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교롭게도 선택한 책 두 가지가 죽음에 관한 책이다. 하나는 자살론, 즉 어떻게 스스로를 죽일 것인가에 대한 논서이고 또 하나는 어떻게 죽어 갈 것인가에 대한 책이다. 우리 모두는 생명의 거대한 시스템에게서 죽음의 예외를 허락받지 못한 존재이다. 따라서 반드시!~, 그리고 절대적으로 다 죽는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오늘일 수도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랫든 저랬든, 결국 오늘만큼 죽었고 오늘만큼 죽어가고 앞으로도 죽어 갈 것이다. 차라리 죽는다는 표현보다는 사라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즉 부재 이 자체를 의미한다. 생명이라는 유기체가 움직이는 주체로써 사라질 때를 우리는 죽는다는 말로 그저 대신 할 뿐이다. 모든 죽음은 애도와 엄숙을 가진다. 사라짐은 곧 이별을 의미하고 내가 마주하는 공간과 시간과의 작별을 의미한다. 관계로부터 이별이자, 곧 해방이고 더 이상은 사라진 것에 대해 과거형으로의 기억만이 남게 된다. 물론 과거에 살았던 이 기억마저도 희미해져서 완전히 망각되면 그때야 온전한 죽음, 그러니까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 아무것도 아니었던 원래 상태로 원상 복귀하는 셈이다.
원래부터 없었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태어나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곧 죽음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기 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그리 녹록하지 못하다는 것의 관건 때문이 아니겠는가. 한 번은 거쳐야 할 과정일 텐데, 결코 쉽지가 않다. 우리는 모든 죽음을 타자의 죽음으로써만 인식한다. 단 한번도 내가 죽어 본 적이 없이, 누군가가 죽어가는 것만 봤다. 내가 죽고 나서 본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니 모든 죽음은 타자의 죽음으로 우리는 죽음을 마주했을 뿐이다. 내가 겪은 죽음은 아예 없다. 그래서 죽음은 철저하게도 객관적일 수밖에 없다. 혹은 누가 관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살아서 튀어나온 사람들이야 죽음이 주관적일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죽는 것도 피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개별적 사안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죽어 갈 것인가'에도 죽음을 대하는 태제도 다르다. 또는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어떻게 죽어야 잘 죽었다고 소문이 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래 그 누구도 죽어 본 적이 없어서 아무도 모른다. 죽고 나면 그 어떤 증명할 만한 논리를 전할 수도 없다. 내가 해봤는데 따위를 직역해서 "죽어 봐서 아는데 말이야"라는 경험론도 허용되지 않는다. 죽음에는 경험이 없다. 혹여 경험했다면, 그래 넌 귀신이구나. 죽고 나서 나오는 건 사람이 아니라 귀신일 테니까. 역시 죽음 이후의 존재를 가정한 인간의 상상력일 뿐이다. 죽음은 사실 상상조차 불허한다. 내심장과 뇌의 세포가 멈춘 이후는 내가 나를 모른다.
안회인가,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스승님,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제자야.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라고 현답을 내렸다.
죽는 거야 사는 것보다 중요하지는 않다는 의미를 말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어떻게 죽는 것보다 중요하다. 모든 죽음 동일한 것은 결과적으로 사라진다는 현상만이 공통적이다. 한때 웰빙이 웰다잉으로 된다는 신드롬이 있었다. 잘 살아야 잘 죽는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잘 죽으려면 일단은 잘 살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 이유이다. 그래서 공자는 사는거나 좀 신경 써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사는 것도 제대로 못 살면, 죽는 것도 제대로 못 죽는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고 미래의 죽음을 대비하여 지금을 잘 살자는 현실론으로 결부된다. 김광석의 노랫말 중에 우리는 매일매일 이별하고 산다고 했다. 이는 다른 말로는 매일매일 죽어간다는 은유의 표현이다. 매일매일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결국은 매일 죽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거다. 이 당연한 사실에 있어서 새삼 놀랍지 않는가?
법률적으로 죽음은 모든 계약의 해지를 의미한다. 어제 누군가에게 수억을 빌렸더라도 오늘 당사자가 죽음을 맞이했다면 채무채권 관계는 소멸된다.(물론 상속의 문제는 상속받을 사람의 선택사항, 상복 받지 않으면 빛도 상속될 수는 없다.) 이렇게 모든 계약이 소멸되는 것이다. 죽음은 즉 관계의 소멸이라는 것도 법률적으로는 맞는 이야기가 되는 까닭이다. 오늘의 계약은 내일의 이후의 이행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죽음은 이 전제를 무효로 만들어 버린다. 장래에 관계의 청산과 같다. 죽고 나서도 유효한 약속은 없다. 모두 무효. 효력이 없음, 효력의 상실이라는 것이 곧 죽음이다. 노랫말처럼 우린 매일 매일 죽어가면서도 미래를 전제로 계약하고 이익에 대해 사투하듯이 달려들어 챙기려 든다. 혹시 모르지, 지금 당장에 죽을지라도 끝까지 이익에 매달리는 삶은 과연 무엇일까라고 묻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죽을 죄를 지은 놈도 죽고나면 그 죄를 사면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다. 죽음은 죄가 해지된다는 뜻이고 더 이상 처벌도 없으며 처벌의 최대치가 곧 죽음이다. 죽음은 모든 관계를 무효화시키니 상당히 편리하다. 죽은 사람에게 계약을 요구할 수가 없으니까. 요구해봤자 아무것도 이행이 불가능하다는 걸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큰 용서 또한 죽음.
그러나 달리 말해서 죽어 가야만이 오늘을 산다. 지금 우리 역시 죽어가길래 오늘을 버티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배고파도 안 죽는다면 밥도 안먹고도 버틸 수가 있을 테니까. 영원하면 좋을 거 같지만 결코 아니다. 열심히 살자는 것도 다 죽기 때문에 가능한 인간의 유한성이 가끔은 고맙다. 혹여, 무한대로 계속 돈 벌고 밥 먹고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거라면 이게 곧 지옥 같아서다. 수백억 년을 살았던 별도 언젠가는 식어가는데 사람인들 영원하다는 게 사실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다 마지막인데 기분 나쁜 사람이 있더라도 내 삶에게 화해하듯이 내려 놓기를 바란다. 사는게 다 결과는 똑같으니 따져 아둥버둥도 부질없는 거 아니겠는가. 괜히 기분만 잡칠 뿐이다. 짧은 인생시간에 사랑하고 살기에도 짧은데 미워하면 불편한 시간만 자꾸 길어질 뿐이다. 사진을 오래 찍다보면 세상의 모든 풍경이 죽어가는 것을 본다. 시간은 죽는 게 아니라 사라진다는 거였다. 다 사라질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동안만이라도 손이나 한번 더 잡는게 맞다. 악달 받게 살아봤자다. 이거니는 죽었나 살았나? 그런들 뭔 소용인가. 자신의 죽음조차도 알리지 못하고 부고장 조차 만나지 못한다면 그 또한 슬픈 역사가 아닐런가. 시간하고 원만히 사귀는 것. 그래서 우린 오늘도 열심히 잘도 넘어가듯 시간을 넘는다.
그래 우리 열심히 잘 죽어가자. 응?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