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노비들이야 관습이나 풍습 혹은 예의를 익혔어도 지식적인 교육은 받은 것도 없었으니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살았을 것이다. 노비에게는 삶이란 것의 유일한 방식이었던 거다.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집안일을 하고 각종 농사를 지으면서 소처럼 일하며 커나갔을 테고 혹은 대감님 아드님 몸종 노릇도 했을 것이다.

 

나이가 차서 옆집 김 참판 댁에 꺾쇠의 딸, 곱단이 처자 노비가 있는데 혼례를 올려야 하는 돌쇠는 주인이 시키는 걸 거절할 수 없을 것이고, 곱단이도 거절할 수 없으니 둘이 함께 외거로 사는 거다. 아이가 낳고 싶어 낳나, 몰라서 낳나. 결국 아이도 태어나면 대감님의 소유의 노비인 것. 태어날 때 아버지가 대감댁을 모셨듯이 나도 지극히 당연하다고만 생각하고 한 번도 이에  궁금증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뭐 배운 게 있고 글이라도 알아야 생각을 하는 거니까. 바람이 왜 부는지는 몰라도, 구름이 왜 흘러가는지, 강물이 아래로 왜 가는지도 몰라도,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전혀 이상할 것도 하나도 없이, 대감님을 보필하고 섬기는 돌쇠라는 규정됨일 뿐이었다. 대감은 처음부터 대감이었고 돌쇠는 당연히 그 집안의 가솔이었으니 왜 대감을 모셔야 하는지는 처음부터 당연히 구름이 흘러가듯이 바람이 불듯이 궁금할 것도 전혀 없었다. 그게 돌쇠가 사는 방법이자 인생이었고, 곱단이는 돌쇠에게 시집와야했기에 대감님이 김찬판에게 몸값으로 얼마를 주었다. 고마워해야 했다. 곱단이를 대려 오게 돈까지 줬으니까 대감마님의 황송한 은덕이었라 믿었다. 마님은 장가를 가면 꼭 아들을 낳으라고 곱단이와 돌쇠의 혼례식에서 명령 같은 덕담을 지엄하게 내린다. 말이 곱단이지 투박한 노비 츠자의 억센 손 대신에 펑퍼짐한 허리가 아이를 잘 낳겠다는 관상이 선택의 조건이었다. 반드시 아들을 낳아라. 가솔들이 하나 더 늘어 남으로써 대감님의 재산을 불어나는 예상을 대감도 마님도 안다. 가솔들은 나의 재산이기 때문에 가솔이 늘어나는 것은 곧 생산력이 늘어나고 생산력은 곧 부로 연결된다. 그래서 돌쇠의 아들이 테어 나면 호적이 없는 대신에 노비 문서가 만들어진다. 대대로 이어갈 재산 목록이다. 내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노비를 벗어날 생각을 한 적이 아예 없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고 주인이 하라면 하는대로 하는 것이 돌쇠가 할 일이고 돌쇠의 존재할 이유이자 유일하게 살아야 하는 명분이다. 싫다는 말은 할 생각조차 없다. 어디 지엄한 분부에 대해 토를 달 수가 없다. 어디 안전이라고 감히 대들 생각조차 할 의문문이 떠오를 수 없는 돌쇠의 생 전체가 주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이게 대감의 아버지에서부터 지금의 대감에서까지, 그리고 대감님의 도련님까지 이어진다. 간혹, 노비가 드물게 똑똑해서 대감님 아들의 서당을 따라다니다가 글을 배운 적이 있다면, 그래서 아이가 글을 알게 되었다면, 글을 아는 노비를  죽였다. 글을 배우면 안 되는 노비가 글을 알면 죽는다. 노비는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의무만 있을 뿐 자기 스스로 하나 라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밥 먹고 똥 싸는 것뿐이다. 그러나 밥 먹어야 하는 것은 배고픈 고통이요, 똥 싸는 것은 배설이라는 압박의 고통의 감각이었다.

