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나라에서 출생자가 40만 명대에서 30만 명대로 떨어질 것이라고 보도가 나온다. 이미 이 수치는 기정사실로 될 수 있을 정도로 연말까지 예측되는 수치이다. 따라서 40만 명대에서 30만 명대로 떨어짐으로써 닥칠 인구의 위기론이 심각하다고 난리 치며 대두되고 있다. 그래서 생각해보자.
태어나도록 예약된 아이는 없다. 다만, 태어나도록 하는 그 욕망의 기재에 대해서 우리는 그렇게 심각하게 따지기만 했지 태어날 아이들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은 없다. 하기야 "없던 아이"까지 존재론을 덜 먹일 수준만큼 철학적으로 사고가 싶다거나 유식한 질문으로 따져 묻는 사회는 결코 아니니까 말이다. 이런 접근 방식은, 고대로부터 아이가 곧 생산력이거나, 경제와 자본력에 대한 상대적인 접근 근거였다.
이른바 인구론에 있어서, 달리 말하면 쪽수론이다. 대가리 숫자가 곧 경제력과 직결된다는 이야기다. 쪽수로 밀어 부쳐야 경제가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돈벌이를 위해서 아이가 많이 태어나면 날수록 생산력도 증대되고 소비와 지출이 증대됨으로 이익이 발생한다는 이론을 주장한다. 그러니 오로지 많이 낳으라는 이야기였다. 반대로 인구가 늘어 남으로써 발생할 비용과 환경의 문제는 전통적 인구론에는 거의 다루지 않는 주제였기도 하고 개별적인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인구 경제론에 비해 그렇게 비중 있게 다루지도 않는다. 하기야 경제론에서 행복론으로 나아가는 주체는 결국 돈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전제되었을 뿐이다. 경제적이익이 곧 행복이고 돈벌이가 많으면 행복하다는 결론이었던 까닭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급격한 인구증가의 문제로 인해서 산아 제한이라는 강력한 정책적 수단으로 펼친 때가 있었다. 경제력도 어느 정도의 출산율을 근거로 하였지만 이게 인구가 과도함으로써 발생하는 과밀화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른 것이었다. 그 실례의 구호가 바로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 꼴 못 면한다"라는 것이고 이마 대표적 구호다. 희박과 과밀의 기준은 오로지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았고 경제적인 문제에서 출발하고 끝을 맺었다. 결국 경제도 인간의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일 뿐. 다 자본적인 이유에서 도출되는 인구론일 따름이라는 공식에서 출발하였다. 많이 낳든 적게 낳든 모든 문제의 시선은 돈벌이와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다는 의미이다. 하기야 인간이 나고 죽는 것은 전부가 다 돈의 문제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하기야 테어 나도 돈, 죽어도 돈이니 인생에서 돈을 빼면 도대체 남아 있는 게 없는, 그야말로 돈이 전부가 된 예속적인 삶에서 인구론과 존재론이 주장하는 근거였다.
여기서 기분 억수로 나쁜 이유를 가진 질문하나만 하자. 당신이 오늘 이곳에 이렇게 존재하는 이유는 뭔가라고 했을 때, "돈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기분 나빠진다. "당신의 존재 이유가 돈이었어." "당신이 태어난 이유 돈 벌라고 태어난 이유"라고 하니 내 삶이 돈 때문이라면 무척 실망하지 않을까. 뭐 돈이 전부가 된 자본주의 시장 경제체제에서 돈 때문이라고 한다면 기분 나쁘지 않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살아가는 이유가 오로지 돈 때문이라면 이것 또한 얼마나 비참한 이유가 될 것인가. 돈이 아닌 다른 이유가 한두 가지는 덤이라는 것도 재미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럼 돈 아닌 다른 가치는? 없다면 그저 살아가는 이유가 돈 벌다가 돈 쓰다가 죽어만 하는 인생이니 돈의 신분제에 우리는 속해 있다는 뜻도 된다. 그렇다면 물론 내가 돈이 많다면 신분의 상승곡선을 그리고 돈이 없다면 노예 신분이 되는 논리가 된다. 현실이 돈이 없는 자 모두 자유가 없는 종속자들이다. 즉, 돈의 총량적 한계가 자신의 삶과 존재의 한계이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의 현대인의 삶은 자본주의로부터 인생을 죽을 때까지 섭정당하고서 산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내가 태어난 이유가 돈벌이용 보험적 삶을 살아가도록 의도된 것이라면 난 뭐가 되겠는가? 차라기 기계를 하나 더 만들어서 인간보다 더 우수한 능력을 가진 생산력을 대체하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결론이고 그럼 넌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의 논리가 된다. 그렇다면 인간 본연의 존재 이유 따위는 개나 줘버리게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비루하고 비참한 거다. 돈 빼면 자존감이 없다는 이야기다. 돈 없는 자 모조리 가치 없는 사람으로 절하된 시대이니 너 하나 죽든 살든 별 의미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겠다. 그래서 인간은 돈 있는 자와 돈 없는 자로 나눠질 것이고 돈 있는 자는 돈 없는 자를 노예로 부리며 군림하고 없는 자는 비굴함에 욕망을 투사시킬 수 있게 된다. 돈이 빠지면 이 사회는 작동 불능에 빠지고 인간의 본연의 존재로는 여기서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면 우린 참 서글픈 시대를 살고 있는 거다. 소위 화폐경제체제하에서 인간의 존재가치는 없다는 말이다.
