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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호시스 ㅣ 슬라우 하우스
믹 헤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6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새 계단에 이르러 있었다. 평소 사람들을 지하로 빨아들이는 계단이 이제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주위에 충만한 주된 감정은 짜증이었지만 술렁거림에서는 공포와 억눌린 패닉도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어떤 일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에게만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일 중에 죽음도 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안내 방송은 그런 믿음을 차츰 무너뜨렸다. '이 역은 폐쇄됐습니다. 가장 가까운 출구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p.15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추락은 한순간에 시작된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자폭 테러를 막지 못해서, 기밀 정보가 담긴 디스크를 열차에 두고 내려서, 거액을 횡령해 모습을 감춘 사무직원을 놓쳐서, 심각한 사고를 일으켜서, 작전에 실패해서... 그 외에도 약물에 알코올, 풍기 문란, 정치적인 이유와 배신이 얽혔을 수도 있다. 온갖 사연으로 MI5 본부에서 좌천된 요원들을 모아놓은 지상 감옥, 바로 슬라우 하우스이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직장에서, 아무 의미 없는 일을 아무런 열의 없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이들에게 매우 기운 빠지는 일이다. 모두들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애쓴다. 막장에 오게 됐다는 좌절감을 넘어, 자신이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라고, 빛이 드는 양지로 다시 기어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의 첫 단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해야 했다.
슬라우slough, 즉 진창에 있는 거나 다름없다는 뜻의 '수렁의 집'은 어떤 공문서에도 존재하지 않고, 명함과 문패도 없는 비공식적인 이름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슬로 호스', 느린 말이라고 부른다. 사용 기한이 지난 부적격자들을 모아다 아날로그 시대의 서류들과 함께 방치하는 무덤이나 다름없기에 그들은 정보국 작전에 동원되지도, 유용한 임무를 부여받지도 못한다. 서류를 작성하고 관리하며, 본부의 심부름을 할 뿐이다. 그렇게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만 계속되던 어느 날, 무슬림 청년을 납치한 극우 단체에서 '사십팔 시간 뒤 목을 베겠다'는 처형 예고 영상을 올리면서 런던이 발칵 뒤집힌다. 보안국이 실패했을 때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무고한 피해자를 위해 묵념에 동참하며 그날을 기리지만, 성공은 금세 잊힌다. 만약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시민이 참수될 경우,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 과연 슬라우 하우스는 보안국의 핵심 작전에 관여할 수 있을까. 인질 사건이라는 참극을 기회로 삼으려는 이들과 테러 행위를 막아야 하는 이들의 머리싸움이 시작된다.

미친 인간도 밤에는 자신보다 더 미친 인간을 알아본다. 남자가 슬그머니 사라진 뒤 홉든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온갖 고약한 냄새가 짬뽕이 된 공기를 허파 가득 들이마신 다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못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어쨌거나 그곳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 사실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늘 문을 활짝 열고 맞아줄 장소가 필요하다. 그러나 홉든에게는 그런 곳이 없었다. p.253~254
누적 400만 부 이상이 판매된 ‘슬라우 하우스'의 첫 작품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이 시리즈는 2022년부터는 게리 올드먼 주연의 애플TV 오리지널 드라마로 제작되어 현재 시즌 6까지 제작되어 방영되고 있다. 스파이 문학의 정통성 위에 냉소적 유머, 관료주의와 정치와 경제를 향한 날카로운 풍자를 얹어 '21세기형 스파이 스릴러'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라 전부터 매우 궁금했는데 드디어 만나보았다. 원작 소설을 먼저 읽으려고 일부러 드라마는 찾아 보지 않았는데, 소설을 읽고 나니 드라마 시리즈도 챙겨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제임스 본드와 조지 스마일리로 대표되는 냉전 시대의 스파이는 이제 한물 갔다고 생각했다면, 이 작품은 지극히 현재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21세기형 첩보물’을 만들어 냈다. 기존의 스파이 문학들이 속임수와 배신, 은폐 등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오해와 갈등, 그리고 첩보 활동을 전면에 내세웠었다면, 이 작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매 순간 세상과 주변 모든 사람들과 자기 자신까지 의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스파이라는 존재의 숙명이라면,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어제와 오늘이 같고, 다가올 내일 또한 다르지 않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거대한 음모의 플롯보다는 각 개인의 내면과 관계에 더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더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다. 또한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정도로 사랑받는 이유는 미워할 수 없는 안티히어로인 슬라우 하우스의 수장 아래 좌천되어 모이게 된 요원들이 현대 직장인들의 삶을 리얼하게 보여주며 각자의 매력을 현실적으로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후속작인 <데드 라이언>도 곧 나온다고 하니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도 기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