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의 언어 - 소리, 몸짓, 냄새로 소통하며 진화해 온 생물들
롭 던 지음, 송근아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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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간은 수천 가지에 달하는 상리공생 파트너들에게 의존하며 살아가지만, 그런 존재답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상리공생 관계들을 잘 돌봐야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당연한 의무를 외면하고 있다. 인간은 마치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세상의 다른 생명들과 동떨어져 우리만의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행동한다. 나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망상에서 비롯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몹시 외로운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p.15


우리는 다른 종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몸 안팎의 미생물들을 비롯해 동물과 자연과의 관계에 기대어 살고 있다. 이번에 만난 책은 살아 있는 자연의 한 측면인 '상리공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간과 다른 종들 사이의 상호 이익 관계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상리공생'이란 둘 이상의 종이 상호작용을 하며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를 말한다. 어떤 상리공생은 긴밀하게 얽힌 상태로 매우 오랜 기간 지속되기도 하지만, 어떤 상리공생은 아주 짧고 일시적인 만남에 불과하기도 하다. 천연발효 빵, 효모로 만든 맥주, 인간의 얼굴에 서식하는 진드기, 개미에 의한 씨앗 확산 등... 상리공생이라는 낯선 개념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인간과 다른 종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할 때, 작가나 과학자들은 흔히 경쟁이나 포식, 지배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에 두곤 한다. 하지만 인간이야말로 지금껏 존재한 모든 종 가운데 가장 많은 상리공생적 상호작용을 해온 존재다. 저자는 흰개미를 연구하며, 다양한 형태의 상리공생을 도처에서 마주했다고 한다. 수십 종의 벌새들이 꽃들의 수분을 돕는 중개자 역할을 하는 보상으로 꿀을 얻었고, 거대한 잎꾼개미 무리는 자신들이 기르고 먹는 균류와 상리공생 관계를 맺는다. 들판 나무 아래 서 있는 소들은 먹이를 소화하는 데 필수적인 세균을 몸 안에 품고 있고, 나무들 또한 땅속과 낙엽층 속에 있는 균류의 균사망으로부터 영양분을 얻으며, 그 균류들은 나무에 의존하고 있다. 벌집이 있는 곳으로 인간을 안내하는 큰벌꿀길잡이새, 물고기 떼가 나타나면 위치를 알려 인간과 함께 사냥한 범고래, 인간에게 터전을 내어주는 대신 자손을 퍼뜨리는 나무, 냄새로 자연의 언어를 통역해주는 개.... 협력으로 살아남은 자연의 역사에서 우린 무엇을 배워야 할까. 




생물처럼 생각하기의 근본에는 이해하려는 갈망, 그리고 우리의 제한된 감각이 만들어낸 장벽을 허물려는 열망이 자리한다. 모든 종에는 저마다의 움벨트, 즉 자신만이 지각하는 세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다른 생명의 움벨트로 들어설 길을 찾아야 한다. 진화생물학자 해리 그린처럼 이렇게 물어야 한다. "검은꼬리방울뱀으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집굴뚝새로, 혹은 우리집 개 라일리로 산다면 또 어떨까?" 이처럼 다른 존재의 관점에서 사고하려는 노력은 종종 과학적 돌파구로 이어진다.                  p.155


오늘날 인류는 거의 모든 열량을 단 10종의 식물과 5종의 동물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우리 몸을 이루는 탄소 원자의 거의 80퍼센트가 단 10종의 곡물에서 생산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광대한 숲과 그 숲을 이루던 나무들 수조 그루를 베어 버리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곡물에 의존하는 생활 방식으로 숲을 잃었지만, 그 덕분에 인구를 늘릴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나무가 여전히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선명히 알게 되었다. 인종과 문화가 각기 다른 사람들이 거주지를 확대하고, 연료와 경작지를 얻기 위해 수천 년에 걸쳐 숲을 훼손하고, 지구를 파괴해왔다. 진화생태학자인 롭 던은 이 책에서 인류의 조상이 나무 위에 살던 시절부터 현대 문명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협력하며 진화해온 과정을 보여주며, 기후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협력 관계를 통해 살아남은 인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지금 인류는 새로운 협력 관계가 필요할지도 모르는 시대에 발을 내딛는 중이다. 


