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
김정아 지음 / 샘터사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러시아어는 단어 하나하나가 강세를 가진 언어다. 동시에 읽을 때는 분명한 리듬과 높낮이가 있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 특히 그의 4대 장편은 그 리듬을 일부러 비틀어 놓는다. 읽는 사람이 편하지 않게, 숨이 턱 막히게, 문장을 곧장 삼키지 못하게 만들어 놓는다.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독자조차 읽다 말고 돌아서게 만든다. 그래야 문장을 씹고, 다시 씹고, 결국 생각하게 된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짐작해 본다.             p.22


몇 달 전에 SNS를 휩쓸며 독서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책이 있다.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을 한 권에 담은 책인데, 책의 3면에는 금장을 입혔고 표지에도 24K 금박 문양을 찍어 넣은 2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고급스러운 책이었다. 게다가 한 사람이 10년간 4대 장편을 모두 번역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고 국내에서는 유일무이하다고 해서 더욱 궁금했다. 이번에 만난 책은 바로 그 주인공 도스토옙스키 전문 연구자 김정아 번역가의 10년에 걸친 완역 기록을 담은 에세이이다. 


지난 10년간 러시아 문학과 마주하며 고민해 온 번역가의 고백이자, 한 인간이 도스토옙스키라는 산을 넘으며 겪은 기록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에 뭉클한 기분으로 읽었다. 김정아 번역가는 낮에는 패션 회사 CEO로 일하고, 새벽 시간을 쪼개서 번역을 해왔는데... 출장과 미팅, 그리고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라는 현실도 있었기에, 4대 장편을 완역으로 해보자는 제의를 처음 받았을 때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에너지를 아껴 쓰는 법을 몰라 작은 일에도 온 마음을 다 쏟는 성격이라고 하는데, 결국 4대 장편을 모두 번역하게 된 것은 그러한 성격 덕분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회의, 숫자, 계약, 일정, 판단과 결정이 쉼 없이 이어지는 CEO로서의 삶과 고요해진 집에서 세 아이의 숨소리만 희미하게 들리는 새벽, 도스토옙스키와, 쿤데라와, 카프카와 나란히 앉아 숨을 쉬는 시간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죄와 벌>에서 시작된 죄와 구원의 질문이, <백치>에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지의 문제로, <악령>에서 사상의 광기로, 그리고 마지막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총체적인 고백으로 이어지는 그 감정선과 철학적 발달의 결을 그대로 따라가고 싶었다. 도 선생님의 내면의 흐름과 사유의 발달, 개인적이면서도 시대적인 격랑의 결을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순서대로 차근차근 걸어가다 보니, 가랑비에 온몸이 젖듯 어느 순간 나는 도 선생님의 영혼과 합성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p.296~297


저자는 10년 동안 도 선생님과 매일 새벽을 보내며 그의 문장 안에서 울고, 싸우고, 기도하고,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 더 단단한 마음, 조금 덜 쉽게 판단하는 눈,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습관, 그리고 인간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배웠다. 물론 매일 새벽, 같은 의자에 앉아 몇 시간씩 움직이지 않는 생활은 허리에 조용히 경고를 보냈고, 결국 복대를 두르고 일을 지속해야 했다. 손이 아파 실리콘으로 된 손가락 관절 지지대를 주문해 사용해야 했고, 손목 보호대, 팔꿈치 쿠션 등 점점 장비가 늘어났다. 장편 번역이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허리와 손가락과 수면과 체력을 조금씩 떼어 바치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머리로 시작하지만 결국엔 몸으로 써 내려가야 하는 작업으로서의 번역의 실체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시간이었다.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읽어 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한 입문서로서도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문장부터 배경, 서사, 캐릭터들을 하나씩 짚어 가며 그 이면에 담긴 숨은 의미까지 살필 수 있어 굉장히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각각의 작품을 상징하는 컬러로 풀어낸 장들도 매우 흥미로웠는데, 왜 <죄와 벌>은 초록색이고, <백치>는 흰색, <악령>은 검붉은색,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검정색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은 이 책을 직접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저자는 번역가의 작은 바람으로 "만약 이 책을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아, 도스토옙스키를 한번 읽어 볼까?’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나는 성공한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아마도 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통해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것 같다. 나 역시 그러했고 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문학 세계를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번역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과정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