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하는 남자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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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치정범죄'가 있다. 그리고 나는 질투로 인한 살인으로 의심되는 사건에 불려 나오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내가 질투의 냄새를 맡는다고 말한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질투는 냄새도 색도 소리도 없다. 대신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이야기에서 무엇이 말해지고 무엇이 생략되는지 귀 기울여 들으면서 앞에 앉은 상대가 절박하고 상처 입은 짐승인지 판별한다. 나는 들으면서 안다. 그 짐승이 바로 나 니코스 발리이기 때문에, 상대가 곧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상처 입은 짐승이라서 아는 것이다.              - '질투하는 남자' 중에서, p.57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법률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가해자는 남에게 입힌 피해만큼의 벌을 받아야 한다는 법이다. 누군가 남의 가족을 해쳤다면 피해자가 당한 것과 똑같은 고통을 받아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므로 너도 똑같이 상실감과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마땅하다. 누구에게 벌을 준다는 것은 자신의 척도로 세상을 재단하는 일이다. 하지만 현대의 법체계에서는 누군가에게 사적으로 복수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팬데믹 이후 경제가 파탄 나고 사회와 정치 제도가 무너져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세상이라면 어떨까. 변호사로서 정의와 상식과 인간애를 믿었던 주인공은 가족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정의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고. 그럼에도 그는 가해자를 사적으로 처형하지 않고 재판정에 세우려고 한다. 그렇게 슬프고도 치밀한, 안타깝고도 무시무시한 복수가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쥐섬'이라는 작품이다.




그 외에도 이 책에는 다양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외도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여자, 한 여자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쌍둥이 형제가 벌인 기만극, 규칙을 파괴하는 자를 향한 응징,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쓰레기 수거원의 기억, 완벽한 범행 계획을 세운 남자의 살인 고백, 문학적 진정성과 세계적인 명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아내와 상사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하는 택시 기사, 경쟁자를 처리하기 위해 시간여행을 떠난 남자 등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춰진 본성을 드러내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열두 편의 이야기들은 모두 치밀하게 계획된 플롯과 구조, 복선과 캐릭터를 보여준다. 분량과 상관없이 밀도 높은 이야기들은 왜 요 네스뵈가 북유럽 스릴러의 제왕인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다채로운 장르를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이번 작품의 장점인데, 요 네스뵈의 소설에서 SF적인 요소나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굉장히 흥미로웠다. 언젠가는 추리, 스릴러 장르가 아닌 다른 장르에서도 요 네스뵈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감도 들었고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가난한 사람들을 자주 도와주다가 연쇄 아동 성추행범으로 돌변하는 남자에게 속았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사람들이 실수하거나 속은 게 아니라고 했다. 그 남자의 선한 면이 진심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 것이지, 그가 저지르는 다른 악행을 덮기 위해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한마디로 인간은 선하기만 하지도 악하기만 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브래드도, 그의 아버지도, 나도.              - '쥐섬' 중에서, p.414


요 네스뵈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단편소설집이다. 질투라는 테마로 일곱 편, 권력이라는 테마로 다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요 네스뵈의 작품들은 워낙 벽돌책이 많았는데, 단편소설집도 600페이지를 훌쩍 넘는다. 영어 원서 페이퍼백으로도 500페이지이다.  표제작은 이미 아마존 프라임 영화 〈킬러 히트〉로 만들어졌고, 수록작 중에 한 편은 CWA 대거상 최종 후보였으며, 그 외 두 편도 영화 판권이 팔린 것으로 알고 있다. 스릴러의 거장이 보여주는 각양각색의 세계에 독자들의 사랑만큼이나 여러 분야에서 주목을 받은 것이다. 요 네스뵈가 쓴 단편소설집이라니 너무 궁금해서 원서를 사둔 게 몇 년은 된 것 같은데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두다 결국 변역본이 나오고 나서야 제대로 읽어보게 되었다. '해리 홀레 시리즈'와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줄 것 같아 너무 기대가 되었다. 한 호흡으로 달려가야 하는 장편이라 아니기 때문에 좋은 점은 이 묵직한 페이지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SF, 디스토피아, 누아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장르를 만나볼 수 있어 한 편씩 아껴가며 읽었다. 




요 네스뵈가 창조한 세계는 늘 어둠과 범죄로 점철되어 있지만, 복수도, 배신도, 질투조차도 이상하게 설득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이미 갖고 있었던, 하지만 잠시 잊고 살았던 감각들을 일깨워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인간의 본모습이니까. 우리의 감정이란 원래 그렇게 작동하는 거니깐.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서는 종종 '사랑'이 가장 달콤한 정신병이자 지독한 고문이 되어 버리고, '질투'라는 극단적 주관성과 냉정하고 관찰 가능한 객관성이 동시에 공존하며,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부당성에 대한 복수를 준비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요 네스뵈는 ‘범죄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플롯이 아니라 인물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작품을 여타의 범죄 스릴러와 다르게 만들어 주는 지점이다. 이 책에 수록된 열두 편의 이야기들은 각각 뛰어난 완성도를 가지고 있어 모두 장편소설로 발전시켜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다. SF, 디스토피아, 누아르를 넘나드는 놀라운 이야기의 향연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 혹시 아직 요 네스뵈의 작품을 만나보지 않았다면, 해리 홀레 시리즈가 궁금하지만 시리즈가 길어서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지금이 기회다. <질투하는 남자>로 매혹적인 노르딕 누아르의 세계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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