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쓰고, 함께 살다 - 조정래, 등단 50주년 기념 독자와의 대화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년에 "독자님의 질문을 기다립니다!"라는 포스트를 봤어요.

조정래 작가님에게 궁금한 것들을 일반독자들이 질문하면 답하는 책을 기획한다고.

드디어 출간되었네요. 


<홀로 쓰고, 함께 살다>는 조정래 작가님과 독자와의 대화집이에요.

2020년은 조정래 작가님의 등단 50주년이에요. 그동안 작품을 통해 만난 작가님은 작품 그 자체였던 것 같아요. 역사 교과서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이야기.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생생한 삶으로 느낄 수 있었던 건 전부 작가님의 작품 덕분이었어요. 언젠가 작가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을 정도로 뜻깊은 시간이었어요. 

이번 책은 독자들이 묻고 작가님이 답해주는 내용이라서, 독자들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읽는 내내 기쁘고 감사했어요. 무엇을 묻느냐도 중요하겠지만 결국 모든 질문의 답은 대답하는 사람의 인생 깊이만큼 나오는 것 같아요. 내공 있는 답변.

제가 조정래 작가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훌륭한 작품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타고난 재능에 머물지 않고 열과 성을 다하는 피나는 노력의 소유자.

누군가는 남의 성공을 운으로 치부하는데, 세상에 그저 운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아요. 혼자 치열하게 노력하는 과정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남들은 몰라도 자기자신은 알 수 있는 거죠. 그러니 조정래 작가님의 등단 50주년은 존경과 축하를 받아 마땅한 일인 것 같아요. 


이 책은 조정래 작가님과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들만 읽으세요. 

좋은 대화란 모름지기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 나누어야 제맛이니까.

마음을 열고 생각을 나누면 기쁘고 행복해져요. 무엇보다도 조정래 작가님의 답변은 말뿐인 내용이 아니라 삶의 경험이 우러난 진심이라서 감동이네요.

자신이 한 말과 쓴 글, 그대로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멋진 인생은 없는 것 같아요. 요즘은 말 따로 행동 따로, 믿을 수 없는 사람들 때문에 불신이 커지는 것 같아요.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어요. 엉터리 가짜 뉴스를 보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차라리 소설 한 권 읽자고요. 아무래도 조정래 작가님의 대하소설은 처음 읽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어요. 그래도 한 권만 읽어보면 그다음은... 항상 시작이 어렵지, 시작하면 쭉 읽을 수밖에 없을 걸요.

세상에나, 『태백산맥』을 필사한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줄 몰랐어요. 읽는 것도 모자라 필사라니, 그 정도 정성과 노력이면 못 해낼 일이 없을 것 같네요. 그만큼 사람들에게 삶의 힘을 주는 작품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어요. 만약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보다 이 책부터 읽으면 어떨까요. 여러모로 작가님과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예요. 문학을 이야기하는데, 인생을 배웠네요.



'100년 단위 문학사와의 싸움!'

그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무기는 단 하나, 노력이었습니다.

...

'남들보다 열 배, 백 배 노력해야 한다!'

저의 영혼과 가슴팍에 깊이깊이 새긴 경고고, 결의였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글쓰는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 어쩌다가 몇몇 후배에게 말했습니다.

"딴짓하지 마라. 글만 써라.

"글이 안 된다고 술 마셔 버릇하지 마라. 글을 다 써놓고 마셔라."

"방송 좋아하지 마라. 그건 출세가 아니다. 곧 버려지고, 곧 잊혀진다."

그러나 후배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30~4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제가 저 스스로를 서재라는 글감옥에 유폐시켜 20년 세월을 보냈더니 『태백산맥』『아리랑』『한강』이 차례로 태어났습니다.

...

'혼자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의 길이와 좋은 작품의 수는 비례한다.'

제가 얻은 결론입니다.

