랠리
박민경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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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 아이는 다 들으라는 듯 떠들어댔다. 그건 그 아이 말대로라면 흉터였다, 훈장이 아니라.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다른반 아이들까지 그 아이의 흉터를 보러 와서는 얼굴을 찡그리고는 신나라를 힐끔거렸다. 아무도 신나라의 상처는 보지 못하는 듯했다. 다르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오해받기 쉬운 것, 그리고 적을 만들기 쉬운 것이라는 사실을 신나라는 깨달았다. 어째선지 아주 중요한 생의 비밀을 알아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즐거운 나라' 중에서, p.49


과거와 완전히 같은 미래를 과연 미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예상 가능한 일들뿐 아니라 예상 밖의 일조차 익숙한 방식으로 지나가는 하루가 매일 반복되고 있다면 말이다. 삼십대 중반이 된 희원은 마음의 여유도, 체력도 바닥까지 끌어다쓰고 집에 돌아오면 뻗기 일쑤였는데도, 늘 가진 것 이상으로 애쓰고 무리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왔다. 남은 것은 치질과 생리불순, 거북목과 복부비만, 파탄난 인간관계뿐이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온 어느 날, 만원 출근길 지하철에서 오른쪽 팔꿈치 아래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발견한다. '입자성 해리' 생소한 병명의 그것은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뇌가 신체를 무기물로 인지하는 증상이라고 한다. 희원의 경우는 모래였다. 몸이 모래가 되어 부서진다고 느끼는 증상조차 적응이 될 무렵, 희원은 전 연인과 탁구를 하며 끊임없이 랠리를 이어가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표제작의 제목이기도 한 '랠리'는 탁구나 테니스, 배드민턴 등에서 양편의 타구가 계속 이어지는 일을 뜻한다. 똑, 딱, 똑, 딱, 서로 주고 받고 오가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작을 하다 보면 랠리를 하는 동안에는 세상에 오직 나와 상대만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집중이 흐트러지면 한순간 끊어지고 마는 것이 랠리이므로, 호흡과 박자와 타이밍이 맞아야 가능하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도 한쪽의 일방적인 이끌림이 아니라 핑퐁핑퐁 주고받아야 더 재미가 있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도,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앞에, 맞은 편에 상대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최선을 다해 주고받아야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삶이다. 이 책 속에 수록된 여러 편의 이야기들 또한 타자와 무언가 주고받으면서 더 나은 삶을, 보다 나은 내일을 함께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플레이어로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롤은 탁구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점이자 서글픈 점이었다... 희원은 주현과 주고받았던,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랠리를 떠올렸다. 끝없이 팽창되던 그 기분. 내가 보내면 저쪽에서 반드시 받아낼 거라는, 서로를 향한 믿음. 호흡, 박자, 타이밍이 서로를 통과하여 하나의 기관처럼 움직이던 감각. 두 사람은 같은 리듬 안에 있었다. 희원은 그게 좋았다. 누군가와 이렇게 같은 흐름 안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이.              - '랠리' 중에서, p.92


태어날 때부터 오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우량아였던 신나라는 무서운 기세로 자라, 네 살 때 이미 웬만한 초등학생의 발육을 가볍게 웃도는 수준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엔 중학생처럼 보였고, 남다른 발육 덕분에 늘 아이들의 놀림을 받아야 했다. 그녀의 부모는 태평하리만큼 낙관적이었고, 다름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머리가 나쁜 거라고. 가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그대로 믿었던 신나라는 가능하면 우아하게 시련을 넘기고 싶었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마음먹은 대로 살기란 쉽지 않았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정체불명의 괴력을 가진 소녀 문정이 등장한다. 강함은 모두가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라 남자애들 사이에만 전유되는 무엇이었기에, 문정은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다. 덕분에 지독하게 외로웠고, 스스로가 모든 면에서 어긋난 것처럼 느꼈다. 여성이 좀처럼 지닐 수 없다고 여겨지는 강인한 신체와 초인적인 힘을 소재로 한 독특하지만 인상깊은 이야기들이었다. 


박민경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수록된 아홉 편의 작품들이 고르게 다 좋기도 참 쉽지 않은데,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인 문장도, 호흡도, 인물들이 모두 공감되고, 이해되어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었다. 박민경의 인물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스스로가 필요하지 않다는 감각, 더는 효용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경계한다. 이는 시시각각 위협해오는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방책이기도 하다. 작가는 '소설을 쓴다는 건 결국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일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책을 읽는 동안 딱 그런 기분이 들었다. "닿았다 드디어. 찾았다 최애하고 싶은 작가." 이런 마음이랄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좋은 일이 남아 있을 거라는 낙관'과 '내가 보내면 저쪽에서 반드시 받아낼 거라는 믿음', '선명하게 느껴지는 살아 있다는 감각'이 공존하는 이 특별한 이야기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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