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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인류
이상희 지음 / 김영사 / 2025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렇게 부실한 움직임에 인생을 맡겨야 한다니. 인간의 두 발 걷기는 치열한 자연의 삶에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기다 그다지 빠르지도 않다. 빠르지도 않고 넘어질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데 심지어 두 발 걷기 외에 스스로 이동할 뾰족한 방법이 없다. 사실상 두 발 걷기가 인간의 이동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에게는 두 발 걷기 외에 이동할 다른 방법이 없다. 하늘을 날지도 못하고, 나무를 타기에도 엄지발가락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 맹수가 뒤쫓아 온다면 포기하는 편이 낫다. 아니, 고민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잡아먹힐 것이다. 자연에서라면 채 하루를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인류 계통은 이런 부실한 두 발 걷기로 수백만 년을 멸종하지 않고 살아왔다. p.42~43
'대한민국 1호 고인류학자' 이상희 교수의 첫 번째 에세이집이다. 이상희 교수의 <인류의 기원>, <인류의 진화> 모두 인상깊게 읽었었는데, 처음으로 고인류학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해서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고인류학을 선택하게 된 계기부터 미국에서 교수로 임용되는 과정과 일반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쓰게 된 과정까지 여성이자 아시아인, 학자, 아내, 엄마 그리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수없이 다양한 정체성으로 살아온 저자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고인류학자는 수백만 년 전 인류의 화석화된 뼛조각과 유물을 통해 고인류가 남긴 흔적을 찾고 우리 조상의 삶을 추적하는 일을 한다. 인류의 기원과 진화 역사를 연구하는 고인류학자에게는 1만 년 전의 인류도 너무나 요즘 사람이다. 수백만 년, 적어도 수만 년 전의 인류는 되어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분야가 되는 것이다. 작년 4월에 발행된 <사이언스>지의 표지 모델은 50세가 된 루시였다. 물론 여기서 루시는 50세가 아니라 330만 년 된 고인류 화석을 말한다. 화석 발견 50주년을 기념해 고인류 복원의 대가인 존 거치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어딘가 모르게 다른 모습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학계와 시대의 변화에 맞게 루시도 조금씩 변해갔으니 말이다. 50년이 지나 과학 잡지의 표지를 장식한 루시는 온몸의 털 사이로 크고 작은 근육을 드러내고, 두툼한 젖가슴 대신 탄탄한 가슴근육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으며,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불분명하게 묘사되엇다. 이는 수백만 년 전의 인류 조상이 남긴 화석을 보며 성별 고정관념을 덧씌우지 않는 성숙한 단계에 이른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고고학, 인류학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도 비교적 최근의 <루시>와 발견 당시의 <루시> 모습을 찾아 본 적이 있는데, 과학계의 생생한 현모습이자 진화 과정을 볼 수 있는 듯해서 아주 인상깊었던 대목이었다.

먼저 습관의 힘을 빌렸다. 습관은 시간을 짜낼 수 있는 지름길이다. 무슨 일이든 머리를 거치면 일단 시간이 든다. 기억해서 생각한 다음 행동으로 옮기기보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행동으로 직행하는 쪽이 훨씬 빠르다. 기억으로 할 일을 습관화해서 시간을 모으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매일 똑같은 생활, 똑같은 루틴으로 뇌와 시간을 아껴두면 좀 더 재미난 일 혹은 중요한 일에 두 자원을 쓸 수 있다. 습관화는 그래서 중요하다. 무언가 선택해야 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동으로 움직이도록 몸을 길들이면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뇌를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매일의 일과를 기록한 끝에 내게 가장 적합한 루틴을 만들어냈다. p.132
과학으로서의 고인류학에 매료되었다는 저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본능적으로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인간의 해골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해골을 객관적인 수치로 환산해 통계학적인 추론 과정을 거치는 지점이 특히 좋아는데, 그 과정에서 해골을 향한 공포심과 혐오감은 사라지고 흥미로운 연구 과제만 남게 된다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극히 소심하고 겁이 많아 별일 아닌 것에도 자주 화들짝 놀라는 성격이라는 거다. 그러니 대학 시절 주검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게다가 인체해부학 실습을 들으며 주검과 함께하는 하루가 이어졌을 때는 단연코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대학과 대학원을 거치고, 박사 학위 논문 연구를 위해 클리블랜드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된 수천 점의 인골을 측정하러 매일 일골관에 드나들 때쯤이 되어서야 인골 따위를 아무렇지 않게 보고 생각할 수 있는 과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저자의 학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에피소드들이 많아 과학책이 아니라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대목들이 정말 많았다.
저자는 이 책을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이야기라고 시작했지만, 재미있는 것은 일상 속 에피소드들과 생각들이 모두 학자로서의 필터를 통과해 보여진다는 점이다. 병원에서 진료 중에 몽고점을 몰라 걱정하는 의사와의 에피소드를 통해 인종분류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걷다가 자주 넘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인류의 계통과 진화에 대해 생각한다. 우정과 사랑의 개념에 대해 사유하며 진화론과 사회생물학을 가져오고, 여성 연구자로서 고인류학이라는 과학을 하는 것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젠더와 고고학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식이다. 그야말로 삶과 학문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덕분에 너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고인류학이라는 자칫 무거울 수 있는 학문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편견과 오해들을 걷어내면서 학자로서 개척해 온 길을 공감할 수 있게 해주는 친근한 책이다. 거대한 인류로부터 사소한 개인으로의 진화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인류학자의 일상 관찰기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