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메아리처럼
앤절라 미영 허 지음, 임슬애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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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머니랑 언니 없이 나 스스로 알아낸 사실이지. 패턴을 살펴보고는 몇 세대 전에 기록된 나의 운명을 읽어 냈지. 너랑 나, 우리는 삶이 흔해 빠진 옛날이야기로 전락해 버린 여자들의 후손이야. 우리는 메아리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반복하고 그들의 삶을 살지만, 그 위대함은 닮지 못해. 어리석은 비극만 반복할 뿐이야. 우리는 그들의 삶에서 그것밖에 기억하지 못하니까.            p.95


여섯 달 내내 해가 지지 않는 백야가 이어지고 있는 남극와 과학 기지, 입자 물리학자 엘사는 40시간 동안 잠을 못 자고 있었다. 불면으로 인해 신경이 잔뜩 곤두서고 불안한 상태였다. 엘사는 박사 후 과정 중인 물리학자로 이번에 벌써 세 번째 남극행이었다. 이곳에서 엘사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구성 요소인 중성 미자를 관측하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녀에겐 과학이 일종의 생존 수단이었다. 과학은 어머니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기 때문에, 자신이 어머니를 거부하고 어머니의 거짓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부모님은 한국에서 이민했고,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이민자로 자라왔다. 어머니가 들려주는 한국 설화 속 여자들의 비극과 집안의 저주로부터 벗어나려고, 그것과 가장 멀리 있는 과학 속 합리와 실증 속에서 살아가기로 한 거였다. 


엘사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그곳에서 자신처럼 빨간 옷을 입고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한다. 함께 일하게 된 몽골 출신의 대학원생 사샤였다. 그런데 엘사는 그 여자에게 친밀감과 거리감을 동시에 느끼며, 마치 전생이나 후생에서 만났던 것 같은 어떤 익숙함으로 불안한 감정이 들기 시작한다. 이해할 수 없는 불안함은 오랜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로 인한 것일까. 아니면 샤사가 오래 전 어떤 인연으로 만났던 사람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일까. 엘사는 사샤가 운전하는 설상차를 타고 이동하며 생각한다. 사샤는 잊힌 과거에서 온 신비로운 인물이 아니라 그저 지금 내곁에 있는 아름다운 몽골 여성이라는 현실이라고. 눈과 바람으로 인한 화이트아웃 현상으로 사위가 새하얗기만 해서 앞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빙판에 균열이 생기듯 떠오른 기억으로 인해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마냥 도망칠 수는 없음을 깨닫게 된다. 




「무섭지만 좋아하는 거잖아요?」

내가 물리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를 인간으로, 시시하면서도 기적적인 존재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거대한 세상에서 우리 어머니의 불행은 미미하다. 역사가는 개개인의 생애를 넘어 문명과 시대의 탄생, 죽음을 고민하고, 물리학자들은 우주적 규모의 시간을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은하계에서 온 별 부스러기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의 죽은 몸 한 조각은 부패하여 헬륨이 되고 다시 우주를 가로질러 여행할 것이다. 감사한 마음이다. 경이롭다.               p.428~429


엘사의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 여자들은 하나같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며 파멸했다. "우리는 삶이 흔해 빠진 옛날이야기로 전락해 버린 여자들의 후손이야. 우리는 메아리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반복하고 그들의 삶을 살지만, 그 위대함은 닮지 못해. 어리석은 비극만 반복할 뿐이야." 라고 어머니는 말한다. 종을 칠 때 '에밀레, 에밀레' 하는 소리가 아이 울음 소리, 혹은 아이가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해서 에밀레종에는 설화가 있다. 제작 과정에서 스님이 꿈을 꿨는데, 종에 작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했고, 실제로 아이를 청동을 끓이는 쇳물에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물속으로 뛰어든 심청의 이야기와 나무꾼에게 옷을 빼앗겨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못한 선녀의 이야기 등 옛날이야기 속 여자들은 모두 어떤 목적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했다. 


이 작품의 원제는 〈포클론Folklorn〉으로, 가족의 고독, 문화적 증후군, 가족에게 갇힘을 의미한다. 작가는 불합리한 세계로부터 벗어나고자 도망쳐왔음에도 결국 자신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세대가 거듭하면서 되풀이되는 비극을 그리고 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앤절라 미영 허는 어릴 적 듣고 읽은 한국 설화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이 작품에서는 신화와 과학 사이를 오가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앞으로 나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독창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분량이 꽤 많은 편인데다 이민자의 삶과 역사, 인종과 정체성 문제들까지 복합적으로 담겨 있어 수월하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동안 만나온 어떤 여성 서사보다도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이야기였고,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이주자의 삶과 정체성을 그린 디아스포라 문학으로서도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 어디서도 만나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디아스포라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한 우아하고 매혹적인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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