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히 지역도서관에서 레이먼드 카버의 'Cathedral' 을 발견하고 맨 앞에 실린 단편 한 편만 읽어보았더랬다. '어라. 생각보다 좋네.'가 내 간단 소감이었다. 카버는 내게는 공감이 잘 안 가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술술 읽히는 데에는 장편이 더 나았고 단편을 시도해보았지만 존 치버나 레이먼드 카버 모두 몰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한테는. 


카버는 일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도 하고 하루키가 사랑한 작가로 알려져 있고 우리도 그 영향 아래서인지 카버 팬들이 많았다. 그러한 영향때문인지 나도  2004년에 문학동네에서 레이먼드 카버 소설 전집이 나왔을 때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읽어보았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런 소설이 왜 좋은 소설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었고 조금의 감흥도 없었다. 왜 이런 작품에 열광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강산이 변할 만큼 세월이 흐른후  '대성당'으로 다시 만난 카버는 그 느낌이 달랐다. '대성당'은 내가 읽어볼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원서라서 더 느낌이 달랐을 수도 있다. 폴 오스터처럼 번역을 하면 그 맛이 확 떨어져버리는 작가일 수도 있겠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던 차에 내가 좋아하는 시리즈 중 하나인 아르테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 '레이먼드 카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성당'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기대없이 사전지식이나 쌓을 요량으로 읽었던 책이었는데 읽고 보니 곡절많은 그의 생애를 쫓다보니 마지막에는 눈물까지 흘릴 정도였다. 레이먼드 카버의 인생 자체가 웬만한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했고 온갖 수난과 역경의 집합체였다. 어느 누구의 일생도 다사다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다간 작가가 얼마나 될까 싶었다. 


50세라는 이른 나이에 죽었고 정말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고 심각한 알콜의존증이 있었으며 말년의 몇 년을 빼놓고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카버. 처음에는 '레드넥' - 다분히 비속어라 함부로 쓸 수 없는 말이지만(이 책의 본문에 나와있는 대로. 하지만 백인은 유일하게 white trash 라고도 불리는 특이한 부류이기도 하다.) 출신의 작품이 왜 이렇게 인기였던 걸까. 이렇게 마초적인 사람의 글을 읽고 우리가 감동해야 하는가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읽어내려가다 보니 그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경험했던 것들을 특유의 간결하고 관찰자적인 시각의 문체로 서술해 나갔던 것이 시대의 흐름에 맞물려 주목을 받고 각광을 받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어린 나이에 결혼해 유망한 여성을 가정에 들어앉히고 뭔가 아내가 더 잘 나가려는 느낌이 드는 순간순간 일과 가정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카버를 볼 때마다 책을 읽어내기가 힘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마초들의 작품을 멋지다고 생각하면서 읽고 있는 셈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결혼을 여러 번 하면서 그 결혼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던 헤밍웨이의 그녀들이나 피츠제럴드의 젤다는 소위 있는 집 여성들이라 이렇게 극도의 가난을 감당해야 하거나 절대적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어서  씁쓸했지만 그렇게까지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카버는 카버의 아내는 달랐다. 그녀가 어린 나이에 유망했던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며 전적으로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생활을 했다. 이것이 다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그의 시절이 우리의 현 시절과 더 가깝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또 카버의 그 하층민 생활이 도도한 소설이라는 분야에 파고들어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감내해야했을 고생을 생각하니 모든 아내들이 떠올라 숨이 막힐 정도였다. 고생은 같이 했지만 열매는 남편이 갖고 결국에는 늘 그렇듯이 그들은 이혼을 한다. 카버는 당연히 새 아내를 얻고. 왠지 이 대목에서 카버보다는 카버의 첫번째 아내 메리앤과 그 두 자녀에게 더 관심이 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발상 자체가 논지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나머지 책을 읽어 나갔다. 다행히도.) 


무엇이 극도의 가난에서도, 극심한 알콜의존증의 고통 속에서도 그를 문학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주었을까. 오리곤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며 어렵게 영문학부를 졸업하고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창작에 더 도움이 될 만한 직업을 고르려고 했던 그. 하지만 '낯선 것을 싫어하고 특히 이국적인 것이라면 무조건 배격하고 보는 미국 백인 노동자의 계급의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는 카버를 내가 실제로 봤다면 아마 도망쳤을 수도 있다. 그들의 눈초리는 저자도 당해봤다지만 꽤나 섬뜩하고 무섭기 때문이다. 또 초기 작품에서 흑인을 그냥 니그로로 명명하기도 할 정도로 백인 노동자 계급적 시각을 갖고 있었던 카버. 이렇게 우리와는 이해의 극단에 놓여있는 그를, 그의 작품을 정말 작품 그것만 놓고 봤을 때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작품 자체보다는 미국문학사를 좀 알아야 적어도 카버의 작품에 감동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30년대의 재즈시대를 알아야 '위대한 개츠비'가 좋고 헤밍웨이가 좋아지지만 그래도 그들의 작품은 나름 그런 사회역사적 배경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 같은데 카버의 작품도 과연 그럴까 생각해 보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보통 사람의 삶이 아니 보통 그 이하의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하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간결하게 문학 속으로 파고들었던 것. 단지 그것만으로 외국인들이 그의 작품에 감동할 수 있을까는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인 것 같다. '1960년대의 환상을 넘어 환멸을 경험한 시대적 분위기 자체도 그에 못지 않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카버의 어둡고 강박적이며 기이하게 현실주의적인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독자군이 서서히 형성되어간 것이다'라는 이 글의 언급처럼 미국인들도 뭔가 준비가 필요했던 것 같다. 카버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의 글은 정말 어둡고 강박적이고 기이하게 현실주의적이었기에. 이 판단은 내가 '대성당'을 다 읽어보고 다시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 


마지막 5년 정도 더이상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던 시기를 그는  '그레이비' 시절이라고 했다고 한다. 맛없는 고기의 맛을 북돋아주는 기름진 맛 하지만 일시적인 그 맛. 그도 그 풍요로운 시절이 길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나보다. 평생을 궁핍에서 보내면서도 문학에의 집념을 놓지 않고 매진해 마지막에는 최고의 반열까지 올랐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인가. 왜 사람은 살 만 해지면 죽을 때가 오는 것인지. 


