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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 - 사진 찍는 인문학자와 철학하는 시인이 마주친 모나드
이광수.최희철 지음 / 알렙 / 2016년 5월
평점 :
인도 종교를 전공한 인문학자이자 사진 평론가인 이광수와 고깃 배를 타는 시인 최희철, 이 두 저자의 인문학에 대한 각자의 사진과 글을 콜라보를 이루며 하나로 묶었다. 이광수 교수는 이 책에서 사진이 사진으로 끝나지 않고 사진을 통하여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를 사진에서 끌어 내는 것을 주장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런 관점에 입각해서 이 때까지 사진을 찍어 오면서 사진에 대한 관점과 이야기를 붙혀 왔었다.
한 때 누군가로 부터 사진에 글을 붙이는 것이야 말로 "사진에 대한 폭력"이라며 상당한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진에 글을 붙이는 행위가 사진에게 폭력적인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는 위에서 먼저 언급한 사진을 통해서 사진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삶에 대한 직간접적인 교통의 의미로써 의도한 것이 사진에 대한 폭력이라고 했으니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했다.
사진에 무슨 글이 붙음으로써 규정됨을 거부한다는 사진 자체주의적 시선도 나는 거부감이 없이 받아 들인다. 없다고 해서 문제도 아니고 있다고 무슨 탈이 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있거나 없거나 그것으로 폭력으로 까지 비약시킬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글의 사상이 문제인가, 사진 자체로써 순수함만이 사진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가?라는 질문을 자주하게 된다.
폭력이란 누군가 가해자가 있다면 피해자가 있기 마련이다. 사진에게 글이 붙는다고 사진이 피해자가 된다는 논리인데 글쎄 사진이 무슨 유기물체도 아니고 피해를 입는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도의 순수성이란 것에서 보자면 사진은 사진일 뿐이다. 십수년 사진을 찍어 오면서 사진이 무슨 대단한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사진이 차지하는 위상이라는 것은 절대적이지도 않다. 사진에 모든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도 믿지는 않는다. 다만 사진이 찍는 행위를 통해서 인간이 만들어 낸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시도하고 새로움의 갈구에 그만한 영향이 있으면 된 것이라고도 생각했었다.
문제는 따로 있다. 사진에 글을 붙혀서 느낌을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사진에 글이 없더라도 사진으로 이의 없이 느낌을 가지고 보려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와 반대로 사진만 있고 글이 없는 사람들은 사진에 글을 붙인다고 "사진에 대한 폭력"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질타한다. 사진에 글을 붙인게 그렇게 폭력적일만큼 나쁜 짓인지 누가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대체 피해를 입어서 상처를 얻게 된 것인가?
이 책에서도 저자는 사진으로 시선을 공유하고 사진을 통해서 다양한 주장과 이야기를 나누기를 희망하는 차원에서 책을 낸 목적을 설명한다. 특히 사진가에게 걸맞는 친구가 역시 시인이다. 결국 사진가와 시인이 만나 이루어내는 가치의 향유를 공유하고 이를 책으로 엮었다는 점에서 참 신선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사진 하는 사람들의 편협성은 내 진즉에 학을 띤 측면에서, 결코 좋아보이지도 않는다. 사진이 왠말인가. 사진을 보여주는 도구에 대하 집착하는 특성이 자칫 카메라의 물건 따위에로 애정을 전폭적으로 옮겨가는, 이름바 본질 흐림을 너무나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사진가의 철학과 시인으로써의 문학적인 철학이 오묘하게 하모니를 이루는 측면에서 보자면, 현학적인 것도 좋았고 시적인 감성의 액기스를 들어 내는 점도 좋았다.모릅지기 카메라 수백만원짜리는 아깝지 않게 팍팍 질러 대면서 고작 책 한권 값에 주눅드는 일부의 사진가들을 보면 그다지 달갑지도 않고 그렇게 찍은 사진은 깊이가 없다. 현란한 욕정의 감각에 충실한 단말마적이고 단세포적인 얕음의 사진이란 기교일 뿐이지 예술로 승화되지는 않는다. 지식과 경험, 이론과 실제가 만나서 어울림이란 것은 역시나 사진가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인 요소중 하나라고 믿는다. 이것도 없이 카메라만 들면 카메라가 사진을 다 해줄 거 같았으면 자신의 역활은 무엇일까, 언젠가 인공지능이 발전해서 인공지능이 찍어내는 사진을 생각해보면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사진은 또 어떠할 것인지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이처럼 사진을 즐기는 방법중 하나가 찍는 것도 물론 포함되겠지만 더 광범위하게 즐기는 방법이 누군가 담은 사진을 더 많이 보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이런 원칙에 입각해서 사진블로그에 등록된 유저임에 따라 거의 대부분 사진유저들의 사진을 많이 접하고 있다. 문제는 몇몇 일부는 사진을 남발한다. 비슷한 사진을 하루에서 수시로 몇번씩 사진을 게시하는데 사실 외면하고 싶은 적이 많았다. 필름 사진과 다르게 셔터를 마치 기관총처럼 방앗쇠를 당기듯 셔터를 눌러대고 빗맞은 것인 과녁의 주변에 맞은 건지 하여간 사진을 너무나도 많이 올린다. 다양한 시선이나 사유가 아니라 무슨 꽃이라면 그 꽃만 거의 두 달가량 매일 두서너편씩 포스팅하며 사진의 제목도 없이 넘버링만 열거하고 만다. 보는 사람이 지칠 지경이다. 그러나 나는 차마 이런 남발된 사진이라고 함부로 의견을 피력하지는 않는다. 사진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보기가 난망하다고 솔찍하게 고백할 수는 없다. 님아, 좀 자재요. 과유불급이요, 너무 많이 올리는 것도 좋지만 독자들이 볼 수 있는 틈은 줘야죠. 그렇게 남발하듯이 사진을 찍고 포스팅을 하면 그래도 누구가 봐달라고 사진을 게시하는 목적이 부합되지 않지 않을까요? 보라고 게시하는건가요.아니면 사진저장용으로 올리는 건가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물어 보지는 않았다. 사진 한 장을 찍더라도 시선의 사유가 들어나는 몇줄의 글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일언 반구도 없이 오로지 사진의 숫자를 매겨서 수십장을 매일 매일 2-3편씩 게시하고 누가 보던지 말든지 돌맹이 같이 수면에 파문이 일어나지도 번지지도 않게 던진다. 나는 대체 과연 이런 사진 과잉 행동을 언제까지 이어질런지 지켜볼 작정이다.