전 세계의 숲은 인류 때문에 존재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인류 또한 숲이 존재하느냐 사라지느냐에 따라 번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한다. 우리는 나무로부터 배우고, 나무로부터 혜택을 얻는다. 사라져 가는 숲을 지키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생태적 회한을 느끼며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더 많은 상리공생과 덜 외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주변의 다른 종들에게 귀 기울이고, 접촉하고, 냄새 맡고, 함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다른 모든 생명과 맺는 상호 관계를 이해하고, 그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며, 미래를 함께 숙고하면서 그 가운데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우리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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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의 선장들 - 당장의 삶, 다가올 죽음, 그 사이를 채운 책에 관한 216일간의 대화
김새섬.김진경 지음 / 어크로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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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46세에 닥친 뇌종양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 같다. 새섬은 정말로 운명을 원망하지 않는 걸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운명의 부당함에 대해 분개했던 이반 일리치 같은 캐릭터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이른 죽음이라는 벌을 받아야 하느냐며, "왜,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내가 이토록 끔찍한 일을 당해야 하는 거지?"라고 울부짖던 이반 일리치의 반응이 더 자연스럽다. 그러나 새섬은 "삶은 원래 부조리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p.41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다. 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예상보다 일찍 죽음을 맞닥뜨리게 되면, 억울한 마음에 스스로를 연민하게 될 수밖에 없다. 못다 한 일, 이루지 못한 꿈, 결코 먹어보지 못할 음식과 읽지 못할 책, 남은 이들이 나 없이 살아갈 인생... 그런데 여기, 자기 연민을 찾아볼 수 없는 담담한 태도로 '왜 하필 나인가'라고 묻지 않고, '왜 나만 예외겠는가'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온라인 북클럽 ‘그믐’의 김새섬 대표이다. 남편인 장강명 작가의 소설 <서성이다>를 통해 그가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장강명 작가는 갑작스러운 아내의 뇌종양 발병 이후, 병원과 현실적인 문제들 사이에서 흔들리던 남편의 심리를 통해 자신의 실제 경험담을 들려 주었다. 


이번에 만난 책은 그가 투병 이후 시작한 팟캐스트 <암과 책의 오디세이>를 듣고 스위스에서 김진경 작가가 인터뷰를 요청해 이루어진 것이다. 인터뷰는 죽음을 다룬 책의 한 구절을 소개하고 그에 관련한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암 환자에게 좋다는 음식을 찾아다니거나 가혹한 운명을 원망하는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로 한 것은 암에 맞서는 방식치고는 꽤나 독특한 편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각종 치료 방법을 모두 동원하더라도 평균 생존 기간이 12~14개월인, 악성도가 매우 높은 뇌종양 진단을 받고서 말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는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병행하는 표준 치료를 진행했고, 두 번째 수술을 했으며, 강연 무대 세바시에서 죽음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했고, 오랜 꿈이었던 스탠드업 코미디에도 도전해 이뤄냈다. 좋은 죽음이란 결국 좋은 삶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해내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 등장인물에 푹 빠져들죠. 내가 그 사람이 되어서 현실을 잊고 다른 세계로 가는 거예요. 다른 한편으로는 책을 읽으면서 어릴 때부터 사물과 상황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연습을 한 것 같아요. 역사 속 전쟁, 지금은 사라진 위인, 이런 얘기를 읽으면서 저절로 그런 연습이 됐어요.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거예요."

역할극에 몰입한 배우와 같은 구체적인 삶, 동시에 그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자신의 다양한 역할을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추상적인 삶. 새섬의 이중생활이다.                  p.248


