학금을 받아 잠깐 이주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갑자기 카버의 테헤란 거주 시절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텔아비브와 테헤란이라니..어떻게 이런 일이. 텔아비브는 이스라엘의 도시이고 테헤란은 이란의 도시인데 이것이 왜 갑자기 뒤바뀐 것인지 새삼스러워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옥의 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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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0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JYOH 2021-02-10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정 기준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 왜 선정이 됐는지 강한 의문이 듭니다. 부끄럽네요.
 

스릴러를 읽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거슬러 올라가면 셜록 홈즈까지 거슬러 올라가긴 한다. 


워밍업 느낌으로 이다혜의 '아무튼, 스릴러'를 읽었다. 내가 읽은 스릴러 작품들은 셜록 홈즈, 애거사 크리스티와 최근 스릴러 몇 권 정도였다. 그것도 원서 읽는 재미를 들여 읽게 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진지하게 파고든 것은 아니고 몇몇 작가의 책만 공항에서 읽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다혜는 스릴러를 읽다 보면 아무리 거듭되는 반전이라도 물리게 마련이고 예상 가능하게 마련이므로 범죄 다큐 등 진짜 이야기로 옮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그것이 픽션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너무 무서울 것 같고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기 쉽지 않을 것 같아 접근하기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간단히 스릴러의 역사를 훑은 이유는 이다혜의 '코넌 도일'을 읽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다혜처럼 어릴 때부터 셜록홈즈 시리즈에 빠지진 않았고 다만 황금가지에서 나온 셜록 홈즈를 심심풀이로 즐겨 읽었던 기억은 있다. 드라마 셜록이 한창 인기였을 때도 셜록에 빠지진 않았었지만 반복되는 스릴러의 패턴도 차차 지루해질 무렵 다시 셜록이나 애거사 크리스티로 돌아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고 그런 차에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연말연시지만 여느 연말연시와는 다른 집콕을 해야하는 이 때 역시 연휴에는 스릴러고 코넌 도일의 발자취를 더듬는 형식의 이 책은 우리에게 여행의 기쁨도 선사해 준다. 맞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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