지금까지의 저를 만들어낸 것은 노력입니다.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는 진부한 말은 역시 영원히 빛나는 금언입니다.

스스로 발견한 재능 다음에 하나 더 더해야 할 것이 바로 노력입니다. 

재능 + 노력 + (  ) 가 남았습니다. 하나가 더 더해져야 완전한 문학 인생이 됩니다.

저의 노력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수명은 저의 죽음과 맞바꾸게 될 것입니다.  (29-31p)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흔적을 남기는 글쓰기 - 쐐기문자에서 컴퓨터 코드까지, 글쓰기의 진화
매슈 배틀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반비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흔적을 남기는 글쓰기>는 글쓰기에 관한 책이에요.

저자는 인류의 역사에서 글쓰기의 기원과 의미, 그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궁극적인 질문은 디지털 시대에 글쓰기는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라고 볼 수 있어요.

간단히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기에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각자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글쓰기의 팰림프세스트(palimpsest).

팰림프세스트는 고대에 이루어진 양피지의 재활용으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원본 글이 삭제되거나 일부 지워진 자리 위에 새로운 글을 적어 넣은 표면"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확장된 용례에 따르면 "특히 예전 형태의 흔적을 여전히 간직한 채로 재사용되거나 변경되었다는 의미에서 이런 표면과 어비슷한 것"을 가리킨다고 해요.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이 정의를 뒷받침하는 예문으로 토마스 드퀸시의 말을 실었다고 해요.

"인간의 두뇌만큼이나 자연적이며 힘센 팰림프세스트가 또 어디 있겠는가?"   (13p)


"글쓰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글쓰기는 우리의 인지를 방해하는, 거의 넘어갈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장애물을 내어놓는다고 저자는 이야기해요.

왜 그럴까요. 글쓰기의 힘, 흔적을 남긴다는 자체에 부정적인 요소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흥미로운 소크라테스의 일화가 나와요. 직접 쓴 글을 전혀 남기지 않았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문자의 쓸모뿐 아니라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했어요.

파이드로스와 함께 아테네 외곽을 산책하며 토론하던 소크라테스는 이집트의 신 토트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토트는 전령과 측량의 신으로 진흙과 파피루스로 가득한 나일강의 강둑을 쏘다니는 물새인 따오기의 형상을 한 신이에요. 토트는 산술과 천문학은 물론 주사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발명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글쓰기의 토대가 된 글자 발명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고 해요. 토트는 자신이 발명한 글자들을 이집트 신왕인 타무스에게 선보이며 이렇게 말했어요. 

"이 글자가 있으면 이집트인들은 더욱 현명해질 것이며 기억력도 좋아질 것입니다. 이는 기억과 지혜를 동시에 발달시킬 영약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타무스는 글자 앞에서 회의적이었어요.

"글자의 아버지인 그대는 글자가 도저히 담을 수 없는 특성들을 이야기하고 있군요. 그대가 발명한 글자는 사람들이 기억을 위한 노력을 등한시하게 만들어 결국 잘 잊어버리게 만들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기억하는 대신 외부에 있는 글자에 의존하고 말 것입니다. 그대가 만들어낸 영약은 기억이 아니라 회상을 도울 것이며 그대는 제자들에게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닮은 것들을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것들을 듣는 동시에 그 무엇도 배우지 못할 것이며, 모든 것을 아는 동시에 결국은 아무것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실체 없는 지혜를 자랑하여 함께 있기 꺼려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55-56p)

글쓰기를 만들어낸 우리의 두뇌는 신화 속의 토트 신처럼 문맹에서 기호를 시각적으로 해독하며 끊임없이 진화했다고 볼 수 있어요. 진화심리학자들은 두뇌가 읽기와 쓰기를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라 두뇌가 목적에 맞게 적응한 우발적인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인간은 신화와 사회, 정치 형태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고자 노력했고, 글쓰기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인 동시에 권력이었다고 보고 있어요.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의 '문자의 교훈'이라는 절에서 문자를 의사소통이나 언어예술이 아니라 권력이었다고 서술하고 있어요. 글은 권력을 휘두르는 데 유용한 도구이며, 인간 정신에 대한 일종의 독립적인 통치 체계로 상정하고 있어요.