이 책은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아마도 죽음에 관한 글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학작품일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고등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중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마흔다섯의 나이로 죽게 된 남자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죽는다는 점을 억울해하며 스스로를 연민한다. 김새섬 대표는 이반 일리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서도,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 세계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기 때문에 나만 특별한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성실하게 살아온 자신이 왜 죽을병에 걸렸냐고 끊임없이 원망하면서 연민을 갈구하던 이반 일리치의 모습은 사실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신이 특별히 귀할 것도 없고, 그러니 남들보다 짧을 삶을 산다고 크게 아쉬울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니 그 초연한 태도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한다. 내 가족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매일 스스로 물어보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다고. 인생이란 그런 것이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는데 갑자기 죽음이 성큼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공포는 어떤 것일까. 좋은 죽음이란 무엇이며, 그 속에서도 왜 인간은 책을 읽어야 하는가. 죽음 앞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자기 연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고통은 삶의 영역인가 죽음의 영역인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누구나 한번쯤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때가 되면 내가 탄 배도 난파할 것이다. 당신이 탄 배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는 언젠가 난파될 것을 알면서도 원하는 방향으로 뱃길을 잡아야 하는 난파선의 선장들이다. 이 책이 그 항해의 연료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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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덫 ㅣ 베라 스탠호프 시리즈
앤 클리브스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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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딩했던 책 도착! 먼저 출간되었던 두 작품도 시리즈에 맞게 새롭게 출간된다고 하니 더 기대된다. 시리즈 꼭 완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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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호시스 ㅣ 슬라우 하우스
믹 헤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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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새 계단에 이르러 있었다. 평소 사람들을 지하로 빨아들이는 계단이 이제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주위에 충만한 주된 감정은 짜증이었지만 술렁거림에서는 공포와 억눌린 패닉도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어떤 일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에게만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일 중에 죽음도 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안내 방송은 그런 믿음을 차츰 무너뜨렸다. '이 역은 폐쇄됐습니다. 가장 가까운 출구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p.15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추락은 한순간에 시작된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자폭 테러를 막지 못해서, 기밀 정보가 담긴 디스크를 열차에 두고 내려서, 거액을 횡령해 모습을 감춘 사무직원을 놓쳐서, 심각한 사고를 일으켜서, 작전에 실패해서... 그 외에도 약물에 알코올, 풍기 문란, 정치적인 이유와 배신이 얽혔을 수도 있다. 온갖 사연으로 MI5 본부에서 좌천된 요원들을 모아놓은 지상 감옥, 바로 슬라우 하우스이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직장에서, 아무 의미 없는 일을 아무런 열의 없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이들에게 매우 기운 빠지는 일이다. 모두들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애쓴다. 막장에 오게 됐다는 좌절감을 넘어, 자신이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라고, 빛이 드는 양지로 다시 기어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의 첫 단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해야 했다. 


슬라우slough, 즉 진창에 있는 거나 다름없다는 뜻의 '수렁의 집'은 어떤 공문서에도 존재하지 않고, 명함과 문패도 없는 비공식적인 이름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슬로 호스', 느린 말이라고 부른다. 사용 기한이 지난 부적격자들을 모아다 아날로그 시대의 서류들과 함께 방치하는 무덤이나 다름없기에 그들은 정보국 작전에 동원되지도, 유용한 임무를 부여받지도 못한다. 서류를 작성하고 관리하며, 본부의 심부름을 할 뿐이다. 그렇게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만 계속되던 어느 날, 무슬림 청년을 납치한 극우 단체에서 '사십팔 시간 뒤 목을 베겠다'는 처형 예고 영상을 올리면서 런던이 발칵 뒤집힌다. 보안국이 실패했을 때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무고한 피해자를 위해 묵념에 동참하며 그날을 기리지만, 성공은 금세 잊힌다. 만약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시민이 참수될 경우,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 과연 슬라우 하우스는 보안국의 핵심 작전에 관여할 수 있을까. 인질 사건이라는 참극을 기회로 삼으려는 이들과 테러 행위를 막아야 하는 이들의 머리싸움이 시작된다. 




미친 인간도 밤에는 자신보다 더 미친 인간을 알아본다. 남자가 슬그머니 사라진 뒤 홉든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온갖 고약한 냄새가 짬뽕이 된 공기를 허파 가득 들이마신 다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못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어쨌거나 그곳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 사실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늘 문을 활짝 열고 맞아줄 장소가 필요하다. 그러나 홉든에게는 그런 곳이 없었다.                p.253~254


누적 400만 부 이상이 판매된 ‘슬라우 하우스'의 첫 작품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이 시리즈는 2022년부터는 게리 올드먼 주연의 애플TV 오리지널 드라마로 제작되어 현재 시즌 6까지 제작되어 방영되고 있다. 스파이 문학의 정통성 위에 냉소적 유머, 관료주의와 정치와 경제를 향한 날카로운 풍자를 얹어 '21세기형 스파이 스릴러'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라 전부터 매우 궁금했는데 드디어 만나보았다. 원작 소설을 먼저 읽으려고 일부러 드라마는 찾아 보지 않았는데, 소설을 읽고 나니 드라마 시리즈도 챙겨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제임스 본드와 조지 스마일리로 대표되는 냉전 시대의 스파이는 이제 한물 갔다고 생각했다면, 이 작품은 지극히 현재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21세기형 첩보물’을 만들어 냈다. 기존의 스파이 문학들이 속임수와 배신, 은폐 등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오해와 갈등, 그리고 첩보 활동을 전면에 내세웠었다면, 이 작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매 순간 세상과 주변 모든 사람들과 자기 자신까지 의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스파이라는 존재의 숙명이라면,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어제와 오늘이 같고, 다가올 내일 또한 다르지 않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거대한 음모의 플롯보다는 각 개인의 내면과 관계에 더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더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다. 또한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정도로 사랑받는 이유는 미워할 수 없는 안티히어로인 슬라우 하우스의 수장 아래 좌천되어 모이게 된 요원들이 현대 직장인들의 삶을 리얼하게 보여주며 각자의 매력을 현실적으로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후속작인 <데드 라이언>도 곧 나온다고 하니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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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낱말들 - 아름다운 낱말 하나를 얻는 순간 세계는 곱절로 선명해진다
박완서 지음, 호원숙 엮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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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선 햇살보다 더 밝게 창호지를 비추며 분분하게 낙화지던 앵두꽃도 살구꽃도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녹두빛 잎이 '연연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꽃의 흔적이 열매가 되어 부풀기도 전이건만 꽃이 지던 날은 먼먼 옛날처럼 가물거렸다.             ─ 「미망 1」, 238쪽