이런 조건하에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을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없는 놈들끼리 과도한 경쟁 체제, 비교우위를 점하는 이른바 노력으로 고통스러워해야 하고, 하물며 장가 정도 들려니 내 누울 곳 하나 마련하기가 너무 벅차다면, 이런 주거의 자유가 돈에 의해 철저히 지배당하고 침략당하는 사태에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장소도 부족할 실정이 아니었던가.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조차 사치로 여긴다. 데이트라고 하려면 맨 입에 빤쥬만 입고 데이트하는 것도 아니다. 옛날처럼 남녀가 물레방앗간에서 거시기 하던 때를 비교하면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하다못해 무슨 사고라도 칠 빌미조차 허용할 수 없는 조건들에 갇혀 사는 사람들에게 아이는 곧 비용 대 효율로 치면 최악이나 다름 아니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모든 것이 자본 경제체제하에서 거의 무방비로 자본적 사고방식에서 침략당하고 있는데 이겨낼 방법? 더욱이 맨땅에 헤딩하는 식의 상황하에서는 별다른 방법은 없다. 가장 싫어하는 말 중에 태어나면 지 먹을 복은 타고난다는 말이다. 그럼,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왜 굶어 죽는가? 아프리카 애들은 먹을 복이 없어서 였다고 치부하는 따위의 무식한 소리를 집어치워야 한다. 이런 복 같은 소리는 논리가 아니다. 태어나서 굶어 죽지 않는 확률을 복이라고 긍정적인 치장할 뿐이다. 착각으로 아이를 낳을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우린 늘 착각으로 살고 착각으로 죽어간다.
한때 자살률이 세계 최고였다는 북유럽의 일부 국가들을 우리나라가 갈아 치웠다. 누구는 북유럽의 우중충한 날씨가 우울증으로 나타나는 심리적인 원인이라고 일부의 분석도 내놓았지만 웃기는 소리다. 그들의 사회질서와 자본적인 체계를 인간적인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바꾸었던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바꾸기는커녕 더더욱 자본적인 침식 상태로 나아가며 심각해지고 있다. 결국 출생률과 자살률은 쌍둥이 형제와 같다.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출생률은 낮아지고 자살률을 높이지는 반비례적 관계의 그래프를 그리다 보면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관여하는 상수는 무엇인지 따져 보아야 한다. 바로 존재론이 이 상수와 관련이 있다. 변수는 개별적인 상황이고 상수는 일반적인 범주로써 상관하는 문제들이다. 나 하나 세상에 나와 버티기 어려운 마당에 또 누가 누굴 고생시킬 것인가라는 각성은 이에 대한 직접적인 데이터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솔직해지자. 이 나라 이 땅의 자본적인 허약한 체질의 사람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다 알지 않는가 말이다. 그저 자신들의 자본으로 종속시키고 굴복시켜도 얼마든지 떵떵거리는 반증이다. 어느 모 대기업 회장 놈이 운전기사에게 행한 폭력은 하루 이틀도 아니다. 운전기사를 직원으로 대우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다. 안하무인에 인간성 제로의 성향을 가지게 된 것도 결국은 자본이 그렇게 만들었다. 돈의 힘이 모든 것을 굴복시키고 파괴시키고 자본으로 이 사회를 조종할 수 있다는 힘을 믿는 것이다. 지금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없는 사회는 비참하다. 단, 없는 자들만 비참할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의 생존방식을 따라간다 한들 지배자가 되기는 요원하다. 더욱 비굴해지던가 더욱 깽판을 치게 되던가.
오늘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체제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다. 계속 여기 있다간 미치지 않고서는 배길 제간?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