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가 있었다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김예진 옮김 / 검은숲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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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읽는 궁극의 즐거움은 시리즈로부터 온다. 지속되는 시리즈는 한 권짜리 이야기보다 더 많은 것을, 한 순간만을 엿보는 것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약속한다. 오래 전 셜록 홈즈는 '일상의 따분한 반복과 관습 너머에 있는 기이한 사건들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며, '경찰 보고서를 읽다 보면 일상사만큼이나 기이한 것'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엘러리 퀸의 <노파가 있었다>는 그러한 기이함의 극대치를 보여주고 있다. 허드슨 강을 바라보는 뉴욕 한복판에 버티고 있는 웅장한 저택 안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올 법한 기상천외한 토끼 굴처럼 기묘하기 짝이 없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집처럼 알록달록하고 굴뚝에서는 녹색 연기가 흘러나오는 별장이 있는가 하면, 수수께끼 같은 물질을 끓여대는 미친 과학자의 기괴한 탑도 있고, 하트 여왕처럼 신문기자들을 향해 독설과 총을 쏘아대는 노파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체커 게임을 하고 있는 노년의 남자 들도 있다.

마더 구스 동요의 '신발 속에 사는 노파'로 불리는 기괴한 노파 코닐리아 포츠와 여섯 명의 자식들이 사는 그곳은 광기와 무논리로 가득했고, 바로 그 점이 이 작품만의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 꾸며진 연극 무대 같은 비현실성이 돋보이는 이야기지만, 살인 사건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고, 그 속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엘러리 퀸은 사소한 단서들을 놓치지 않는다. 탐정 소설에서 주인공의 역할이란 평범한 환경도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고, 그냥 보는 대신 관찰하며, 듣는 대신 경청하고, 평범한 속에서 특별한 것을 주목하는 것인데, 엘러리 퀸은 이번 작품에서도 여지 없이 멋진 활약을 보여 주고 있다.

 

 

 

 

"천재적인 만화가는 커다란 저택을 하나 그렸습니다. 아마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있는 포츠 대저택을 비유하려는 모양이었겠죠? 그런데 중요한 건 그 건물을 구두코가 뾰족한 구식 신발처럼 그렸다는 겁니다. 그 마더 구스 풍의 일러스트레이션 속에서 코닐리아 포츠는 '신발' 밖으로 굴러 떨어지는 여섯 자식들을 데리고 있는 늙은 마귀할멈처럼 그려졌죠. 그리고 밑에는 이런 해설이 달려 있었습니다... 아무튼 덕분에 별명이 완전히 굳어지고 말았죠. 그 이후로 코닐리아 포츠는 노파가 된 겁니다."    p.21~22

 

코닐리아 포츠, 검은 태피터 치마와 목에 두른 가느다란 검은색 레이스 초커, 새침한 검은색 보닛 차림만 보면 '귀여운 늙은 요정'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닐리아 포츠 부인은 결코 70년 이상의 시간을 살아온 귀부인답게 걷지 않는다. 게다가 이기적이고 심사 비뚤어진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두 눈에선 사악한 빛만 뿜어냈다. 그녀는 바로 미국 사람이라면 누구다 다 아는 '어디서나 3.99달러'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포츠 신발의 수장이었다. 그녀에겐 첫 번째 결혼으로 생긴 세 자식과, 두 번째 결혼으로 얻은 세 자식이 있었다. 첫 남편이었던 바커스는 실종된 상태로 세상에서 사라져버렸고, 첫째인 설로는 부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별로 하는 일은 없다. 그저 모든 일에 분노하는 사람으로, 벌써 서른 일곱 번째 명예 훼손 재판을 거는 편집증 환자이다. 둘째인 루엘라는 위대한 발명을 하겠다고 실험실에 틀어 박혀 있고, 셋째인 히레이쇼는 동화를 쓰며 장난감감에 둘러 싸여 피터패처럼 사는 인물이다. 현재의 남편인 스티븐의 자식들은 좀 멀쩡한 편인데, 일란성 쌍둥이인 로버트와 매클린은 판매와 광고 및 홍보 부사장을 맡고 있다. 가장 어린 실라는 가문의 변호사인 찰리 팩스턴과 사랑에 빠졌지만, 노파의 결혼 반대에 부딪친 상태이다.

