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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대연쇄
단요 지음 / 사계절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온전한 세계였으며, 여전히 유하였다. 칼리굴라는 나를 사랑했으며 나는 그럼으로써 모든 것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터였다. 나는 이제야 두 삶이 서로의 영역을 일방적으로 비집고 들어가면서 하나의 세계가 되는 일을 이해했고, 그 전율을 알게 되었다.
나는 착란의 입구에서 기쁜 깨달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 '사랑하는 신의 생일' 중에서, p.95
나는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도중에 오래된 유선 전화기를 발견한다. 유백색 플라스틱 코팅은 세월에 삭았지만, 전화선은 매끄럽고 부드러운 감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추억이 되살아나면서 나를 둘러싼 시간이 뒤로 훌쩍 물러났고, 그러던 와중 벽면의 콘센트가 시야에 들어온다. 전화를 걸진 못하겠지만, 한번 연결해 볼까 하는 생각으로 플러그를 꽂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소리가 되돌아온다. "오늘은 짐이 황위에 오른 해의 열째 달 셋째 날이다....."로 시작하는 사무적인 듯하면서도 오만함이 묻어나는, 남자 목소리였다. 자신이 누구라고 이름을 밝혔으므로, 검색해봤더니 로마제국의 세 번째 황제이자 사 년 만에 암살당한 폭군, 칼리굴라의 본명이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인 나에게, 서기 41년도의 로마제국 황제라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이벤트성 자동응답기 기능이 아닐까 생각한 나는 수화기를 들어 칼리굴라에게 그가 앞으로 겪게 될 역사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런저런 현재의 이야기들도 들려주며 매일같이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안녕, 칼리굴라. 내 이름은 유하지만 기억할 필요는 없어. 네가 기억해야 하는 것만 짧게 말해줄게...." 로마에 열병이 돌고, 여동생이 죽고, 더 많은 사람이 너를 죽이려 할거라고 나는 칼리굴라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그리고 위키피디아 문서에는 한 문단짜리 이런 문구가 생긴다. '가이우스는 자신이 신의 전령이라는 망상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당시 로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신인 유하를 만들어내는데 이르렀다.....' 유하는 나였다. 자동응답기를 만나기 전에는, 로마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름. 나는 수신인이 없을 거라고, 건너편에 장본인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말을 건네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과연 유하의 이야기로 로마제국의 역사는 바뀌게 된 것일까.

그건 내 나쁜 습관이었다. 득점과 실점을 천칭에 올려놓고 승부를 시작해야 할 상황에, 일부러 한 발짝 물러남으로써 패배를 확정 짓는 것 말이다. 수도권 부동산이 침체기에 접어든다면 강원도 부동산은 처참한 꼴이 나겠지만 강원도 부동산의 상승률은 수도권에 영 못미친다. 요컨대 나는 하이리스크와 로우리턴의 가능성을 두려워하느라 그 둘을 동시에 확정하고 마는 인간이었고, 그래서 종종 속이 쓰렸다. 십 년 뒤의 나는 그때 안양 아파트를 샀어야 했다며 가슴을 치고 있겠지. - '존재의 대연쇄' 중에서, p.189~190
다문화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실적인 이야기부터 종교와 철학적 사유가 버무려진 판타지까지, 청소년문학과 스릴러, SF소설을 넘나들며 부지런히 작품 세계를 넓혀가고 있는 단요 작가의 신작이다. 이렇게나 폭넓은 상상력으로, 이야기로서의 재미도 놓치지 않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다니 놀랍다는 마음으로 매번 작품을 읽게 되는 것 같다. 그만큼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 왔는데, 이번 신작은 6편의 작품을 수록한 SF 소설집이다. 컴퓨터과학, 신학, 중세철학을 소재로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오래된 유선전화기를 통해 로마제국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교통사고를 당한 딸을 살려내고자 인공 척추를 사용한 임상시험을 시도한 부모가 있으며, 감전 사고로 신의 계시를 받았다 주장하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세상에 낮과 밤이 생긴 기원이 기린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와 투시 능력자들, 예언자와 마술사들이 사실은 눈으로 온도를 식별하는 사람들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명확히 보이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 너머'를 바라보는 이야기들이기에 수월하게 읽히진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매혹적인 서사와 독보적인 상상력을 빚어낸 이야기임에는 분명하다. 게다가 읽는 내내 너무 재미있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했을까, 감탄하며 읽게 되기 때문이다. 매번 단요 작가의 신작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도사려' 있는, 곧 만나게 될 새로운 감각의 미래 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