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 창비교육 성장소설 17
연여름 지음 / 창비교육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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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상에 이처럼 고요한 안트로는 존재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순간, 두 눈동자가 짙은 보랏빛으로 번뜩였다. 까마득히 오랜만에 맞닥뜨리는 밤의 헤마였다.

이런. 안 돼. 왜 하필 지금.

자책과 후회가 동시에 밀려왔다. 나쁜 일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걸 알면서도 방심하고 말았다. 그게 지금은 아닐 거라는 희망에 기대어서. 마음이 평소보다 들떠 있던 탓이었다. 경솔하고 어리석었다.                p.86~87


열여덟 살의 겉모습을 하고 있는 소녀 영소의 나이는 실제보다 꽤 많다. 무려 274년간 가족을 잃은 외톨이였다가, 침략자들의 노예이기도 했고, 도망자, 방랑자, 누군가의 피를 훔치는 괴물이자 도둑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이런 존재를 흡혈귀, 또는 뱀파이어라고 불렀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헤마'라고 칭했다. 낮의 헤마인 영소는 유달리 예민한 청각 때문에 인간이 내는 모든 소음이 괴롭다. 웬만한 소리는 철분제를 먹으면 볼륨을 낮춘 오디오처럼 아주 잘게 들리게 되었다. 철분제가 헤마의 갈증과 공격성을 달래 주면서 청각의 예민함까지 누그러지게 돕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채기만은 예외였다. 안트로(인간)과 섞여 사는 한 재채기를 완벽히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게 더 문제였다. 


영소가 열여덟 소년 은수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도 라이브 공연장에서 예고 없이 터져나온 재채기 덕분이었다. 스캣에서 공연을 즐기기 위해 음료 한 잔을 주문하고 앉아 태인의 부드럽고 깊은 목소리를 듣던 중이었다. 유난히 무대를 뚱하게 응시하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는데, 짧은 머리에 후드 티셔츠 차림으로 이런데 음악을 즐기러 찾아올 타입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풍겨 온 희미한 후추 냄새에 누군가 재채기를 터뜨렸고, 동시에 날카로운 통증이 영소의 귀를 관통한다. 반사적으로 소음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바로 그 애였던 것이다. 은수는 유일한 혈육이었던 할머니를 여의고 완전히 혼자가 되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고 있는 학교 밖 청소년이다. 두 사람은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조금씩 가까워진다.

 



"영소라는 이름을 얻기 전에 나는 100년이 넘도록 이름을 불린 일이 없었어요. 원래 나를 알았던 안트로는 모두 세상을 떠났고, 머무는 데 없이 혼자 떠돌아다니다 보면...... 사실 이름 같은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게 되잖아요?"

키엔이었던 나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 주는 누군가 존재한다는 건, 나에게 기적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p.260


닷새 전 아르헨티나 한 지역에 운석이 추락했다. 직경 20미터 크기의 소행성이 지구 대기권에서 폭발하며 운석우로 쏟아진 것이었다. 다행히 추락 지점은 작은 시골 마을로, 숲이 일부 불탔으나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사건이었기에,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비현실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얼마 뒤, 영소와 은수가 살고 있는 운경시 일대에도 운석우가 쏟아지며 도시 전체가 잿빛 어둠에 잠기게 된다. 운석 하나가 운경시 상공에서 폭발했고, 그때 생긴 충격파가 엄청나게 커서 건물도 뭄너지고, 나무 같은 건 다 타 버린다. 재와 먼지로 인해 낮인데도 사방이 캄캄했다. 바깥은 거대한 후추통과도 같았고, 하늘에 재가 걷힐 때까지는 일주일은 더 걸리는 상황이라 다들 대피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하늘은 캄캄하고 혼탁했다. 태양이 사라진 아수라장 속에서 영소와 은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손을 맞잡는다. 


우리 일상은 생각보다 수많은 소음들로 가득 차 있다. 나도 소리에 예민한 편이라 시끄러운 걸 잘 견디지 못하는데, 음악만큼은 예외다. 그래서인지 극중 영소에 대한 설정이 너무도 공감이 되었다. 이 작품은 이러한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해 타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경청'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해준다. 영소와 은수의 특별한 우정은 다정한 선의와 경청이 만들어 낸 것이니 말이다. 이 박자에 참견하고 저 박자에 끼어들고, 도움은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기어코 웃는 얼굴을 들이밀고, 때로는 기다린 적 없는 노크처럼 요란하고 시끄러운. 어쩌면 그것이 '내가 여기에 있다고 알려 주는 신호이기도 할 것이다. 혹은 나를 도와 달라고, 아니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말이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재채기 소리처럼. 타인의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 어떻게 한 사람을 구하는지 보여 주는 이 작품을 통해 세상과 관계 맺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좋을 것 같다. 운석우로 무너진 도시를 배경으로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작품이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야기였다. 연여름 작가의 첫 청소년 소설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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