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달랐다.
오빠를 위해서 내 목숨을 던질 수 있던 시절도
있었다.
하이네켄 납치 사건 이후 우리 모두가 따돌림을 당하던
때, 나는 오빠가 우리에게
가르친 '우리 대 나머지
세상'이라는 가족의 충성심에
대한 신화를 믿었다.
하지만 오빠가 자신의 가족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깨달았다. 우리의
적은 바깥세상이 아니었다. 오빠가 우리 적이었다. p.199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범죄자라면?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유년시절, 다정한
오빠이자 아버지와도 같았던 존재가 나의 아이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수많은 사람을 살해한 살인자라면? 이 작품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범죄자이자 하이네켄 납치사건의 주범인 빌럼
홀레이더르의 여동생,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가 쓴 회고록이다.
그녀는 살해 위협을 피해 직장도 그만두고 숨어 살며 원고를 완성했고, 탈고한 후에도 책이 공개되기 직전까지 어느
서점에도 간단한 소개조차 제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빠인 빌럼 홀레이더르가 알게 된다면 책의 출간을 막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2016년 11월, 한
심야 TV 쇼에 등장한 책 한
권이 네덜란드 전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나는 아직도 오빠의 살해 목록 1순위다”
빌럼이 처음부터 아스트리드에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남매의 어머니 역시 “빌럼이 열두 살, 열세 살 무렵까지만 해도 매우 착한
아이였다”고
기억한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잘생기고, 매력적이고, 상냥하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였던 아빠는 엄마와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폭군의 모습으로 변했다.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에 가정폭력을
일삼았고, 과대망상증
환자에, 병적으로 질투심이
강했다. 아스트리드와 소냐
언니, 빔 오빠와 헤라르트
오빠, 이렇게 네 남매는 어린
시절부터 모두 아빠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하며 살아야 했다.
아빠는 엄마를 때렸고,
빔 오빠는 소냐 언니를 때렸고, 헤라르트 오빠는 아스트리드를 때렸다. 공격성과 폭력성이 의사소통이 되어 버린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폭력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지만,
아버지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황에서 빌럼은 여동생에게 다정한 오빠이자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는 든든한 오빠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빌럼은 아버지를 닮아가며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적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나는 그의
여동생이었다, 안
그런가? 그들이 지하세계의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유일한 이미지는
<대부>
같은 조직폭력배 영화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가장이 오로지 자신의 가족에게만 사랑이나 연민을
드러내는 그런 영화들.
하지만 우리 삶은 대부 영화가
아니고, 낭만적인 범죄자
가족의 초상도 아니었다. 이것은 한 명이 나머지 모두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p.216
빌럼은 어린 소년일 때부터 엄마에게
폭군처럼 굴었고 엄마는 늘 그걸 형편 없는 아빠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래서 중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아들을 절대로 버리지 못했다.
"그 애는 꼭 제 아빠 같아. 딱 제 아빠야."
빌럼은 하이네켄 납치 사건의 주범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는 납치 사건뿐만 아니라 돈을 위해서라면 동료들을 협박하고 ‘제거’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폭언을 일삼고, 절친한 친구이자 동생 소냐의 남편이었던 코르 역시 살해했다. 하지만 그는 수려한 외모와 언변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방송에 나가기도
하며 유명인이 된다. 그러니
그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면모를 아는 사람은 가족뿐이었다
변호사가 된 아스트리드는 치밀한 준비 끝에 네덜란드
최악의 범죄자이자, 다수의
살인을 교사한 친 오빠 빌럼을 법정에 세운다.
이 책은 바로 그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주도 면밀한 준비 끝에 변호인이 아닌 증인으로
법정에 서서 친 오빠를 단죄해야 하는 심정이란 대체 어떤 걸까.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고통일 것이다. 게다가 빌럼은 교도소 안에서 아스트리드의 살해를
지시했고, 그녀는 현재 직장을
그만두고 살해 위협을 피해 숨어서 살아가고 있다.
이 무시무시한 현실은 놀랍게도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실화이다.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내
일, 내
집, 전부 다
잃었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