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전혜린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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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때 모든 것은 변했다. 소년 시절은 내 주위에서 폐허가 되었다. 양친들은 나를 어떠한 난처한 심정을 품고 바라다보았다. 누나들은 나에게 아주 낯설게 되었다. 하나의 꿈에서 깨어남은 익숙했던 감정과 기쁨을 변조시키고 빛을 바래게 했다. 정원은 향기가 없었고, 숲은 유혹하지 않았고, 세상은 내 주위에서 고물을 파는 것처럼 김빠졌고, 매력이 없었고, 책은 종잇조각이었고, 음악은 소음이었다. 가을 나무 주위에는 나뭇잎이 떨어져도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않는다. 나무 위에 비가 내리고, 햇볕과 서리가 내린다. 그리고 그들의 내부에는 하나의 생명이 서서히 좁은 곳으로, 안으로 물러나 들어갔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있다.                p.116~117


에밀 싱클레어라는 한 청춘의 고독하고 힘든 내면의 성장 과정을 그리고 있는 <데미안>은 세상 모든 청춘들을 대변하며 긴 시간 사랑을 받아왔다. 출간 후 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에게 읽히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 국내에도 굉장히 다양한 판본으로 출간되어 있다. 나 역시 다른 버전으로 여러 번 읽었던 작품인데, 이번에 만난 <데미안>은 조금 특별하다. 바로 전혜린 타계 60주기를 기념해 전혜린이 번역한 판본을 되살린 복원본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문학소녀라면 누구나 전혜린을 동경했을 것이다. 아무나 쉽게 해외여행을 다닐 수 없던 시절, 독일로 유학을 갔던 천재 작가였고, 뜨거운 열정과 치열함, 그리고 때 이른 죽음으로 '전혜린 신화'로 남게 된 존재였으니 말이다. 나도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좋아했던 문학소녀였다. 그래서 학창시절 교실 한구석에 펼쳐 세운 교과서 안에 책을 숨겨놓고 읽었던 기억 속에서 언제나 전혜린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는 책을 정말 여러번 아껴가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독일 유학이후 대학교수로 생활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의 자서전적 에세이라는 점에 매혹되어 읽기 시작했는데, 분위기와 감성, 문장에 매혹되어 그 시절의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책이다. 그러니 이번에 만나는 <데미안>은 정말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번 개정판에는 전혜린이 쓴 헤세 작가론과 <데미안> 작품론 등 두 편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어 더 깊이있는 독서의 시간이 되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나는 여러 번 그 글을 읽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데미안의 답장이었다. 그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새에 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내 그림을 받은 것이다. 그는 나를 이해했고 나로 하여금 해석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는 것일까? 그리고 ─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힌 것은 ─ 아프락사스란 무엇일까? 나는 그런 말을 들은 일도 없었고 읽은 일도 없었다.              p.158


누구나 유년 시절을 거쳐 어른이 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평화와 안전의 냄새가 풍기는 집을 벗어나 어른이 되어 가는 순간, 그러니까 어린 시절이 끝나는 순간이란 누구에게나 통과의례처럼 다가오게 마련이다. 누구나 데미안처럼 엄청난 혼란에 빠져 온갖 격정과 감정의 분출들로 괴로워하던 시기를 거쳐 예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물론 어른이 되는 과정이 누구에게나 같은 방식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싱클레어가 그랬듯이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야 그 모든 과정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고전을 '다시'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학창시절에 읽었던 <데미안>과 어른이 되어 만난 <데미안>은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싱클레어에게 성서 속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로 선악의 진실에 대해 가르쳐준 데미안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호하에 누렸던 안전한 생활을 벗어나 자신을 이끌어주는 사람을 만나 성장하게 되는 싱클레어도 뭔가 공감되고, 이해되는 지점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인물들로 바뀌어 있었으니 말이다. 


별다른 생각없이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모두 불만이던 10대를 지나,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20대를 지나고, 산다는 게 얼마나 처참한지, 얼마나 불공평한지 인지하기 시작하는 30대를 거쳐, 삶의 서글픔을 넘어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40대가 되고 나면 그제서야 보이는 게 있다.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여유 같은 것, 우리를 겁에 질리게 하는 것들을 제대로 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등등 어제의 나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오늘의 나는 깨닫게 된다. 이번에 <데미안>을 '다시' 읽으면서도 역시나 기존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고, 배우는 시간이었다. 살면서 누구나 자유롭게 날기를 포기하고 사회가 정한 테두리 안에서 걷는 것을 선택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데미안>이라는 작품이 어떤 상황에서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일 테고 말이다. 독일어 원문에 가장 충실한 번역으로 만나는, 가장 문학적 감성으로 충만한 <데미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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