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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한다 말하기엔 조금 숨이 차지만 - 러닝 앤솔러지
김연수 외 지음 / 판미동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원하지 않는 인생에 갇혀 억지 연기를 하며 그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는 남다른 체력과 정신력이 요구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면, 다르게 살았더라면, 20대로 돌아간다면,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저랬다면 등등의 백만 가지 가정과 후회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주기적으로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달리기는 그저 산삼이고 명약이다. 심리 상담과 정신과 약물 치료와 친구와의 사교와 일에서의 성취도 못 해 주는 일을 30분가량의 달리기는 간단하고 즉각적으로 해준다. 바로 ‘다 괜찮다’는 감각으로 스스로를 빙 두르는 것. - 노지양, ‘Middle'중에서, p.54~55
달리기는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아무런 준비 없이도 시작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지속적으로 하기는 쉽지 않다. 지면을 박차는 느낌, 이마를 스치는 바람, 나만의 리듬과 호흡으로 기분 좋게 시작하지만, 곧 종아리는 불에 덴 것처럼 무겁고, 심장이 너무 뛰는 바람에 숨 쉬기조차 힘들어 진다. 형편없는 달리기 실력은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잘하지도 못하는 걸 나는 왜 하려는 걸까 자괴감이 든다. 그래서 매일 달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며칠 달려 보면 싫어지는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 이건 달리기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떤 일을 해야할 때 그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 삶의 방식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 작가는 말한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므로, 못하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일을 매일 하다 보면, 점점 더 잘하게 돼 결국 평생 할 수 있게 된다고. 그래서 자신이 글쓰기와 달리기를 지금까지 계속 해올 수 있었다고 말이다. 김연수 작가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30년 넘게 달려 온 베테랑 러너이기도 하다. 일산 호수공원 근처에서 살아온 것이 20년이 넘었는데, 살아오면서 마음이 불안한 시기마다 호수공원을 찾아가곤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걷기만 했다가, 달려 보겠다고 마음먹은 건 20대 후반, 두 번째 장편소설을 쓰느라 애를 먹던 시기였다. 소설을 쓰기 위해 다니던 잡지사도 그만두고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글쓰기가 잘 되지 않아 당황하던 시기였다. 눈앞이 캄캄해진 어느 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절망감이 밀려왔고, 달리기를 하자고 생각했다고. 그렇게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날의 자신을 한없이 칭찬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참 잘했어. 그게 너를 구한 거야. 이렇게 달리기는 누군가의 삶을 구원해주기도 한다.

여기서부터는 나의 본능이 작동한 방식, 나의 달리기에 관한 이론이다. (이 단어를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속도가 빨라질수록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흐른다. 외부의 기구나 동력 없이 나의 힘으로 내 몸의 속도를 더 빠르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바로 달리기다. 이때 달리는 사람의 시간은 아주 미세하게 느려진다... 달리는 동안 현재는 길어지고 미래는 지연된다. 반면 달리는 동안 과거로부터는 더 빠르게 멀어진다. 시간의 흐름에 거리라는 독립된 변수가 개입했기 때문이다. - 윤이나, ‘달리는 건 도망이지만 도움이 된다’ 중에서, p.124~125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일곱 명의 작가가 ‘러닝’에 관해 다채롭게 풀어낸 에세이 앤솔러지이다. 이 책은 꾸준히 달려 온 작가들에게 각자의 달리기를 표현하는 키워드 하나를 청하고, 그 단어를 실마리 삼아 각자의 달리기에 대해 써 달라고 제안하며 시작되었다. 달리기가 저마다의 고유한 세계를 지탱하는 방식이라면, 일곱 작가들의 다양한 키워드는 그들의 삶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연수 작가의 호수공원, 노지양 번역가의 올드팝, 박은지 시인의 맥주, 윤이나 작가의 부상, 김연덕 시인의 사랑, 김혜나 작가의 속초, 최유안 작가의 핑계까지 각자 다른 키워드를 통해 풀어내는 달리는 작가들의 '내가 달리는 이유'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공감되고 이해가 되었다. 무엇보다 단순히 달리기를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방식 자체가 참 좋았다.
인생은 본래 만만치가 않아서 끊임없이 예상치 못한 전개로 우리를 비틀거리게 한다. 내 인생도 예외가 아니다. 러너로 산다고 항상 인생에 햇살이 비치고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명언이 난무하게 되는 건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구질구질한 인생의 한복판에서 불안과 우울에 맞서고자 고군분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달리기는 정말 추천해주고 싶은 방법이다. 달릴 때 생기는 몰입, 쾌감, 기운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것도 있고, 바깥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되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가능성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힘껏 지면을 디디면서 뇌를 지치게 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각종 공포증과 두려움이 서서히 줄어들기도 한다. 실제로 달리기를 통해 삶이 바뀌고 공황과 불행에서 해방되었다는 사람들도 꽤 많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제대로 뛰어본 적 없었다고 하더라도, 가장 간단하고 원초적인 방법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만으로 인생이 서서히 달라지기도 한다. 가끔은 그저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숨이 차곤 한다. 그러니 러닝을 하든 안 하든, 이 책을 통해 앞으로 달려나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워둔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만의 속도로, 내게도 작은 하늘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