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일 블루 아이
루이스 베이어드 지음, 이은선 옮김 / 오렌지디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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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가 카드 게임의 고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허세를 끝까지 밀고 나갈줄 아니 말이다.

“나는 시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 말일세.”

“당연하죠. 선생님은 미국 분이시잖습니까.”

“그럼 자네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포 군?”

“저는 예술가죠. 그러니까 무국적이라는 말씀입니다.”          p.108


1830년 10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젊은 생도가 밧줄에 매달린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그날 새벽, 누군가가 시신을 옮겼고, 시신의 심장이 사라진 채로 발견된다. 신생 육군사관학교의 명예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비밀스럽고 신중한 조사가 시작되었고, 뉴욕에서 명성을 떨쳤던 은퇴 경찰 거스 랜도가 소환된다. 학교를 대신해 예민한 성격의 수사를 수행할 수 있는, 관련 경험과 노하우가 풍부한 일반 시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 군 당국에 연락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내용이 학교 밖으로 절대 유출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지어진 지 30년도 안 되는 신설 기관이었기에 어마어마한 반대파가 생긴 참이었고, 학교의 존재 자체에 반감을 품고 완전히 무너뜨릴 핑계를 찾고 있는 측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소환된 랜도는 누가 젊은 생도를 교수형에 처한 것인지, 그리고 시신에서 심장을 가져간 사람은 누구인지 찾기 위해 조사를 시작한다. 시신의 손에서 누르스름하고 물에 젖어 너덜너덜한 종이 쪼가리가 발견되는데, 그 속에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수사를 진행해 가는 과정에서 랜도는 1학년 생도인 포를 만나게 되는데, 동급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아 보이는 포는 나뭇가지처럼 비쩍 마르고 어딘지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포는 "선생님이 찾는 사람은 시인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마침 생도들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해 제약이 많았던 랜도는 기민한 관찰력을 지닌 포를 자신의 조수로 쓰게 해달라고 제안한다. 그렇게 일탈과 궤변을 질기는 독특한 성격의 포와 은퇴 경찰 랜도가 탐정과 조수가 되어 사건 해결을 위해 나서게 된다. 





또 한 가지 내 눈에 뛴 부분이 있었으니 권두에 실은 인용구였다. 라로슈푸코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말했다는 Tout le monde a raison 이었다. 매티가 예전에 쓰던 프랑스어 사전을 찾느라 애를 먹었지만 해석 자체는 식은 죽 먹기였다.

모두에게 이유가 있다.

그렇게 근사한 문구는 처음이었다고 해야 할지, 그렇게 끔찍한 문구는 처음이었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곱씹으면 씹을수록 나에게서 멀어진다. 하지만 그가 내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어도.               p.655


이야기는 '거스 랜도의 기록'이라는 형식으로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랜도와 포가 함께 수사를 시작하고 얼마 뒤, 암소와 양이 목을 베여 도살당한 끔찍한 상태로 발견된다. 게다가 사체가 잔인하게 난도질 당했고, 심장이 제거된 상태였다. 가축이 제물로 바쳐지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는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고, 사관학교에서 벌어진 사건과 동일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사에 더 긴장감을 부여해주는 계기가 된다. 포는 시신의 손에서 발견된 쪽지에 써 있던 암호 같은 문구들을 해석해내고, 그것이 일종의 초대장이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그 밖에 그들은 죽은 리로이 프라이는 옆에서 말을 시키지 않으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만큼 말수가 없었고, 그러다 '질이 안 좋은 무리'와 어울렸다가 나중에는 종교에서 위안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범인을 가리키는 단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고, 수사는 천천히 느리게 진행된다. 


실제로 에드거 앨런 포가 미육군사관학교에서 6개월간 복무했던 이력에서 착안한 이 이야기는 에드거 앨런 포라는 인물을 설득력있게 재탄생시키며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준다. 탐정과 조수로 만난 랜도와 포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독특한 우정을 보여주는데, 진솔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철저하게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관계였다. 수수께끼 같은 단서, 암호와 흑마술 등 포의 실제 이력과 작품 요소를 치밀하게 쌓으며 직조되는 이야기는 65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분량만큼이나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읽어야 빛을 발한다. 빠르게 진행되는 속도감에 익숙한 요즘의 추리, 스릴러 물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재미를 느끼려면 느긋한 마음으로 작품을 즐겨야 할 것이다. 촘촘한 복선과 후반부의 반전 또한 백미인 이 작품은 에드거 앨런 포를 좋아한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유럽 영화사상 최고가 판권 계약으로 화제를 모으며 크리스천 베일 주연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원작과 함께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과거를 직접 목격한 것처럼 표현하는, 역사소설에 활력을 불어넣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루이스 베이어드의 이 놀라운 작품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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