글쓰기는 그 역사 내내 고대의 방식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동시에 새로운 매체와 양식으로 확장하며 혁신해왔어요. 구술과 문자, 필사본과 인쇄물, 인쇄기와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결국 텍스트를 생산하는 도구가 바뀌었을 뿐, 글쓰기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어요. 우리가 주목할 점은 글쓰기가 인간 의식의 작용으로서 우리 자신을 통해 작용한다는 점이에요. 글이 쓰이는 표면은 변화했지만 글쓰기의 본질은 그대로라는 것. 인간관계들이 코드가 되고 소프트웨어가 되어 인간의 정신과 페이지를 만들어낸다는 것. 한마디로 인간 정신의 흔적으로서 글쓰기는 오래 살아남으리라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 자연휴양림 가이드 - 휴식부터 레저까지 숲에서 즐기는 생애 가장 건강한 휴가, 개정판
이준휘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부쩍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숲이 우거진 곳, 자연휴양림~ 여유롭게 쉬면서 자연을 즐길 수 있으니까.

<대한민국 자연휴양림 가이드>는 우리나라에서 가볼 만한 자연휴양림을 소개한 책이에요.

저자는 두 아들의 아빠이자 경력 13년차 캠퍼라고 하네요. 우연히 자연휴양림에 갔다가 그 매력에 푹 빠진 뒤로로는 주말이나 휴가철마다 가족과 함께 숲으로 떠난다고 해요.

그 경험담을 바탕으로 국립자연휴양림 40곳을 소개하고, 그 중에서 특색 있는 인기 휴양림 17곳을 엄선하여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어요.

우선 휴양림을 지역별로 나누어 소개하고, 각각의 특장점과 시설의 특징, 야영장 정보, 교통편, 예약 정보와 주변 관광까지 다양한 여행 정보를 담아서 보기 좋게 정리한 점이 마음에 들어요. 누구든지 지역과 테마 등을 고려하여 가고 싶은 휴양림을 고르면, 그에 알맞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요.

사실 자연휴양림이 왜 좋으냐, 라는 원초적인 질문은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오히려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시간이 없거나 정보 부족으로 못 가고 있을 뿐.

그래서 이 책에 소개된 대한민국 자연휴양림 정보를 보면서 흥분했네요. 우와, 여기도 가보고 싶고 저기도 가보고 싶어라~


경기 북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휴양림을 소개하자면, 강씨봉자연휴양림이 있어요. 이곳이 그토록 인기 있는 이유를 한 가지 꼽아보라면 무엇보다도 경제적이고 쾌적한 숙소라고 해요. 2011년 개장한 휴양림이어서 숙소들이 비교적 깨끗한 건물들이고, 성수기 기준으로 가격도 저렴하다고 해요. 그래서 사전예약이 시작되는 매월 3일 오전에는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로 트래픽이 폭주한다네요.  경기도 가평에 위치한 휴양림이라서 수도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리상 가깝다는 장점이 있어요.

강씨봉자연휴양림의 시설은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있는 독특한 외관의 산림휴양관과 맞은편에 있는 숲속의 집이 있어요. 휴양관과 숲속의 집 양쪽에 모두 물놀이장이 있고, 휴양관 쪽에서 논남기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트레킹 코스가 있어서 산악자전거를 즐길 수도 있어요.  해발 830m의 강씨봉으로 올라가는 수직보행 등산로도 있고, 휴양림의 임도를 따라 올라갈 수 있는 해발 618m 전망대도 있어요. 이곳에 올라서면 민둥산, 화악산, 명지산 등 주변 산세가 한눈에 펼쳐진다고 해요. 

