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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족사를 추적하는 일은 내게 삶의 목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다시 알아가는 수단이 되었다. 동시에, 가능성의 빛이 차츰 줄고 있었던 뉴욕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어주기도 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에서, 명성은 높지만 보수는 형편없는 직장에 다니면서 또 한 번 연애에 실패하고, 회의감에 빠져 다시 나 자신을 찾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안정적으로 함께 가정을 꾸릴 사람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그런 안정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상태였다. p.56
사람들은 다양한 제각각의 이유로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멀리 타국으로 떠나 다시 삶을 살아내는 것인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고, 그것은 이민자들의 2세대에게 더 크게 와 닿을 것이다. 자신이 속해 있던 곳에 대한 상실감, 잘 알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할 수 없는 단절감이 자라오는 내내 뿌리깊게 박혀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것은 늘 이민자의 몫이었다. 디아스포라 문학이 발전해 온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마거릿 주혜 리는 ‘너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에서 시작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파헤쳐보기로 마음먹는다. 부모님이 태어난 나라에 가서 한국전쟁 중에 할머니가 불태워버린 경찰 기록과 신문 기록을 찾아내고, 잃어버린 역사를 추적한 과정으로 책으로 쓴다. 문학 편집자이자 기자로 활동했던 이력을 토대로 탐사 보도, 구술사, 기록 조사, 가족 구성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장면 재현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20세기 한국 역사 속 가족사를 담아냈다. 저자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자신만 다르게 생겼고, 먹는 음식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넌 어디 출신이야?" 라고들 물었고, "휴스턴"이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다시 묻는다. "아니, 진짜로 어디서 왔냐니까?" 열 살이 되어 부모님이 태어난 나라에 갔었지만, 그 나라도 역시 편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조금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정작 말을 하는 것은 짤막한 구절로만 아기처럼 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2000년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는 이 탐색을 시작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잊힌 가족의 과거와 대면하는 것이 미래로 길을 내는 데, 그리고 내 아이를 갖는 데 꼭 필요한 단계였음을 깨닫는다.
마침내 집에 온 기분이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베이 에어리어는 아이와 함께 있는데도 여전히 거쳐 가는 곳으로 느껴지고, 한국은 좀 더 익숙하지만 그래도 외국이다. 나에게 집이란 장소가 아니다. 존재의 상태다. p.380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수차례 항일 시위를 조직했었던 독립운동가였다. 저자는 수년 동안 공부해 부모님의 언어를 어느 정도 읽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제국주의 일본의 통치에 저항한 십대 공산주의 혁명가라고 기록된 할아버지의 삶을, 잃어버린 가족의 역사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잊힌 할아버지의 생애는 일제강점기와 제2차 세계대전, 분단, 미군정, 한국전쟁, 재건, 군사독재를 거쳐 세기말에 민주주의와 번영을 이루기까지 격동으로 가득 찼던 20세기 한국사와 얽혀 있었다. 그렇게 가족사를 추적하는 일은 삶의 목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다시 알아가는 수단이 된다. 저자는 편집자 생활을 그만두고 근대 한국사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서 일제강점기 조선 관련 정보를 찾아보며 거의 알지 못했던 미국 이민 이전의 삶에 관해 아버지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진다.
직업적 야망은 제쳐두고, 가족의 비밀을 풀어 내면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될까? 대체 왜 과거로 향하는 이 여정에 뛰어든 것인지, 저자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그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할머니와의 세 번째 인터뷰 전에 저자는 알게 된다. 왜 할머니가 남편의 신념이 담긴 물적 증거를 파기한 것인지. 전쟁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과 자식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말이다. 잊혀진 한 사람의 삶을 복원해내는 과정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분단 이후를 통과하며 감춰온 기억과 비밀 속에 담긴 역사를 보여준다. 개인의 가족사이자 대한민국 현대사를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이 책의 특별한 점이 있다. 정지아 작가의 말처럼 역사와 동떨어진 개인은 없으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