디지털 시대의 카메라도 디지털화되어 감에 따라 이제는 필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일부 사진 전문가의 고난도 작업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는 대형 카메라 혹은 중형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작업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러나 이제는 일반적으로는 대중적이면서도 간편한 디지털카메라가 대세를 이룬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쉽고 간편하게 사진을 광범위하게 찍어대다 보면 필름 시절의 필름 한 컷의 조밀한 내면이 간편성 때문에 모두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사진 선배들이 그렇게 사진을 예술화시키고자 각고한 삶을 살았고 그렇게 겨우 예술화시켜낸 업적에 비추어 디지털 시대로 넘어오면 소위 시쳇말로 " 개나 소나"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카메라가 값싼 사구려가 되었다고 사진이 싸구려가 될 수는 없는 것임에도 스스로 싸구려급으로 전락 시키는, 이른바 폭탄이 터져 비산하는 파편 같은 사진은 시간에 대해 무슨 파괴력 있어서 어떤 가치를 점유하고 있을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고 지루하고 식상해지는 것은 인간의 감각은 같은 자극을 계속하게 되면 최초의 감각의 반응성이 점점 낮아진다는 원리를 모르거나 인식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원인은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래서 부단히 사진의 기본적인 소양이 없었길래 다양한 평론가들의 지식과 경험, 그들의 사진학은 연구하는 목적에 참고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았다. 내가 찍는 사진이 비록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없을지언정, 쓰레기로 취급받고 쓰레기의 의미 없음에 버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존재의 자신의 가치는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이라는 것이다. 스스로가 도매금으로 전락시키지 않아야 할, 스스로의 사진에 관한 절제력이 내부의 역량화시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사진평론가와 시인이 만나서 이루어 내는 다양한 인문학적인 소양과 지식 그리고 촘촘하고 조밀하게 짜인 감성의 덩어리는 만나는 기분이었다. 역시 사진을 좋아한다면 사진에 관한 책을 다양하고 밀도 있게 섭렵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과정이 아닐까 한다.
사진 한장을 찍더라도 깊은 사유가 나오는 사진은 찍는 순간부터 뭔가 다르다. 사진을 찍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에서 사진에 담기는 치밀한 사유는 내포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와 반대로 넋나간 실수같은 사진은 아무생각없이 담은 사진이라는 것도 너무 뻔하게 들어 낸다. 한장의 사진을 가지고 어느 작가는 한시간 넘게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반면에 자신이 찍은 사진에 대해 자기가 한마디로 하지 못하는 경우는 일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내가 찍어도 내가 무슨 사진을 찍은 것인지 내가 모른다면 그럼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차라리 찍지를 말던가? 자신이 찍어 놓고 자신의 사진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사진은 그럼 누가 찍은 것인가 의문은 자연스럽다.
지난 연휴 때에도 카메라를 손에 놓지 않고 짬을 내서 사진을 찍었다. 비교적 많이 찍을 수 없는 사진이었지만 그나마 카메라를 들 수 있는 허락에 대해 감사한 기분이었다. 이거라도 들지 못했더라면 과연 나는 지난 시간의 존재론적인 증명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내가 그곳에 있었음을 사진으로 기억은 더 선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고 사진을 통해서 시간이 흐르는 과정과 의미에 대해 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시간은 끝이 없다. 영원 그 이전에서부터 영원 이후까지. 그 사이 잠시 잠깐의 존재론적인 각성이 없이는 대체 내가 이 세상에서 나와 살아갈 이유를 만들고 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곳에 있어서 그곳을 찍는다는 이 단순한 사진 찍는 것.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자신의 시간 속의 존재를 항상 죽어가고 있음을 스스로가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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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919/pimg_7680301471491219.jpg)
빛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
정주민의 풍습을 알아도 소용없다.
찬연한 생명이 깃들은
처연히 다니는 나날에
매일매일이 기념으로 묵언 기도가
정착한 자의 하루 가지고는 부족한 것.
정처 없는 방랑에 만난,
빛의 마리아.
(네이버 사진블로그에도 포스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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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읽은지 좀 지났는데 연휴때 리뷰 적었습니다.
이제 올리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