휴양림 백퍼센트 즐기기 팁으로 체험프로그램과 근처 편의시설 정보, 주변 맛집과 볼거리, 예약 정보까지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강씨봉자연휴양림 예약은 홈페이지에서 가능한데, 추첨제라고 해요. 매월 1일 09:00부터 4일 23:00까지, 다음 달 1일부터 말일까지 추첨 응모할 수 있고, 매월 5일 10:00에 당첨자 발표를 한대요. 추첨 완료 후 잔여 객실은 매월 7일 09:00부터 선착순으로 예약이 가능하대요.


숲이라고 하면 수목원이나 국립공원을 당일 코스로 다녀왔기 때문에 숙소에서 머무를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책에 소개된 아름다운 자연휴양림의 휴양관, 숲속의 집, 야영장 등 숙박시설을 알게 되니 가족여행을 가고 싶어졌어요. 휴식부터 등산, 트레킹, 레저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까지 숲에서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많은 것 같아요. 

자연휴양림에 대해 알게 되니 정말 꼭 가보고 싶어요. 요즘처럼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하는 시기에 가족끼리 오붓한 휴가지로 제격인 것 같아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라말이 사라진 날 -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한 조선어학회의 말모이 투쟁사
정재환 지음 / 생각정원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약 우리에게 조선어학회가 없었다면... 

솔직히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울컥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목숨을 바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계셨습니다. 그 중에는 총칼 대신 펜을 든 조선어학회 분들이 계셨습니다.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한 조선어학회의 말모이 투쟁사를 다룬 이 책은 오늘날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한글 만세!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일본은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끔찍한 건 그러한 일본에게 충성한 친일파, 변절자, 매국노의 행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인보다 더 잔혹하게 동포들을 괴롭히고, 고문했던 놈들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일본의 개가 되어 조선인들을 사냥하였습니다. 개만도 못한 나쁜 XX.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보면서 기가 막히고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1942년 3월,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읍 홍원읍 전진역 대합실.

한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 쓴 박병엽은 결혼을 앞둔 친구 지장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차에서 내리는 승객들을 검문하던 홍원경찰서 보안계 형사 후카자와에게 불심검문을 당했습니다. "너는 누구냐?" 라는 기분 나쁜 말투에 응수라도 하듯이 병엽이 '나는 박병엽이오'라고 퉁명스럽게 답했습니다. 이를 고깝게 여긴 후카자와가 '복장 불량, 언행 불량'으로 병엽을 홍원경찰서로 연행했고, 고등계로 넘겨 수사를 의뢰했습니다. 고등계 주임 나카지마, 형사부장 야스다(본명 안정묵), 형사 이토(본성: 윤)는 병엽을 앞세워 가택수색에 나섰습니다. 병엽은 지역 유지의 아들이라 엄청난 양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병엽을 구금할 만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야스다는 병엽의 조카 박영희의 방까지 뒤졌고, 서랍에서 발견한 영희의 일기장 두 건만 들고 나왔습니다. 여학생의 일기장을 가져가다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야스다는 계속 꼬투리를 잡으려고 조사해도 아무런 증거가 없자, 박영희의 일기장을 훑어 보았고 거기서 한 줄의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정태진과 조선어학회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한 줄의 문장이 될 줄이야.


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한테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다.  (146p)

 

야스다는 일기장에 적힌 '국어'를 일본어로 생각했고, 국어를 사용한 기특한 여학생을 혼낸 불순·반역분자를 잡아들이기 위해 관련된 학생들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영희는 자신이 쓴 글이 2년 전에 쓴 일기였고, '조선어'라고 쓸 것을 '국어'라고 잘못 썼다고 말했습니다. 2학년 때의 일이었으니 어린애의 실수로 봐야 할 문제를, 야스다는 끝까지 추궁하여 정태진, 김학준과 일기장에 도장을 찍은 담임 최복녀 등 세 교사의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형사들은 현직에 있는 김학준과 최복녀의 신문을 뒤로 미루고, 대신 사전 편찬원으로 조선어학회에 근무 중이던 정태진에게 출두 명령서를 발부했습니다. 이것이 '조선어학회사건'의 시발점입니다. 