 

그렇게 돌쇠는 같은 마을, 참판 댁 곱단이를 아내로 맞았다. 대감 댁에 돌쇠만 있는 게 아니라 갑돌이도 있었다. 갑돌이는 대감집의 근처에 사는 친구인 김진사의 가솔인 갑순이를 한번 딱 마주치고서 사랑에 빠졌다. 아무리 못 배우고 몰라도 인간적으로 이성에 대한 끌림과 배격은 있는 터라서 갑돌이와 갑순이는 첫눈에 맞아 버렸다. 그런 갑돌이는 갑순이에게 장가들고 싶었다. 답답한 마음을 돌쇠도 잘 안다만은 대감마님이 허락을 해줄지 모르는 것이었다. 돌쇠가 장가가던 날, 곱단이와 친구였던 갑순이를 얼른 스치면서 본 적이 있었고 동네 물레 방앗간으로 나오라고 언질을 주었다. 그날, 갑돌이와 갑순이는 만났다. 갑순아, 내가 대감마님에게 갑순이에게 장가보내달라고 말해 볼 터이니 조금만 참아. 그런데 갑순이는 다른데 시집가야 한다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준다. 미치겠네. 우짜노. 갑돌이. 아 씨바, 그럼 우리 둘이 도망이라도 칠까? 아 턱도 없는 소리 하지도 마라. 지난해 옆 마을 아무개가 그 마을 누구랑 함께 도망쳤다가 잡혀 온 거 못 봤드나? 가다가 잡혀오면 다리가 분질러지고 팽생 절뚝거리며 도망간 놈이라고 구박받고 살아야 될지도 모르고 어떻게 잡히면 저얼단 날 텐데 함부로 그러는 거 아이다. 그래도 갑돌이는 열이 받는다. 왜 내가 사랑하는 갑순이와 혼례를 올릴 수 없이 대감마님이 시키는 곳으로  장가를 가야 하고 갑순이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보내야 한단 말인가?

 

사랑은 비로소 눈을 뜬다는 것의 또 다른 인식의 발견이자 표현이다. 아무것도 몰라도 그저 세끼 밥 먹고 죽어라 일만 하고 똥만 싸는 사람일지라도 몸에서 마음에서 끌어 오르는 욕망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갑순이와 함께 살고 싶은 욕망. 걸쇠처럼 곱단이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는데 장가가라니 가고 곱단이처럼 시집가라니 가는 식으로는 나는 못살 것만 같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낫이라도 들어야 하나. 이럴 바에는 우리 둘이 우물에 빠져 죽어 버릴까. 그래 동반 자살이 제일이 아니겠는가. 죽어서라도 우리의 사랑이 영원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무슨 원이라도 가질 것인가? 그날 갑돌이는 처음으로 어미와 아비를 미워했었다. 날 왜 노비로 살게 했는지. 차라리 낳지나 말 것을. 그러나 아비 어미를 탓해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오늘의 현실. 아비도, 어미도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살았으니 선택권이 없었을 것이고 나 또한 어미 어비의 욕망이자 주인의 욕망이었으니 온전한 선택은 없었으리라. 내가 나오고 보니 어미 아비가 노비였던 운명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렇다고 낫을 들고 대감을 협박할 수도 없고, 갑순이와 함께 살게 해달라고 간청해도 들어주지 않을 바에는 내가, 나를. 그리고 내가 우리를 죽이고, 이것의 당대 현실을 끊고 말리라.

 

그 다음날 아침. 돌쇠와 곱단이는 마을 우물에 물 기르러 갔다가 갑돌이와 갑순이가 우물에 빠져 둥둥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끔은 욕구가 스스로를 죽이고야만은 욕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들은 운명으로 부터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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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페이퍼 글 급조인데도 저녁 시간이 화살처럼 빠져 나간다.아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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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6-07 2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갑자기요?

yureka01 2017-06-07 21:55   좋아요 1 | URL
갑자기가 아니었을 거예요..
더 큰 욕망으로 작은 욕망을 버렸으니까요.......
갑돌이 아들 딸은 더이상 노비로 살지 않아도 되니까요....

