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하루도 사랑
서고운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순찌는 자기가 또 한번 버려졌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정말 좋은 가족을 만났다고 생각할까. 내가 잠든 사이 선주가 입양 신청서를 고쳐썼듯이, 사력을 다해 사랑을 하고 서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고군분투가 어떤 경계 앞에서는 너무나 쉽게 흐려지곤 했다... 구원은 필요 없어. 우리는 살아남을 거야. 살아남는다는 건 어제로 가지 않는다는 뜻이야. 집으로 돌아가면 선주에게 그런 말을 꼭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예감은 때로 결심에 가깝기 때문에.             - '위드걸스' 중에서, p.65


베이비시터 일을 하는 순지는 프리랜서 방송 작가인 신혜와 함께 살고 있다. 돈 받고 비행기 타는 게 꿈이었던 신혜는 알래스카에 방송 촬영을 갔다가 다치는 바람에 결국 모아둔 돈을 다 털어 귀국해야만 했다. 돌아와 한 달을 누워 있던 신혜는 앉을 수 있게 된 무렵부터 블로그에 여행기를 올리기 시작했고, 방문자는 금세 늘어났다. 그러다 작은 출판사에서 블로그 원고를 모아 출판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오고, 미팅을 하러 간 참이었다. 순지는 일을 끝내고 장을 보러 갔다가 아이 엄마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고 지아라는 아이를 집에 데려와 돌본다. 지아는 이상하게도 물건 찾기를 잘했는데, 누군가 찾고 있는 물건은 분홍색으로 빛이 난다고 말한다. 그렇게 찾기 놀이가 시작되는데, 순지가 잃어버린 것들을 지아는 다 찾아줄 수 있을까.


아울렛에서 근무하는 희지는 주말에도 숨쉴 틈 없이 일하는 중이다.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활력이 돌았는데, 다가오는 월요일 휴무날에 강릉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직전 친구와 다녀왔던 뉴욕이 마지막 여행이었던 터라 오랜만에 겨울 바다를 보러 갈 생각을 하니 감격스러운 기분이었다. 여행을 가게 된 계기는 아무 기대 없이 응모한 이벤트에 당첨되었기 때문인데, 행운보다는 불운이 익숙한 사람으로서 희지는 벅찬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환갑을 앞두고 운전면허를 땄던 엄마가 사고를 내서 합의금이 필요하게 되는데, 갑작스럽게 목돈을 어디서 구해야 할까. 마침 강릉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삼촌이 갚지 않은 돈이 떠오른다. 희지는 강릉으로 여행가는 길에 삼촌을 찾아가 보기로 하는데, 과연 오래전의 빚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게 될까. 




나는 도리질을 했다. 세상은 망하지 않아요. 망하는 사람들만 있지. 끝은 언제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역사는 끝의 연속이다. 의미는 인간이 부여하는 것일 뿐이다. 지구의 시간은 언제나 멸종의 멸종을 거듭하며 이어져오지 않았는가. 인류는 어차피 언젠가 멸종할 거라는 식의 냉소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의미가 사라져버린 세계에 대해 언제나 깊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왔으니까.               - '내일의 날씨' 중에서, p.222


등단 4년 만에 나온 서고운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그간 다양한 매체에 활발하게 발표한 여러 작품 중 아홉 편을 선별해 묶었다. 이 소설집에는 엄마와 딸, 이모와 조카, 아르바이트 동료, 자매, 레즈비언 연인 등 다양한 여성들 간의 관계가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같은 집에 거주하거나 일시적으로 함께 머물고 있다. 대부분 원룸 혹은 투룸 빌라 정도로 좁은 공간이라는 조건 안에서만 가능한 친밀성의 형태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현실적이면서도 동화적이고, 낭만적이면서도 구원 대신 생존을 다짐하는 결연함이 있다. 극중 "구원은 필요 없어. 우리는 살아남을 거야. 살아남는다는 건 어제로 가지 않는다는 뜻이야."라는 문장이 꿈이 아닌 현실에 더 집중하려 하는 인물들의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집안에서 잃어버린 물건들을 색깔을 통해서 찾아내는 아이, 집안 대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하는 사람을 귀신으로 볼 수 있는 능력 등 상상력이 빛나는 이야기도 있었고, 육 개월 만난 남자친구를 잊지 못해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속을 게워내는 사람과 노동자의 죽음을 인정 받기 위해 본사와 투쟁하는 노조 등 고개만 돌리면 만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들도 있었다. 묵직한 소재 조차 지나치게 무겁게만 다루지 않아 더 좋았는데, 작가는 시종일관 누군가를 돌보고, 함께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다정하고 선한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해준다. 그렇게 현실의 절박함과 환상적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는 아홉 편의 이야기들은 섣부른 구원이나 완전한 행복 대신 함께 내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발걸음을 내딛게 만들어 주었다. '살다보면, 그냥 견디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도 있'기에, 우리는 꽤 많은 것들을 그저 견디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며 왜 그렇게 견디면서 사는 것인지 처음으로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견디지 않고도 살아가는 삶에 대해 그려보게 되었다. 표지 이미지인 젤리처럼 말랑하고, 달콤하고, 착 달라붙는 이야기의 맛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