카버는 묘비에 새겨진 대로 이 세계로 부터 '사랑'받다가 떠나간 것일까. 정말 그런 것일까. 그는 작품으로 미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므로 그의 고난은 충분히 보상받은 것일까. 과연 그런 것일까. 사랑받은 것일까. 


'...

기억해줘 나 그리고 우리가 함께한 모든 일들.

이제, 날 꼭 안아줘. 그래 그렇게. 키스해줘.

진하게 입술에. 그렇지. 이제

날 보내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여, 가게 해줘.

우린 이번 생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 거야.

그러니 이제 작별의 키스를 해줘. 자, 다시 해줘.

한 번 더. 그래. 이제 됐어.

이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여, 가게 해줘.

떠날 시간이야. 


                                                               -'필요 없는',"폭포로 가는 새로운 길"


내가 읽어본 시 중 제일 슬픈 시였다. 그가 세상을 뜨기 얼마 전 남긴 바로 이 시가.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십수년이 지났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레이먼드 카버의 삶을 반추해보면서 동시에 그의 족적을 따라 미국 여행도 하면서 미국의 문학사도 살펴 보게 되는 정말 유익한 책이었던 것 같다. 한 편의 문학 작품 같은 감동도 있다. 내가 이 시리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2021년을 감동적인 책으로 시작하게 된 것 같아 감사. 


+ '미국인들은 대도시는 진정한 미국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체 진정한 미국은 어떤 곳인가? 대도시 몇 개를 제외한 미국적 삶의 가장 두드러지고 공통된 특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심심함'과 '단조로움'일 것이다. 해가 뜨면 일과를 시작하고, 해가 지면 '일제히' 귀가함으로써 집 밖에서의 활동은 막을 내리는 규칙성, 주중에는 일을 하고, 금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외출하거나 파티에 참석하고, 토요일에는 야외 활동을 하고, 일요일에는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규칙성,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이 엄격히 구분되는 획일성, 이 규칙성과 심심함, 단조로운 생활 패턴은 사람들을 스포츠와 독서, 음악과 같은 취미 생활로 이끌기도 하지만, 술이나 마약 같은 자기 파괴적인 것들로 유도하기도 한다.'

이 대목이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잘 이해한 대목. 


++ 북이십일 출판사는 아르테에서 출판사라면 그것도 문학 출판사라면 누구나 펴내고 싶은 책을 이 아르테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로 현실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멋진 시리즈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부분 부분 안타까울 때가 있다. '피츠제럴드' 편의 지도가 그랬다면 이번에는 명칭. 문예창작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미국의 대학은 아이오와 주에 있고 그 대학은 '아이오와 대학'이다. 카버가 공부를 시도했던 곳이자 강의를 했던 곳이기도 한데 책에서는 아이오와 주립대라고 두 번 언급하고 아이오와 대학이라고도 몇 번 언급한다. 하지만 이 두 대학은 엄연히 다른 대학이다. 문예창작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대학은 아이오와 대학교로 University of Iowa 로 Iowa city에 있고 아이오와 주립대학교는 ISU로 일컬어지는 Iowa State University라고 하며 Ames 라는 도시에 있다. 아이오와 주 전체에서 Ames는 정중앙에 있고 Iowa city는 오른쪽에 치우쳐져 있어 시카고 쪽에 훨씬 가깝다. 물론 자세히 보면 두 대학 모두 주 정부의 지원을 받는 주립대학이지만 하나는 엄연히 아이오와 대학교로 불리고 다른 하나는 엄연히 아이오와 주립대학교라고 불린다. ISU는 아무래도 공학계열 중심의 학교라 카버나 존 치버가 배움이나 강의를 하러 올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부분들이 아쉬운 부분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전혀 영문 표기가 없이 모두 번역문으로만 제시되어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영어가 많이 사용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던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한 번쯤은 영어로도 언급이 되었어야 하는 부분들이 있지 않은가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말로야 아이오와 대학이나 아이오와 주립대학이나 그게 그것 같지만 영어로는 University of Iowa와 Iowa State University로 완전 다르니까 말이다. 


+++ 표지 그림도 무척 마음에 든다. 처음에는 카버의 얼굴이 숨어있는 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 그림을 그린 화가와 카버의 우정도 아름답고 눈물겨웠다. 모든 예술인들은 통하는 것이 있는 것인지. 그림 자체도 멋지고 그 이면에 우정까지 있다니 정말 잘 고른 표지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표지만 봐도 눈물이 글썽여질 정도. 


++++ 옥의 티 하나 더. 카버의 전처 메리앤이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장학금을 받아 잠깐 이주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갑자기 카버의 테헤란 거주 시절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텔아비브와 테헤란이라니..어떻게 이런 일이. 텔아비브는 이스라엘의 도시이고 테헤란은 이란의 도시인데 이것이 왜 갑자기 뒤바뀐 것인지 새삼스러워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옥의 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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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0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JYOH 2021-02-10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정 기준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 왜 선정이 됐는지 강한 의문이 듭니다. 부끄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