난분분하다, 괄다, 소삽하다, 짜득짜득, 귀살스럽다... 이 중에서 뜻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말이 얼마나 될까. 대충 짐작은 하더라도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는 순우리말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 난분분하다는 눈이나 꽃잎 따위가 흩날리어 어지럽다는 뜻이고, 괄다는 불기운이 세다, 소삽하다는 길이 낯설고 막막하다, 짜득짜득은 물건이 잘 끊어지지 아니할 정도로 검질긴 모양을 말하며, 귀살스럽다는 일이나 물건 따위가 마구 얼크러져 정신이 뒤숭숭하거나 산란한 느낌이 있다는 뜻이다. 




이 책에 수록된 120개의 우리말들은 박완서 작가의 수많은 명작 속에서 엄선한 것이다. 자연을 닮은 말,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말, 삶을 일구는 말, 마음이 하는 말, 사람을 읽는 말이라는 카테고리로 단어들을 나누어 구성해 다채로운 낱말 사전이 되었다. 평소에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거나,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 많아서 더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각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와 함께 해당 단어가 쓰인 책의 한 대목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사전처럼 찾아 읽기도 좋고, 여백에 문장을 필사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귀여운 일러스트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어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며, 양장본이라 사전처럼 곁에 오래 두고 자주 펼쳐 보아도 튼튼하게 만들어 졌다. 




엄마는 이미 그런 각오까지도 굳힌 듯 '구메구메' 껴주었던 혼숫감 같은 것까지 다 꺼내 내 피난 짐을 챙기면서 연방 "너라도 좋은 세상 살아야지." 하는 소리를 되풀이했다.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300쪽


박완서 작가의 책상 가까이에는 늘 사전이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나달나달해지고 결국에는 제본이 여러 조각으로 풀어졌을 정도로 열심히 펼쳐보신 두껍고 무거운 사전 덕분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단어들이 작품 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단조롭고, 빈약한 어휘들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길 권해주고 싶다. 


층층시하라는 말이 부모, 조부모 등의 어른들을 모시고 사는 처지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 갓난아이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벌이고 자는 잠을 '나비잠'이라고 표현한다는 것, 두 사람의 말이 서로 어긋날 때, 제삼자를 앞에 두고 전에 한 말을 되풀이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무릎맞춤하다,라고 한다는 것 등 처음 접하게 되는 표현들이 너무 많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보깨다, 아뜩하다, 생급스럽다, 징건하다, 애면글면, 약비나다 등의 단어들은 너무 낯설어서 그 의미조차 추측이 되지 않았다. 정작 뜻을 알고 보면 친근해지는 표현들인데 말이다. 




초판 한정 특별 부록으로 반년 다이어리 형태로 된 '낱말 수집 노트'를 받을 수 있다. 본책 표지와는 또 다른 일러스트로 완성되어 너무 예쁘다. 필사하기 쉽도록 360도 펼쳐지는 제본이며, 단어들을 모아 수집할 수 있도록 소장 가치를 더한 양장본으로 만들어졌다. 


어느 하나 식상한 표현이 없으며, 삶의 매순간을 적확한 언어로 명징하게 그려내는 단어들로 가득한 책이다. 페이지만 펼쳐도 우리를 낯설고도 신비로운 단어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단순히 단어들을 모아둔 것이 아니라, 해당 단어가 표현된 책 속 구절이 같이 있으니 박완서 작가의 책을 다시 찾아 읽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 속에 담긴 단어들을 다 익히고, 필요할 때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상은 완전히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보다 선명하게, 불투명하던 생각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와 닿게 만들어 주는 단어들이었으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한글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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