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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끝
김성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수식은 하나인데, 모든 구간의 데이터가 같은 그래프를 따르고 있다. 온도도 습도도 풍속도 그 무엇도, 이 수식 하나로 설명이 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때 다시 등골이 서늘해진다. 책장에 꽂힌 서류철들을 하나씩 옆으로 넘기다가 이 일을 맡기 직전에 했던 과제를 찾아낸다. 날씨와는 전혀 관계없는, 지진 연구소의 지질학 데이터다. 그때 냈던 수식을 칠판의 빈자리에 옮겨 적는다. p.42
야산에 괴물이 나타나고, 태평양 연안을 60미터 높이의 해일이 덮치고, 곳곳에서 테러가 벌어지며, 세상 곳곳에서 사교도들이 창궐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달이 파괴되어 밤하늘에는 산산조각난 달의 파편만 떠 있었고, 사교도의 주술때문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과학자도, 경찰도 이 기괴한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갈수록 세상은 더 흉한 곳이 되어가고 있었고, 누구나 세상이 조만간 끝나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남편 지호가 남긴 수학 공식의 비밀을 쫓는 경찰청 사교도수사과 형사인 수영, 사교도들에게 납치되어 틸링해스트 수학을 계산하도록 강요받는 수학과 교수 지호, 그리고 파괴된 달을 복원하려는 의식을 준비 중인 사교 집단의 교주, 세 인물의 시점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교주는 오늘 아침 드디어 계산을 끝냈다. 틸링해스트 수학은 언젠가부터 시간과 겹치고 얽혀버린 '2차 시간'을 계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계산 결과는 시간이 끝난다는 것이었고, 시공간의 어떤 2차 시간 값으로도 양시간 축 등식의 델타 값이 일치하지 않았다. 시간이 끝난다는 것은 마침내 세상이 멸망한다는 뜻인 걸까. 지호가 가르치던 대학교는 교수들로 이루어진 사교 집단이 발견된 뒤로 폐교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학생들은 대거 휴학을 했고, 지호가 속한 자연대는 아예 학장이 사임하고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직장은 문을 닫았지만, 지호는 자신이 맡은 연구 과제를 집에서라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결과와 마주한다. 수식은 하나인데, 모든 구간의 데이터가 같은 그래프를 따르고 있었던 거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따르는 수식 같은 게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지호는 급하게 대학 연구실로 달려간다. 경찰청 사교도수사과 형사인 수영은 현재 휴직 상태이다. 남편의 작업실 책상에 쌓인 종이들에는 칸마다 숫자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난해한 논문을 번역기로 힘겹게 읽어나가면서 남편의 행적을 뒤쫓고 있다. 과연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세상의 멸망을 목전에 둔 시점에 다른 목적을 지닌 채 같은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세 사람의 서사가 교차로 진행되는데, 과연 그들은 각자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까.

"선생님, 식은땀이..."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부터 온몸이 흥건하게 젖어있다. 가벼운 현기증이 난다.
그리고 방금까지의 계산 결과를 돌이켜본다.
방수연의 아들 신밀철은 여덟 살 생일을 맞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린 삶에는 끝이 오지 않는다.
민철이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그저 영원하다. 시간은 끝나지만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 p.314
전작으로 제11회 SF어워드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하고, 2026년 로커스상에도 노미네이트된 작가 김성일의 신작이다. 이 작품은 우주가 이미 만들어진 4차원 시공간의 거대한 덩어리라는 '블록 우주' 개념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한꺼번에 존재하는 우주라니 쉽게 상상이 되지 않지만, 과거도, 미래도 이미 존재한다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우리의 착각일 뿐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가 알던 직선적 시간 위에 또 다른 차원의 시간 축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시간 뒤에서 과거가 흐르고 있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조차 어딘가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면 말이다. 작가는 “블록 우주는 이를테면 3차원 영화의 프레임이 줄줄이 나열된 필름이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별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의 처지에서 하는 착각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다면, 우리가 선택이라고 믿는 것 또한 자유의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작품의 주요 서사는 '2차 시간'이라는 토대 위에서 흘러간다. 극중 많은 인물들이 풀고자 하는 틸링해스트 수학이 바로 이 2차 시간을 다루는 것이다. 차 시간은 우리가 매 순간 경험하는 시간이지만, 2차 시간은 그 모든 순간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는 차원의 시간이다. 작가는 이 두 겹의 시간을 통해, '자유의지'란 정말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한다. 틸링해스트 수학을 통해서만 시간의 반복을 멈출 수 있고, 혹은 영원히 반복하게 할 수 있다면 한강이 범람하고, 곳곳에서 테러가 벌어지고, 도시마다 괴물이 등장하는 어두운 시절을 끝낼 수 있을까. 수학이 우주의 진실을 끌어와서 세계를 구하고,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힘을 줄 수 있을까. 과연 이들은 이계의 괴물과 기이한 재해가 세상을 덮치는 원인이자 사교도 주술의 원천인 2차 시간을 계산해서 시간이 끝나는 것을 막아낼 수 있을까. 과학과 수학 개념이 복잡하게 등장하지만, 주요 서사는 미스터리 스릴러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자, 새로운 SF 스릴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