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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마거릿 애트우드 외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유령 얘기였네요." 대로우가 말했다.
기억상실증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이건 연결에 관한 이야기예요. 우린 서로 분리된 존재라고 착각하며 살지만 밑바닥에서 우린 형이상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나한테는 너무 심오하네." 비니거가 말했다. "난 대부분 사람과 연결되고 싶지 않거든요. 우리 아이들인 샬럿과 로비면 돼요. 그것도 가끔요." p.155~156
이야기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6층짜리 허름하기 그지없는 다세대 주택 건물에서 시작된다. 건물 관리인인 '나'는 몇 주 전 코로나로 도시가 폐쇄될 무렵 일자리를 구해,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치매 요양 시설에 들어간 아버지와는 통화 연결이 되지 않은 지 오래였고, 나는 쓰러져가는 건물 지하실 아파트에서 온갖 이상한 잡동사니와 전혀 알지 못하는 여러 세입자와 함께 갇혀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임자가 남긴 옥상 열쇠와 세입자 정보가 적힌 노트 한 권을 발견하게 된다. 무작위로 흩어진 타인들의 삶의 파편들을 보며 나는 그것에 매료된다. 옥상 문을 연 뒤로 세입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고, 나는 그들을 관찰하며 사람들 몰래 그들의 이야기를 수집한다. 뉴욕 전체가 봉쇄되고, 매일 수백 명이 사망했던 지옥의 한복판에서 그렇게 잠시나마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장르도, 주제도 제한이 없는 이야기의 항연은 그들을 어디로 데려가게 될까.
각각 세입자들의 별명과 특징을 기록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6B호, 이 여자는 탱고, 타인의 삶 속에서 춤춘다.. 5E호, 기억상실증, 망각에 대한 보편적 욕망을 지니고 있다.. 3E호, 검은 수염, 피가 흐르는 전쟁의 보랏빛 유언장을 열기 위해 온 자, 4E호, 여왕, 그녀를 왕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녀는 여전히 자기 슬픔이 여왕이다.. 4A호, 랄라, 검은 무한함을 닮은 눈을 가졌다.. 2E호, 프로스페로, NYU 교수로 '비밀스러운 학문에 몰두' 하고 있다.. 3A호, 월리, 눈물이 음표가 되는 사람... 4B호, 시인, 영혼 위에 그라피티를 쓰는 사람... 등 세입자들에 대한 묘사들이 하나하나 모두 시적이다. 이들의 성격과 외양에 대한 묘사가 이후에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지켜보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었다. 각자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점도 이 두툼한 책을 지루할 틈없게 만들어 준다. 극중 건물 관리인인 '나'가 세입자들과는 거의 모르는 사이에서 시작해 그들에게 딱히 관심을 두거나 할 의도가 없었음에도, 이야기를 들으며 일부 세입자들을 거의 좋아하게 되었다는 점도 이야기가 가진 힘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순간 창백한 연녹색 여인이 나나 다른 사람들처럼 분명히 그곳에 있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그녀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옥상 구석은 모두 어둡고 안개가 낀 것 같았으니, 어쩌면 그림자 속에 섞여 사라진 것인지도 몰랐다. 우리를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 여자가 진짜 있었나? 누군가 옛날 핼러윈 복장을 차려입고 우리 모임에 끼어들었던 걸까? 우리가 술에 잔뜩 취한 점을 이용해 그냥 웃자고 장난친 건가?
아니면 혹시...... 절대 그럴 리가 없다. p.382
이 작품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설계로 실현된 대형 문학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테스 게리첸, 존 그리샴, 에리카 종, 설레스트 잉 등 서른 여성 명의 소설과 논픽션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함께 이야기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첫째 날부터 시작해 열넷째 날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각각 누가 썼는지 표시되어 있지 않아 더 흥미로웠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책 뒤쪽에 수록된 목록을 찾아보며 내가 예상한 작가가 맞는지 확인하는 재미도 있다. 서평단으로 이 책을 읽으며 각자 파트를 정해주고, 작가가 누구인지 상상해보는 미션이 있었는데, 나에게 주어진 파트는 '넷째 날'이었다. 아기를 입양하려 애쓰는 한 커플의 이야기, 크리스마스를 둘러싼 가족의 이야기, 환자가 죽는 걸 미리 알아차리는 간호사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었다. 엠마 도노휴와 존 그리샴은 맞히지 못했지만, 테스 게리첸의 작품은 예상 적중이었는데, 아무래도 전직 의사였던 작가인데다 메디컬 서스펜스 장르를 많이 써왔기에 익숙한 느낌이 있었던 것 같다. 다들 이 작품을 읽게 된다면 작가를 모르는 채로 쭉 읽어 나가면서 누가 이 글을 썼을지 상상하며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피렌체 사람들 절반이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사이 도시를 벗어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내용의 <데카메론>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우리 모두 실제 팬데믹의 시간을 겪었기에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데카메론 프로젝트>라는 작품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뉴욕타임스》의 편집자들은 700여 년 전 《데카메론》이 공포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처럼,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집필한 단편소설들을 한데 모으는 기획했고, 그렇게 29편의 단편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했었다. 이 작품은 팬데믹이 한참 진행중이던 시기에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로부터 몇 년 후 팬데믹이 모두 종료되고 나서 읽은 <14일>이라는 작품은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아마 그 시기의 기억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이제는 그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서 조금 더 거리를 두고 서사를 즐길 수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자, 서른 여섯 명의 목소리로 완성된 거대한 문학적 사건이자 단 한 권의 서사, 유례없이 독특한 경험을 하게 해 주는 이 놀라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