결말이 뜬금없게 없게 보이지만,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었습니다...

종속된 삶의 이루어질 수없는 무선택적 욕망의 사랑에 해피엔딩같은 희극은 없더라구요.

나와같다면 2017-06-07 23: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낳지 않았을텐데..
본인이 노비라면.. ㅠㅠ

yureka01 2017-06-07 23:43   좋아요 2 | URL
그 때 당시에는 낳지 않는 것에서도 선택권이 없었기도 하였지요.
특히.. 태어날 때부터 노비로 살았다면 사는 행동 자체가 다른 생각 조차 들지 않았을 텐데,
노비인줄도 모르고 노비로 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니까요.
요즘 처럼 자기 정체성..주체적인 관계성..이런 철학은 상상도 못하고 살았을 테니까요.
소처럼 일만 시키면 사실 고단한 일상에 다른 생각이 끼여틀 틈도 없을 거 같았어요.

사대부들과 권력자들의 기록은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이 있지만,
피지배층인들의 스스로를 표현한 자신들의 기록은 없었죠.
그러니 추측만 해댈 뿐이랍니다.

커피소년 2017-06-08 12:53   좋아요 1 | URL

예.. 과거 노비들의 삶을 보면.. 억지 교배되는 가축이나 반려견과 같은 느낌입니다..

요즘이라고 뭐 달라진 것은 없죠.. 틈만 나면 연애와 결혼의 여부를 묻는 어른들이 많으니까요..

게다가 결혼식과 같은 허례허식은 아직도 헬 조선시대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 한 노비들의 “나 그래도 이 정도는 하고 살아”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허세와 비슷한 면이 없지 않아 있죠.

여기서 또 모순은 애는 낳지 않겠다면서 반려동물은 입양해서 외롭고 우울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 또한 존재는 다르지만 같은 의미에서 폭력이죠.

겨울호랑이 2017-06-08 07: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선시대 때보다 지금 분명 선택의 자유가 많아졌음에도, 사람의 뜻대로 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네요.. 우리 모두는 운명의 노예인 것 같기도 합니다...

yureka01 2017-06-08 08:45   좋아요 2 | URL
태어남이라는 것부터가 이미 시간의 노예가 아닐지요..ㅎ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대를 이어가는 시간을 또 넘으려 했으니까요.

커피소년 2017-06-08 12:55   좋아요 2 | URL
겨울호랑이님, 유레카님의 댓글 매우 공감 됩니다..

2017-06-08 0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7-06-08 08:44   좋아요 2 | URL
선사시대 사냥과 수렵생활 이후부터 계층 사회가 아닌 것이 없었드랬죠...
앞으로도 계층은 희박해질지는 몰라도 사라지지는 않을듯합니다.

강옥 2017-06-08 0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 모두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하잖아요.
오고 싶어 온 것도 아니지만, 가고 싶을 때 갈 수도 없고.....
어느 나라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이미 운명은 결정된 거나 다름없고요.
내 몫이 이것 뿐인갑다 생각하고 사는 거지요 뭐.
다시 태어난다 한들, 전생을 기억할 수도 없는 거고 ㅎ

yureka01 2017-06-08 08:46   좋아요 1 | URL
네 그럼요..이왕 되돌릴 수 없다면
차라리 이게 내 몫이려니 하며 긍정해야 사는 날 까지 살 수 있잖아요..^^.

cyrus 2017-06-08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그렇고, 옛날에도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해 사랑을 포기하는 일이 많았을 겁니다. 사랑을 포기해야하는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서 결국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yureka01 2017-06-08 08:56   좋아요 0 | URL
사랑과 제도가 충돌하면 벌어지는 불행들이죠....^^..

2017-06-08 1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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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8 13: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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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8 16: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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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8 16: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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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8 1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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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8 2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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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9 19: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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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9 1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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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9 2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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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14: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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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3 0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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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3 16: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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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3 17: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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