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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곁에 두어 좋은 말 - 100년의 문학 작품에서 길어 올린 마음들
나민애 지음 / 북다 / 2026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들뜨다, 달뜨다는 비슷하면서 다르다. 비슷한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다른지를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어려운 것을 글로 쓰다 보면 생각이 정리된다. 정리하려고 '들떴던 나'와 '달떴던 나'를 적어보았다. 그것은 사금처럼 추억에 묻혀 기다리고 있다가 단어라는 곡괭이에 의해 발견되고 만다... 소풍으로는 들뜨고 눈빛으로는 달뜬다. 들떴던 것이 언제인가. 달떴던 것은 언제인가. 둘 다 어리거나 젊은 단어다. 나이 든 사람이 그리워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단어인 셈이다. p.17
올해는 한글날이 제정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나민애 서울대 교수가 한국 문학 100년의 작품들에서 유정한 단어들을 골라 책으로 엮었다. 이 책은 그렇게 142명 작가의 142개 단어를 모으고, 단어에 담긴 이야기들을 풀어낸 것이다. 홍안, 여리다, 숙맥, 어수룩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도 있고, 물큰물큰하다, 멍멍히, 섧다, 홉뜨다, 동탕하다 등 처음 접하는 단어들도 있었다. 어떤 기회가 자꾸 닥쳐오는 모양을 '하마하마'라고 표현한다는 것도 배웠고, 매우 기쁘고 만족스럽다는 뜻으로 '흔흔하다'라는 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이렇게 모은 단어들을 5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나를 선연하게 만드는 단어, 다사로운 당신에게 건네는 단어, 잠포록이 평온한 하루를 위한 단어, 시나브로 흐르는 삶에 관한 단어, 그리고 찬연한 자연이 빛나는 단어이다.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장면처럼 무서웠거나 강렬했던 것, 아름다웠거나 지나칠 수 없었던 것들만이 선연하게 남는다. 내 눈에 들어오는 정도가 내 마음의 정도인 것이다. 나에게 선연했던 것들이 나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나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지금 내게 무엇이 선연한가. 생각하며 읽어 보았다. 흥미로운 단어들이 많았지만, '이방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가 인상깊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방인이라고 느낀다면 온 세상이 내게 불친절하다는 뜻'이라고 말하며, 이방인적인 내면을 갖췄을 때 반려를 발견하기 좋다고 저자는 말한다. '모두 낯설고 적대적일 때, 그렇지 않은 한 사람이 발견된다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방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로맨틱하면서도, 절실하게 할 수 있구나 싶어 감탄하며 읽었다.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아이는 열나지 않았고, 고향에서는 급한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다. 남편은 예상되는 시간에 퇴근했고, 아이들은 인사를 대충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제 입었던 옷을 오늘 하루 더 입을 수 있었고, 급히 사야 할 세제도 치약도 없었다. 그 밥솥에서 그 주걱으로 밥을 푸고 그 식탁 그 자리에서 가족과 밥을 먹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 어제도 물었고 그제도 물었던 것을 물어봤다.... 쨍하니 기쁠 일은 없었지만 잠포록이 맑고 평온했다. 이보다 좋은 것은 없다. 이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p.181
스마트폰과 SNS 덕분에 말 대신 문자로 대화하는 게 더 많아졌고, 각종 줄임말이 등장하며 사람들은 점점 더 간결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단어 사용 역시 제한적이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보도 기사에서 14년간, 한 개인이 하루 동안 직접 말하는 단어의 양이 매년 338개씩 꾸준히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이 책은 그렇게 깊은 고민 없이 무심코 쓰게 되는 단어들, 점차 증발하고 획일화되는 단어들을 보다 소중하게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단어들은 '네 마음을 내가 다 안다, 대신 말해주겠다'고 속삭여 주었다. 각각의 단어들에 담긴 뜻과 단어가 사용된 문장, 그리고 저자의 글이 어우러져 한 단어의 인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책에는 백하고도 마흔두 개의 인생이 담겨 있는 셈이다.
우리가 하루에 사용하는 총 단어의 수는 약 1만 5,000개. 그중 중복되는 단어를 빼면 약 2,000개의 단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구나 싶어서 놀라웠던 수치다. 늘 비슷한 상황에서, 유사한 단어들만 사용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며 하나씩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한글에 대해 더 소중한 마음으로, 잘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전적 정의만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단어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저자의 글이 에세이처럼 술술 읽혀서 더 공감되는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가끔 일상에서도 어떤 단어는 사전적 정의 그 이상의 뜻을 포함해야만 의미가 전달될 때가 있는데, 그런 부분들까지 세심하게 그려내는 책이었다. 어떤 단어는 추억에 잠기게 만들고, 어떤 단어는 재미있어서 입가에 맴돌고, 예뻐서 눈이 가는 단어도 있고, 마음이 쓰여 곁에 두고 싶은 단어들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내 곁에 오래도록 두어도 좋은 나만의 단어들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