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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우습게 봤겠지만
베라 쿠리안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복수란 차갑게 냈을 때 가장 맛있는 요리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요리가 테이블 바로 옆 카트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는 마지막 순간에 기다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윌이 내 손아귀에 완전히 붙들려 몸부림치기를 바랐다. 복수가 완벽하기를 바랐다. 기다려야 한다. p.50
스물두 건의 살인 혐의를 인정해 사형 판결을 받은 연쇄살인범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심리학자가 있다. 온 국민이 그에게 사형을 처하라고 소리를 질러대던 때에 "그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괴물이 아닙니다. 저는 그가 죽어도 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며 연쇄살인범을 변호한 것이다. 와이먼 박사는 사이코패스가 반사회적인인격장애보다 '나쁜'게 아니라 '다른'거라고 생각했다. 사이코패스가 고전적인 의미의 '성격장애'라고 믿지 않았으며, 사이코패스가 조현병 같은, 생물학적 근거가 있는 다른 질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구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어렸을 때 발견하면, 결코 범죄의 길로 빠지지 않는다는 게 와이먼 박사의 주장이었다. 사이코패스의 사회화 가능성을 믿는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대학에서 '다기법 사이코패스 패널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지난 30년간 워싱턴 경찰의 자문으로 있었던 것이 사이코패스 패널 연구를 진행하도록 허가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몇몇은 프로그램을 거쳐 사회의 생산적 구성원이 되었고, 현재 연구 대상은 신입생과 재학생 일곱 명으로 이들의 신원은 철저히 보호된다.
그런데 어느 날, 프로그램 참여자 한 명이 누군가에게 살해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칼에 찔린 채 쓰러진 그를 발견한 것은 또 다른 프로그램 참여자였다. 그리고 몇 주 뒤 다른 참여자가 산탄을 삼킨 채 MRI 기계에 들어가 금속이 온몸을 찢고 나온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이 몇 주 만에 두 명이나 살해당한 것이다. 사이코패스 한 명은 우연일지 모르지만, 두 명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캠퍼스에 사이코패스 일곱 명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소수밖에 없다면, 용의자 명단은 그리 길지 않다. 학생들은 자신이 다음 타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용의자를 직접 찾아 나서기 시작하는데, 과연 누가 이런 일을 벌이고 다니는 것일까.

"너 설마...... 뭔가 하려는 건 아니지?" 윌이 물었다.
클로이가 거리 모퉁이를 돌아 떠나려는 순간 찰스가 팔을 뻗어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 "클로이...... 오랫동안 원했던 뭔가를 얻으면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보통은 그렇게 되지 않더라."
클로이가 한숨을 쉬었다. "너한테 인간관계에 관해 조언할 시간은 없어, 찰스." p.383
한편, 와이먼 박사의 연구실에서 진행하는 사이코패스 연구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클로이는 누군가를 죽일 계획이다. 6년 전, 열두 살 때 자신을 강간했던 윌 바크먼이 다니는 존 애덤스 대학에 들어오기 위해서 연구에 참여하기로 했던 것이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는 것은 8월 24일이었고, 클로이가 윌을 죽이기로 신중하게 계획한 날은 10월 23일이었다. 그냘 대규모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고, 경찰이 시위대와의 사소한 충돌로 여유가 없고, 도시가 아수라장이 될 것이기에 윌을 죽이기엔 완벽한 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클로이는 대학에 입한한 후 윌의 주변 사람들을 포섭하고, 그와 가까워지는 등 순조롭게 살인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러다 돌연 캠퍼스에서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곧 저지를 살인까지 연쇄살인범이 한 일로 된다면 오히려 좋겠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누군가 자신을 뒤쫒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윌의 집에 숨어 들었다가 그 사람과 칼싸움을 하면서 죽을 뻔한 경험을 하게 되자, 클로이는 연쇄살인범을 찾아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과연 클로이는 연쇄살인의 진상을 파헤치고, 자신의 복수를 성공시킬 수 있을까.

이 작품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베라 쿠리안의 첫 작품이다. 베라 쿠리안은 이 작품으로 에드거상 최우수 데뷔 장편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일단 시작부터 자신의 살인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이코패스의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당황스러웠는데, 클로이의 일인칭 시점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의 3인칭 시점으로도 교차 진행되기 때문에 금방 서사에 몰입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들은 일반적인 의미의 사이코패스와는 조금 달랐다. 우리는 ‘사이코패스’ 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살인자들, 성폭력범들, 연쇄살인범들만 떠올리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평범해서 정상적인 사람들과 문제없이 지내는 사이코패스들이 실제로는 더 많다고 한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연쇄살인범들은 실패한 사이코패스이고 반면 사악한 기업인이나 파렴치한 정치인 등은 성공한 사이코패스라고 말이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도 있을 평범한 얼굴을 한 사이코패스들의 이야기라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도 많은 작품이었다.
자신을 강간했던 남자를 죽이려는 사이코패스와 사이코패스들을 죽이고 다니는 연쇄살인범이라는 팽팽한 대립구도로 완성된 서사부터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이기도 했다. 그 속에 사이코패스의 사회화 가능성을 믿는 심리학자의 연구 프로젝트까지 더해지니, 복수극과 심리 스릴러로서의 매력도 탁월했다. 이런 작품이 데뷔작이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작품 이후에 발표한 두 번째 작품 <어둠을 지나 한 걸음>도 호평을 받았다고 하니, 곧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