정태진은 홍원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증인 신분에서 피의자로 바뀌어 20여 일 동안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때 정태진을 고문한 놈이 박영희의 일기장을 뒤진 야스다였습니다. 고문으로 육체와 정신이 파괴된 정태진은 거짓 진술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민족정신을 주입한 사상이 불순한 교사가 되어 있었고, 조선어학회는 불순한 독립운동 단체가 돼 있었습니다. 그 뒤에 회원들이 차례로 검거되었습니다. 


조선어학회 사건 33인 (161p)

구속(31인) :  권승욱, 김도연, 김법린, 김선기, 김양수, 김윤경, 김종철, 서민호, 서승효, 신윤국, 안재홍, 윤병호, 이강래, 이극로, 이만규, 이병기, 이석린, 이우식, 이윤재, 이은상, 이인, 이중화, 이희승, 장지영, 장현식, 정열모, 정인섭, 정인승, 정태진, 최현배, 한징

불구속(2인) :  권덕규, 안호상


조선어학회사건 피의자들은 치안유지법 제1조에 해당하는 내란죄로 기소되었고, 국체변혁을 모의한 대역의 사상범으로 전원 구치소 독방에 수용되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예심은 원래 취지와 다르게 피의자를 무기한 구금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나카노 판사에 의한 요식적인 예심이 끝난 것은 1944년 9월 30일이었고, 그동안 이윤재와 한징은 사망으로 기소 소멸되었고, 장지영과 정열모는 면소로 석방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원심 공판에 회부된 사람은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태진, 김양수, 김도연, 이우식, 이중화, 김법린, 이인, 장현식, 정인승 등 12명이었습니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7인은 곧 석방되었지만,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등 5인은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나라말이 사라진 날>을 읽고나서야 조선어학회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주시경의 어문민족주의 사상을 계승한 최현배는 '정복당한 겨레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겨레 의식을 기르며, 겨레 정신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겨레의 말글을 보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한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조선어학회는 조선 독립을 위해 10여 년의 긴 세월에 걸쳐 조선어문운동을 전개해왔기 때문에 독립운동 단체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조선어학회사건이라는 일제 탄압으로 좌초될 뻔 했고, 한국전쟁과 한글맞춤법간소화파동으로  큰 고비를 겪었으나 1957년 마침내『큰사전』완간을 이뤄냈습니다. 1929년 사전 편찬에 착수한 지 무려 28년 만이며,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제정반포한 지 만 510년 만에 우리글과 우리말로 해석한 사전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민족운동사에 길이 빛날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기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놀랍고도 감격적인 일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바로 설 수 있는 힘, 그 저력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영생여학교에서 조선어와 영어를 가르쳤던 정태진은 제자들에게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회복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갖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도하며 평소 이렇게 말했곤 했답니다.  "노력하라, 나도 노력하리라. 인생은 힘쓰는 자의 것이다."  (133p)


옥사한 이윤재는 사전 편찬실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말과 글은 민족과 운명을 같이한다. 일본이 조선의 글과 말을 없애 동화정책을 쓰고 있으니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글과 우리말을 아끼고 다듬어 길이 후세에 전해야 한다. 말과 글이 없어져 민족이 없어진 가까운 예로 만주족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글을 써두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해두면,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후세에 이것을 근거하여 제 글과 말을 찾아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되고 민족운동이 되는 것이야."  (184-185p)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홀로 쓰고, 함께 살다 - 조정래, 등단 50주년 기념 독자와의 대화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뿌리 깊은 나무처럼 굳건하게 한국 문학을 이끌어주신 조정래 작가님의 진솔한 대화,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