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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법치의 화신 자베르 경감은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치는 장 발장식 연민의 도덕률을 혐오했다. 그렇게 법치는 괴물이 됐다. 범속한 사상가들이 가진 자들의 불법과 반칙을 비판할 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합법적 규칙이야말로 진짜 괴물이라고 폭로했다. 저항이 불법인 이유는 착취가 합법이기 때문이라고. 힘센 자들의 규칙을, 그들의 법치를 목도하며 이 낡은 19세기 서사들이 생생해지는 요즘이다. 이편도 저편도 아니고, 아래편의 눈으로 보니 그렇다. p.182
우리가 안전한 세상에서 날마다 노동자들이 죽어나간다. 아파트 몇 채를 소유하는 사람이 있지만, 한쪽에선 여전히 기초생활수급자들이 살고 있다. 반찬 투정 혹은 다이어트 등의 이유로 식사를 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녁밥을 챙겨먹지 못한 아이들도 있다. 장애인들은 당연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 하고, 이주노동자들은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매우 좁고 힘든 길을 버텨내야 한다. 특혜를 바라는 게 아니라 차별 없이 함께 살기를 바라는 소수자들에 대한 문제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귀를 기울여야만 알 수 있다. 대부분 자기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불편한 마음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자신의 '삶'을 위해 '앎'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라는 작품으로 역사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냈던 조형근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함께 겪은 정치?사회적 국면과 두루 공감할 만한 삶의 장면들을 소환해낸다. 저자는 세상에 만연한 차별과 불평등 문제를 직시하고, 기득권 정치에 대해 비판하며 우리 사회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살펴본다. 낮은 곳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들'의 소중함과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잡일'의 가치를 알고 있기에,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날카롭지만 따스하다. 저자는 대학 교수를 사직하고 파주의 한 동네에서 이웃과 살고 있는 '동네 사회학자'라고 스스로를 자처한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은 그가 2019년부터 2025년까지 <한겨례>, <경향신문>, <교수신문>, <창비주간논평> 등에 발표했거나 개인 소셜미디어에 기록한 글을 모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글들을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비판, 기득권 정치를 넘어선 약자들의 정치에 대한 희망, 중산층의 욕망에 대한 자기 성찰, 좀 더 나은 삶을 향한 모색이라는 주제로 장을 나눠 수록했다.

세상의 불평등을 개선하고 사람들과 연대를 실현하는 일은 당장 이루기 어렵다. 실은 매우 어렵다. 실제로 무언가를 하려면 용기를 내야하고 그 결과로 때로는 피해를 입게 될 수도 있다. 세상은 매섭고 나는 두렵다. 대부분 마음만 앞서게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모 아니면 도라며 손 놓고 지낼 일은 아니다.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실천하자고 다짐하게 된다. 그렇게 마음먹는 일들의 목록이 있다.... 갈수록 대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노동자와 자영업자들의 처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지켜온 습관들이다. p.316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서 '상승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졌다'는 탄식이 많아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어려운 집안, 열악한 지방에서도 자기 힘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결과 서울의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고시 같은 시험에 합격해서 계층 상승하는 사례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어졌다는 한탄이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승자가 되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고, 촘촘한 대학 서열의 사다리는 위로 갈수록 점점 오르기 어렵다. 애초에 많이 가진 자가 결국 좋은 대학에 가고, 상승 이동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 당연해진 것이다. 사다리가 이미 끊어졌기에 저소득층 청소년들이 중산층으로 올라서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모든 사람이 같은 출발선에서 경주를 시작할 수가 없는데, 기회의 평등과 공정한 경쟁이란 그저 말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리한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사실은 노력할 기회조차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의롭지 못한 격차를 없애거나 최소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두 갈래의 길에 대해 이야기한다. 서로 연대해서 불평등 축소로 가는 길과 각자 혼자서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길이다. 각자도생의 무한 경쟁 사회가 펼쳐지는 동안 연대는 붕괴하고 민주주의는 허약해졌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이 책을 통해 '내가 힘드니 너도 힘들어야 한다'가 시대정신인 세상 속에서 함께 연대한다는 것의 의미와 각자의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소시민이 함께 감당해야 할 책임과 살아내야 할 일상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