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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문학적인 서울 산책 - 근대소설 속 장소를 따라 걷는 도시 인문학
이순자 지음 / 더퀘스트 / 2026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칠칠단의 비밀>을 읽으며 이렇게 길러진 추리력을 제대로 발휘했습니다. 콜롬보 형사가 범인이 남긴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고 추적하듯, 저는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와 단어들을 샅샅이 찾아내며 읽었지요. 그렇게 따라가다 보니 작품에 심어진 독립 정신과 애국심의 단서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와 단어 하나하나에도 숨은 의도가 담겨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옛 지도와 현재 지도를 꼼꼼히 읽고 나란히 비교하는 과정에서, 범인의 트릭을 알아차릴 때의 짜릿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답니다. p.110
우리가 무심코 걸어가는 길이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 일제가 우리의 궁궐을 멋대로 훼손시킨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적 현장이라면 어떨까. 2026년의 서울을 걷다가 문득 백 년 전 경성의 풍경이 겹쳐 보이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면 말이다. 이 책은 한국을 대표하는 근현대 소설 속 장소들을 직접 발로 걷는 시간여행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문화유산 해설 분야에서 20년의 연륜을 쌓아온 저자가 현진건 <운수 좋은 날>,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방정환 <칠칠단의 비밀>, 박태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염상성 <암야>,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시와 삶을 따라가며 작품 속 배경을 치밀하게 고증해낸다. 혜화동에서 종로를 지나 남대문 정거장으로 향하는 김첨지의 인력거, 청계천변을 휘적휘적 걸어 다닌 구보 씨의 하루, 윤동주의 하숙집과 일곱 살 박완서가 두리번거렸을 서울역의 풍경 등 소설 속 배경과 현실의 서울을 겹쳐 보여주는 이 책은 도시 인문학이면서 서울 답사 안내서이자 역사 기행서이기도 하다. 기본적인 구성은 작가 소개, 작품 소개, 그리고 작품 따라 걷기로 각각의 장소 별로 현장을 직접 찾아가보는 느낌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은 대단한 클라이맥스도 없이 잔잔히 흐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 '하릴없는 하루', '대단할 것 없는 하루'에는 일제강점기와 불황, 무력감과 허망함, 불확실한 미래가 켜켜이 쌓여 있지요. 어떤 거대한 외침보다 이처럼 낮고 잔잔한 아우성이 오늘 우리에게 더 깊이 파고드는 까닭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 또한 어딘가 모르게 '암야'를 닮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나아갈 길을 알 수 없지만 계속 걸어야만 하는 이 시대의 독자에게 <암야>는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라. 희미하더라도 걸어라, 너의 희망을 향해." p.268~269
지리와 풍수, 공간에 해박한 저자가 국어 교과서에 실린 명작들의 배경을 직접 찾아갈 수 있도록 추천 코스를 구성했다.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가 인력거를 내달린 그날의 서울을 따라 걷는 코스는 동소문에서 시작해 전찻길, 동광학교, 남대문 정거장, 인사동, 창경원 등을 답사해 본다. 전국 어린이들을 밤잠 설치게 한 탐정소설인 방정환의 <칠칠단의 비밀>을 따라 걷는 코스는 진고개, 망원정, 구리개, 탑골공원, 금화산, 경성역 등을, 모던보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따라 걷는 코스는 광교, 화신백화점, 조선은행, 남대문, 경성역, 제비다방, 조선호텔, 종로 등으로 향한다.
현대의 우리에게 익숙한 남대문시장, 망원 등의 숨은 유래도 흥미로웠고, 명동과 을지로의 과거, 청년 윤동주가 시집을 사 모으던 헌책방의 위치, 우리나라 도서관의 역사 등 근현대 서울의 생생한 비화들이 가득한 책이었다. 저자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 그 시대의 장소들을 찾아 다니며 현재의 변화를 즐기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다고 말한다. 주인공이 배회했던 그 시절 경성을 상상하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소를 걷는 즐거움이 너무 궁금해서, 언젠가 책을 들고 소설 속 장소를 천천히 걸어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소설과 역사, 그리고 장소가 하나로 이어지는 경험은 그 어디서도 할 수 없는 특별한 산택이 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 책에는 작품 속 장소를 생생히 만날 수 있도록 지도와 사진이 200여 점이나 수록되어 있고, 교과서에 실린 근현대 명작들을 다시 읽어볼 수 있도록 인용문도 풍부하다. 소설 속 주인공과 나란히 걷는 경험, 한 세기 전 경성과 오늘의 서울을 한꺼번에 통과하는 기분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