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에서 살충제 성분이 나오고 먹을 수 없다며 폐기한다. 전량 성분 검사를 철저히 하고 등등등 온갖 대책을 마련하며 부산을 떨며 발표를 하기 바쁘다. 그러나 이게 이것만으로 앞으로도 건강한 식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란 보장은 할 수 없다. 그럼 대체 뭘 먹어야 할까? 원래는 자급자족하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는 게 맞다. 그러나 이 많은 인구가 전부 자급으로 해결하기란 역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자. 닭이 사는 닭장, 소위 말해서 철망으로 만든 케이지(사각형 방)에 꼼짝없이 갇혀서 먹고 싸고 산란하는 삶이 무얼 의미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 이 자체가 고통일 따름이다. 닭의 습성이나 본능이 방목으로 돌아다니며 벌레를 잡고 채소를 뜯어 먹고 닭이 제일 좋아하는 모래 목욕이다. 그렇지만 이런 본능 자체를 말살한 케이지에 갇혀 있다는 것은 그냥 계란을 생산하고 고기로 만들어지는 기계처럼 살지만 결국 닭들은 살아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본능에 저항하게 되면 병이 걸리고 해충이 붙는 게 이치가 아니겠는가.
하루 종일 어두운 닭장 내부에 불은 밤마다 켜져 있고 잠을 거의 잘 수 없이 지속되는 스트레스가 살아 있는 내내 겪는 고통으로 만들어지고 기온이 높아서 생기는 벌레도 계속 피를 빨아먹어 대니 닭들이 살 수가 없다. 그래, 이렇게 삶이란 거의 자포자기형의 그 전형이 닭장 케이지에서 꿈틀거리고 눈만 껌뻑거린다. 공장식 닭장에서의 닭의 인생은 몇년 갈 수도 없다. 닭의 생존기간이 12년인데 12년 된 닭은 세상에서 존재하기나 할까?
우리가 먹는 치킨이 결국 닭이 겪은 고통의 결과물이었음을 우린 모른체한다. 단지 세치 혓바닥에 전해져 오는 감각의 황홀함으로 치환되면 닭의 고통이야 내 알바는 없다. 알고 싶지도 않고. 그저 오늘 저녁에 치맥으로 하루를 즐기는 기뿜만으로써 만족이 되면 문제는 없다. 그런데 닭들이 아프고 병든 몸을 방어하기 위해서 살충제를 뿌리고 다시 이것이 우리 입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닭들의 몸을 치유하기 위한 뿌린 약이 사람을 공격하는 꼴이다. 혹시 어쩌면 인간으로써는 벌어지는 공장식 자본주의 양계산업에 대한 공격이자 닭들의 조용한 자기 저항은 이런 방식으로 해대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생긴다.
공장에서 부화되고 산란된 닭은 어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어미의 날갯짓의 온도를 모른다. 한 번도 만난 적도 없었던 사랑이었으니 직접 알을 만들지도 못한다. 철저히 사육식의 자본적 생산 공장 산업의 생산품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가지고 있는 신경 세포로 전달되는 고통이 끊임없이 스트레스로 받은 것은 병적 질환으로 순환한다. 살아 있음의 고통은 차라리 케이지를 벗어나 딱 한번의 외출이 되는 육계 공장으로 가는 동안에만 세상을 마주했고, 다시 공장의 분해 칼날 앞에서 삶은 순식간에 멈출 뿐이다.그 어떤 묵념따위는 없다. 누가 닭의 장례식을 치룬 적이 있었던가? 살아 있을 동안 단 한 번도 흙을 밟아 보지 못해서 본능마저 거세되어 버린 고통의 육체는 또 누군가의 입에서 맛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닭들의 삶을 보며, 과연 우리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끝없이 묻는다. 사실 따지고 보니, 닭들이야 일차적으로 공장식에서 입속으로 끝나는 자본적 순환의 제품이자 소비품이겠지만 우리네 삶도 닭들처럼 자본에 매여 오늘도 사료를 먹고 싸고 일하고 알을 낳듯이 생산을 하고 서비스를 하며 이 속에서 감정을 거세당하고 사는 건 아닐까.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 오늘의 내 삶의 시간이 소비되는 것은 닭이나 나나 뭐가 다를 것인가. 치킨은 닭이었을 뿐이고 나는 돈 앞에 늘 쫄아 있는 노예이었을 뿐이라는, 이 극한 점의 차이점에서 묘하게 서로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도 새삼 놀랍지도 않다. 닭은 자기 몸에 들러붙는 진드기의 고통을 받으면서 병든 몸을 만들고 약이 묻은 달걀로 공격하는 걸 보면 난 이 공격할 무기도 없이 내 몸의 죽여서 자학하는 것도 저항의 일종은 아닐까. 혹시 내 몸 어딘가에 암덩어리 하나 자기 모순처럼 살고, 자신이 자기를 죽여 가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치킨을 시키고 맥주를 마셔야겠다. 운명이란 거절할 수 없는 초대에 맺어진 우주의 지랄 맞은 욕망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