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방에서 ㅣ 암실문고
브라이언 딜런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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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린 시절의 사물들과 이후 그것들이 불러 낸 분신들 사이의 은밀한 친연성을 알아차리기 위해, 우리 삶이 그런 멜로드라마처럼 거창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삶은 사물들 사이의 숨겨진 상응 관계, 또한 어느 시기와 다른 시기 사이의 은밀한 공모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런 연결들은 오직 우리가 하나의 대상에 집중했을 때에만, 즉 그것을 '이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상상 속에서 떠올려 볼 수 있는 다른 대상과 견주어 보는 순간'에만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p.108~109


하나의 문장이 감정 그 자체가 될 수 있을까. 문장은 단어들을 배열해 내용을 서술하는 것인데, 감정 그 자체가 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브라이언 딜런의 글을 읽다 보면 종종 그런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의 문장들을 읽다 종종 멈추곤 한다. 단순한 문장조차 수차례 다시 보게 만들고, 마구 펼쳐지는 생각의 향연을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에세이즘>, <한 문장이 있다고 해보자>를 통해서 만났던 브라이언 딜런의 데뷔작이 암실문고로 나왔다. 전통적인 비평과 자전적 글쓰기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글쓰기를 선보여왔던 그의 전작들을 인상깊게 읽어왔기에, 그의 데뷔작인 이번 작품도 매우 기대하며 읽어 보았다. 


이 책은 브라이언 딜런이 처음으로 쓴 것으로 부모의 죽음을 계기로 기억과 상실에 대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풀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기억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루는 인문학처럼 읽힌다. '애도라는 두터운 관문 너머에 숨겨져 있는 밀실이 그의 기억 저장소이다. 그는 부모의 죽음이라는 이중의 장벽이 철저히 밀봉된 방을 만들어 냈다고, 고 썼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집을 떠올리고, 그 속에 있던 사물들에 대해 생각하고, 탐구한다. 집이란 우리가 매일 같이 만들어 내고 다시 만들어 가는 무엇이다. 집에 산다는 것은 어떤 장소를 부단히 개조하고 재구성하고 잊었다가는, 다시 떠올리면서 끊임없이 변화를 주는 것이다. 집을 기억의 저장소로 여기는 관념은 오래된 것인 만큼 익숙하면서도, 일종의 가정 고고학으로서 풀어 나가는 브라이언 딜런의 문장들은 그것을 낯설고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주고 있다. 




우리가 고집스레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의 증거일 뿐이다. 그 움직임이 남긴 흔적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 곳곳에 다양한 방식으로 새겨져, 우리에게 유익하게 쓰이거나 강렬한 깨달음을 준다. 시곗바늘의 움직임, 계절들이 내보이는 생동감이나 나른함, 얼굴이나 몸에 나타나는(아주 점진적일 수도, 반대로 아주 빠를 수도 있는) 노화의 흔적 같은 것들.                 p.375


이 책은 브라이언 딜런이 십 대 중반일 때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대학 입학 직후에 갑작스러운 심장 문제로 작고한 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담고 있다. 아버지의 서재와 거실 한구석에 있는 키 큰 장식장, 유품상자와 사진 더미들, 어머니의 성경책과 그 속에 끼워둔 내용물들...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물려받은 물건들은 과거로 이어지는 끊기지 않는 통로가 되어 준다. 공간이나 사물이 매개체가 되어 과거의 마음들을 불러내고, 이해와 수수께끼 사이를 오가며 지적인 사유가 펼쳐진다. 사진에 관련된 사유들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그는 우연히 사들인 관광지 사진첩 속에 있는 한 여성의 뒷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다. 마치 어머니가 그곳에 마치 기적처럼 나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부모님의 사진들 중 대부분은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신 뒤에야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대상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존재하게 된 세상인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서재에 대한 에피소드도 매우 흥미로웠다. 아버지가 소장했던 대략 천 권 가량의 장서들은 어린 시절부터 강렬한 존재감을 지녔던 대상이었다. 그 서재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모종의 형태를 부여하려 애써 온 방식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견고하게 구현한 장소'이기도 했다. 백 권도 넘는 책을 손에 닿는 곳에 위태롭게 쌓아 두려는 아버지의 행동은 어머니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었지만, 그에게는 끊이지 않는 경이로움을 선사하는 원천이었다. 서재의 책과 오래된 기록 뭉치들이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관한 아카이브가 되어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이미지를 구축하게 만들어 준다. 또한 자신의 책들 사이에 흩어져 있는 아버지의 책을 보면서, 자신이 뒤늦게 아버지의 정리 원칙을 물려받았음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무질서한 서재를 자신이 정확히 똑같이 재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그 동안 읽어왔던 '회고록'과는 차원이 다르다.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고, 여러 번 읽어 곱씹어 보고 싶은 문장들로 가득했다. 자, 폄하되거나 오독되어 왔던 에세이라는 장르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브라이언 딜런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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