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공원, 농구하는 소녀 ㅣ 여행그림책
천선란 지음, 이주향 그림 / 달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밤의 새벽'과 '아침의 새벽' 그 어디에 붙여도 밤의 고요함이나 감미로움, 아침의 활기참이나 싱그러움이 붙지 않은 고독한 적막의 시간. 나는 꽤 오래전부터 그 시간을 멈춘 시간이라 여겼다. 시간의 빈틈이라 불렀고, 우주를 지배한 순간이라 느꼈다. 지구의 시간이 통하지 않는 시간 축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 시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가끔은 새벽 세시 사십분, 조금 더 자면 새벽 네시 이십분. 어쨌든 새벽 네시.                    p.20


달 출판사의 여행그림책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이병률 시인의 파리 편이었던 <좋아서 그래>, 나태주 시인의 탄자니아 편이었던 <돌아보니 그곳이 천국이었네>에 이어 이번에는 천선란 작가의 뮌헨 편이다. 나태주 시인의 책을 읽었었는데, 시인이 탄자니아에서 보낸 시간들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참 좋았던 기억이 있다. 붉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흙먼지와 그 속에서도 예쁘고 싱싱하고 깨끗하게 피어난 꽃들, 선인장도 말라죽는 땅에서도 견디며 사는 바오밥나무들, 가시나무 우거진 산 비탈길을 넘어 만난 소와 염소와 당나귀 떼, 가도 가도 끝없는 모래벌판 사막길에 느닷없이 열린 샘물... 그리고 먼지와 바람과 햇빛, 그 속에 서 있는 사람들... 아름다운 언어로 빚어낸 시와 담백한 그림들 덕분에 꼬박 21시간을 날아가야 만날 수 있는 풍경을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천선란 작가는 문화 교류 프로그램으로 독일 뮌헨에서 한 달을 보내게 된다. 항상 창작과 강연, 행사 등 꾸준히 일해온 소설가로서의 삶도 최대치였고, 십 년 넘게 재활병원에 입원중인 치매에 걸린 엄마를 돌보는 딸의 삶도 만만치가 않았기에, 내가 나로서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직업인으로서의 사회적 가면과 가족을 돌봐야 하는 자식의 가면을 벗고, 비로소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독일 마트에서 매일 사 먹었던 묵직하고 심심한 흑빵과 뮌헨에서 지내는 동안 낮의 절반 이상을 보냈던 수많은 공원들이 낯설고도 고요한 시간을 선사해준다. 그리고 소설가도, 딸도 아닌, 온전히 ‘한 명’ 혹은 ‘한 개’로 존재하며 자신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몇백 년 전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자기만의 공원이 필요하다.'라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었는데, 작가가 서른 번의 날 동안 매일 비슷한 공원에 앉아 깨달은 것이기에 더 와닿았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고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다는 생각에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그냥 나인, 시시하고 허무한 사실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라는 가면이 아니라 아무것도 쓰지 않은 나도 존재한다는 것을 하염없이 공원에 앉아 느낀다. 몇백 년 전까지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다면, 이제 너무도 많은 기대를 품고 사는 우리에게 자기만의 공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딸로서 혹은 엄마로서 잘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너무 오랫동안 내 민낯을 보지 못한 우리에게 말이다.              p.74


한국어는 물론이고 그나마 익숙한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도 들리지 않는 세계. 작가는 그곳에서 완벽한 이반인으로서의 삶을 경험한다.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조차 물살이나 새소리처럼 배경음악이 되는 시간.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살면서 처음으로 '일인 팀'이 된 기분을 느끼며 한 달이라는 시간을 경험한다. 새벽 네 시에 눈을 뜨고, 공용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해 먹고 외출 준비를 마치면 일곱시쯤, 숙소를 나온다. 일찍 문을 여는 근처 카페에서 소설을 쓰고, 정오가 되면 식료품 마트로 가서 매일 다른 메뉴들과 요거트를 사서 점심을 먹는다. 오후에는 다른 작가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각자의 시간을 보낼 때는 전시를 하나씩 보고 온 뒤, 해가 조금 내려간 네시쯤 공원에 간다. 정해진 루틴 대로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들이 느껴져 부럽기도 했다. 




작가는 늘 같은 장소에서 농구공을 던지는 소녀를 만난다. 다 해진 농구 골대에 계속 농구공을 던지던 소녀는 끊임없이 실패하는 중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소녀는 그날 이후로도 계속 농구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몰두해서 얼굴 근육이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는 얼굴을 한 채로.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그렇게 마음뿐만 아니라 온몸이 그것으로 향하게 되니까. 출국 전날 마지막으로 들른 공원에서도 소녀를 만났는데, 역시나 공은 골대를 빗나가고 있었다. 소녀에게는 농구가, 작가에게는 글쓰기와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패해도 그다지 부끄럽지 않은 것, 그저 내가 나를 만족시킬 때까지 끝없이 하는 것, 마음과 몸이 전부 다 쏠리는 것이니까. 잘하든 못하든 매일 한다는 건, 좋아한다고 당당해 말해도 된다는 것을 말이다. 


책에 수록된 아름다운 수채화 그림들이 계절의 온도와 공원의 공기, 드넓은 숲의 푸르름과 바닥에 공 튀는 소리, 모래의 촉감, 새벽 네시의 적막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해줘 더 좋았다. 누구나 직업과 관계와 책임 속에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그에 맞는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 이 책은 그러다보니 잃어버린 나 자신을 다시 마주볼 수 있게 해준다. '자기만의 공원'이 필요한 당신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