 

 

포츠 가문의 명예훼손 재판에 아버지와 함께 참관하게 된 엘러리는 팩스턴 변호사로부터 포츠 집안에 대해 듣게 된다. 그리고 재판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자 총을 사서 집안의 명예로운 이름을 모욕하는 놈에게 사정없이 쏴 죽이겠다고 소리친 설로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 포츠가의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하기로 한다. 마더 구스 동요의 '신발 속에 사는 노파'로 불리는 기괴한 노파 코닐리아 포츠와 여섯 명의 자식들과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자리는 그야말로 이상했다. 그 와중에 로버트와 설로가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설로는 동생이 자신을 모욕했기에 명예 회복을 위해 결투를 해야겠다고 선언한다. 게다가 두 사람은 각자 실제 총기를 하나씩 고르고, 다음 날 새벽에 만나서 결투를 하기로 하는데.. 대체 이게 무슨 괴상한 농담일까싶지만, 설로는 굉장히 진지하기만 하다. 엘러리의 아이디어로 탄환이 하나 들어 있는 권총을 몰래 가져와 속을 비운 약협을 끼워 두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새벽의 결투에서 실제로 살인이 벌어지고 만다. 그리고 이어지는 살인 사건들이 모두 마더 구스 동요의 노랫말과 정황이 맞아 떨어지게 되는데.. 과연 엘러리 퀸은 광기와 무논리로 가득한 이곳에서 어떻게 수수께끼를 풀어 나갈 것인가.

 

 

 

 

"경사님 가설에서 희한한 점은 잘못된 부분이 아니라 옳은 부분에 있어요."

경감은 아들을 빤히 쳐다보았고, 벨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러리가 다급히 덧붙였다.

", 그 가설이 맞았다는 게 아니에요. 당연히 틀렸죠. 하지만 올바른 노선을 타고 있어요. 논리적인 가설이라는 뜻입니다. 부조리 위에 합리성을 세우려 애쓴 흔적이 보여요. 그리고 그건 정확히 옳아요, 아버지."    p.205

 

검은숲독서클럽 2주차 도서로 만나게 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마더 구스 동요를 소재로 한, 마치 한 편의 환상적인 동화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초기 국명 시리즈의 또박또박한 연역추리와 비현실적인 퍼즐 미스터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더욱 흥미진진했다. 이 작품은 라디오와 영화 시나리오 등의 영향으로 한동안 리얼리즘을 지향했던 엘러리 퀸 형제가 초기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비현실적인 퍼즐 미스터리 포맷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마더 구스 동요와 맞아떨어지는 살인 사건이라는 스토리 형식에 맞추기 위해 리얼리즘을 포기하는 것이 불가피하기도 했으나, 다양한 계층과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라디오와 영화에서 제한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복잡하고 흥미로운 트릭들을 소설 속에서 마음껏 보여준다. 광기와 무논리로 가득한 뒤죽박죽 토끼 굴 같은 무대에서 사소한 단서로 이성적인 범죄자의 두뇌를 발견하고 사건을 극적으로 해결해내는 엘러리 퀸의 활약상을 만나볼 수 있어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개인적으로 검은숲의 '엘러리 퀸 컬렉션'은 내지가 특히 예뻐서 좋아하는 시리즈인데, 엘러리 퀸의 작품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면 소장용으로도 너무 근사하고 아름다운 책이니 놓치지 마시길!! 게다가 지금 엘러리 퀸 도서 구매 시 '엘러리 퀸 컴플리트 가이드' 북을 받을 수 있어 초심자들에게는 엘러리 퀸의 세계에 입문하기 좋은 시기인 것 같다. 26편의 작품에 대한 설명과 7편의 칼럼이 담겨 있어 엘러리 퀸 초심자부터 마니아까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완벽한 가이드북이니 놓치지 마시길. 올 여름, 20세기 최후의 미스터리 거장 엘러리 퀸을 시작해보자. 그의 작품들이 왜 미스터리의 고전인지, 그리고 그런 고전을 왜 지금 다시 읽어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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