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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에두아르 르베 지음, 정영문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여름비를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의 실패는 나 자신의 실패보다도 더 슬프다. 나는 적들의 실패에 기뻐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바보 같은 선물을 주는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선물은 적절한 것이 아니면 내가 주는 사람일 때도 받는 사람일 때도 어색한데, 적절한 것인 경우가 드물다. 사랑은 내게 큰 기쁨을 주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앗아간다. p.16
에두아르 르베의 대표작 <자화상>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10년 만에 재출간되었다. 책의 만듦새를 그대로 담은 필사 노트도 너무 예쁘다. '극도로 절제된 글을 쓰는 작가', '비움으로써 본질을 드러내는 사진가', '마지막 원고를 넘기고 열흘 뒤 생을 달리한' 작가라는 점때문에 굉장히 궁금했었다. 절판본이 매우 고가로 거래되고 있었기에 재출간이 되었다는 소식이 정말 반가웠다. 특히나 표지가 굉장히 아름답다. 점묘화로 표현된 표지 이미지가 이 작품의 글쓰기 방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 책은 끊임없는 문장들의 나열로 이루어져있는데, 문단 구분이 없고, 쉼표로 연속적으로 이어지거나, 마침표 하나로 끊기는 방식이다. 무수한 문장들이 모여 평면처럼 보이는 입체가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의 문장과 그 다음 문장에 아무런 논리적 연결 고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잊어버린다, 나는 누군가를 죽인 누군가와 그 사실을 모르는 채로 얘기를 했을 수도 있다. 나는 막다른 길들을 바라볼 것이다.'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문장들이 계속 이어진다. 한마디로 왜?가 없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유는? 나는 내게 무엇이 부족한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끝보다 시작을 좋아한다. 왜? 불특정한 과거와 글을 쓰고 있는 현재가 무작위로 이어지는 평면의 문장들이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입체가 되는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다소 얇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어려운 문장은 하나도 없는데, 지독하게 가독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자꾸만 다시 읽고 싶게 만든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모른다. 나는 기념물보다는 유적을 좋아한다.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서 차분하다. 나는 송년회에 별 반감이 없다. 내가 언제 죽든 열다섯 살은 내 인생의 중간이다. 나는 삶 후의 삶은 있지만 죽음 후의 죽음은 없다고 믿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지 묻지 않는다. 내가 거짓 없이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잇는 건 오직 한 번뿐이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이미 지나갔을 수도 있다. p.143
'나는 자살 시도를 한 번 했고, 자살 시도 유혹을 네 번 느꼈다.'는 문장 뒤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여름에 멀리서 들려오는, 잔디 깎는 기계 소리는 행복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이다. 인과관계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중요한 문장과 가벼운 문장의 구분 또한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다 또 어느 페이지에서는 자신의 독서 편련에 대해 몇 페이지에 걸쳐 이야기를 한다. 읽은 것을 다시 읽고, 끝까지 읽지 못한 것이 읽은 것만큼이나 많고, 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것이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며, 오후보다 아침과 저녁에 더 많이 읽고, 안경 없이 읽으며, 5분 후에 제대로 읽기 시작한다는 등 독서 습관과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문장들이 이어진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수영하기 좋은 곳과 전시장에서 있었던 일과 사랑 편력에 대해서 말한다. 그야말로 삶의 무작위성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작품이었다.
에두아르 르베는 “내 삶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연히 그 어떤 자세한 설명도 한 인간의 삶을 온전히 보여주기란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감정과 인과관계를 배제한 채 무작위로 나열한 문장들이 한 인간의 초상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누구나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이 파편화된 문장들의 모음이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자서전인지도 알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무수하게 많은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들을 읽으며 나 자신은 어떤지 돌아보게 만드는 이상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그야말로 제목 그대로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이자, 책을 읽는 이의 '자화상'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요절한 천재 작가가 그려낸 한 인간의 초상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