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에세이
허지웅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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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만약에 인연이 끝났던 그 마지막이라도 다시 되풀이할 수 있다면. 만약에. 만약에. 그렇게 만약에, 가 쌓여 뭔가 단단히 움켜쥘 수 있는 닻과 같은 것이 되어준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 이 꼴사납고 남부끄러운 감정의 파고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나 인생은 대개 꼴사납고 남부끄러운 일의 연속이다. 우리는 이별에 특정한 계기가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되돌리지 못해 있는 힘껏 자책을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 헤어지는 건 '그냥' 헤어지는 거다. 만약에,를 여러번 곱씹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p.59~60

 

살면서 누구나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망했는데, 싶은 기분이 드는 그런 순간 말이다. 다시 돌이킬 수 없고, 그 순간을 모면하거나 도망칠 수도 없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그런 기분이 들어 막막할 때 말이다. 이제 나는 끝났다 싶거나, 사는 게 다 지긋지긋해지거나, 그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그런 당신에게 이 책은 말한다.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살아야 한다고.

 

방송인, 영화평론가, 작가인 허지웅이 혈액암의 일종인 악성림프종으로 투병 중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2년간의 암 투병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 방송을 봤다. 예민하고, 까칠했던 모습들 대신 둥글어지고, 다소 편해진 그의 태도와 말투를 보면서 조금 낯설었다. 사실 티비를 자주 보는 편도 아니고, 연예인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편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날 그 방송을 보면서 그가 겪었을 그 지옥 같은 시간의 무게가 느껴져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투병 이후 완전히 달라진 그의 삶에 대해서 응원해주고 싶어 졌다. 그래서 그가 4년 만에 작가로서 선보이는 신작 에세이가 궁금해졌다.

 

 

젊은 날의 나는 대개 불행했고, 앞으로도 불행을 떨쳐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에 잠식되고 싶지도 않았다. 행복한 사람은 거만했고, 거만해서 재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불행에 잡아먹히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골몰했다. 나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불행에 시달린 이들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알고 있었다. 피해의식은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피해의식이 만든 괴물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든 이해받을 수 있다고, 아니 이해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불행했으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 나의 사연이 나의 책임을 대신 져주지는 않는다. 그런 괴물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불행과 함께 살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    p.255~256

 

그는 첫 에세이 <버티는 삶에 관하여>에서 그 무엇보다도 '버티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명제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6년 뒤, 암 투병을 마치고 나서도 여전히 '함께 버티어 나가자'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삶이란 버티어 내는 것 외에는 도무지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그가 병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의 말대로 재발한다면 내년에 다시 병동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의욕이 넘치니 그걸로도 충분한 거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서른 살 이후로는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걸 시도해 본 기억이 없는 그가, 요가를 시작했고 그만두지 않고 열심히 하는 중이다. 해보지 않았던 것이고, 잘 할 수도 없는 것을 지치지 않고 성실하게 말이다.

 

내가 브라운관을 통해서 보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가 달라진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해줬나 보다. 아프기 전과 후의 그가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뭐가 달라졌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다만 글로 써서 말하고 싶은 주제가 달라진 것만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나는 언제 재발할지 모르고, 재발하면 치료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항암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래서 아직 쓸 수 있을 때 옳은 이야기를 하기보다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남기고 싶다." 라는 그의 말이 너무도 진정성있게 느껴져서 잠시 먹먹해졌다. 크게 한 번 감기나 열병만 앓고 일어나도, 세상에 다르게 보이게 마련인데 생사를 오가는 시련을 겪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상투적인 위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바른 말만 늘어 놓는 게 아니라 더 인상적이었다. 죽음과의 사투 끝에 삶으로 돌아온 그가 힘겨운 현실에 시름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단단한 조언과 오늘도 버티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가 뭉클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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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8-13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자체가 강렬하네요!!

피오나 2020-08-16 23:39   좋아요 1 | URL
그죠? 워낙 글 잘 쓰는 분이라 책 속의 문장들도 그렇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