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노은 옮김 / 다산초당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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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자기 삶에 빈틈없이 울타리를 둘러 운명의 모든 침입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는 이 감동적인 믿음 속에는, 착실하고 소박한 인생관과 크고 위험한 오만함이 함께 담겨 있었다. 19세기 사람들은 자유주의적 이상주의 속에서 자신들이 '온 세상 최고의 세계'를 향해 곧고 바른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전쟁과 기근, 폭동이 있었던 이전 시대를, 인간이 아직 미성숙하고 충분히 계몽되지 않았던 시대라고 여기며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제 수십 년만 지나면 마지막 악과 폭력이 완전히 극복될 것이었다.             p.28


이 책은 <감정의 혼란>, <체스 이야기> 등 세계문학전집과 <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라는 미공개 에세이로 만났던 슈테판츠바이크 유일한 회고록이다. 국내에는 1995년에 출간된 적이 있는데, 30여 년 만의 새로운 번역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초판 1쇄는 양장본이었고, 2쇄부터는 무선 제본으로 나온다. 버건디 컬러 표지와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상까지 너무 고급스럽다. 양장본이 더 아름답긴 하지만, 무선 제본은 겉 표지를 벗겨내면 안쪽에 근사한 문양이 숨겨져 있는 것도 깜짝 선물같다. 겉 표지를 뒤집어서 씌우면 새로운 북커버를 씌운 듯한 느낌도 난다.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두께의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고스란히 겪었던 그 시간들을 모두 담고 있다. 그가 이 책을 집필할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이고, 육십 세가 되어가는 나이에 망명객의 신세로 타국을 떠돌고 있던 때이다. 그런 시기이다보니 잃어버린 유럽에 대한 추억과 회한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이 책을 쓴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국의 붕괴, 베르사유체제, 인플레이션, 파시즘의 부상, 나치의 집권, 망명과 추방, 제2차 세계대전.... 이러한 세계사의 거대한 사건들을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이자 문학적 '회고'로 만날 수 있다는 데 이 책의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은 살아생전 단 한번도 경험해 볼 수 없는 사건들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역사 교과서에서 만났던 거대한 사건뿐만 아니라, 그러한 일이 벌어졌을 때 세계는 어떤 분위기였고,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고 두려워했는지를 통해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경험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장황하고 지루한 것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작품을 읽는 것으로부터 나 자신의 작품을 쓰는 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고, 나로 하여금 특별한 경계심을 갖도록 훈련시켰다. 본래 나는 가볍게 물 흐르듯 창작을 한다. 책의 초고를 쓸 때 나는 느슨하게 펜이 가는 대로 내버려두며, 마음에 두고 있는 것들을 줄줄이 써 내려간다. 마찬가지로 전기작품에서는 우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상상 가능한 모든 종류의 세세한 기록물들을 다 활용한다.              p.524


이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유년 시절부터 시작된다.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 넘치고, 집중적으로 독서를 했던 학창 시절에 대한 글들은 청춘의 아름다운 빛깔로 가득하다. 필하모닉 단원들의 리허설에 몰래 들어가기도 하고, 헌책방을 뒤지고 다녔으며, 어제 이후로 새로 나온 책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매일 서점의 진열장을 꼼꼼히 살펴보고, 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읽었던 시절. 빈의 커피하우스에 대한 대목도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듬뿍 느끼게 해주었다. 문학적 열정 덕분에 일찍부터 끊임없는 토론과 분석을 통한 비판적인 식별력을 갖추게 되는데, 그 시절의 예술에 대한 강박적 열광과 미적인 것에 대한 터무니없을 정도의 과대평가가 결국 그를 작가로 이끈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츠바이크를 비롯해 젊은이들은 스스로의 문학적 야망에 완전히 파묻혀 정치와 사회 문제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도시가 들끓고 대중이 들고 일어났지만, 그들은 시를 쓰고 그것에 대해 토론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른 후 지붕과 벽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렸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새로운 세기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0세기 초 이성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 그 어느 때보다 굳건했던 순간과, 그 모든 것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산산조각 나는 것을 모두 지켜본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이토록 혼란스러운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문학과 삶을 향한 애정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던, 한 인간의 초상은 먹먹한 감동과 가슴 아픈 여운을 남겨 주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쟁이란 뉴스 화면에서나 접하게 되는 너무나 먼 일이다. 지구촌 어디에선가 늘 벌어지고 있는 것이 전쟁이고, 한 나라를 둘로 쪼개어 살고 있는 우리이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전쟁이라는 것이 한 개인에게 어떻게 다가오는 것인지, 한순간에 삶이 산산조각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럼에도 그 모든 일들이 언젠가는 지나가고 시간은 흐르고 역사가 쌓여 오늘이 되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츠바이크는 이 책의 출간도, 세계대전의 끝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기록은 한 시대에 대해 남긴 20세기 최고의 증언이다. 폐허 위에서도 삶은 다시 시작되고, 감당하기 너무나 벅찬 순간도 결국은 지나가게 마련이다. 이 책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버텨낼 수 있다는 위로와 희망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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