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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털 - 노순택 사진 에세이
노순택 글.사진 / 씨네21북스 / 2013년 5월
평점 :
1. 짐승의
피부에는 털이 있다. 털없는 육상 동물은(물고기는 비늘이라도 있다. 응?)언듯 떠 올릴 수 있는 동물이 없을 만큼 털이 수북한게 일반적이다.
그의 사진 에세이집 책 제목이 "사진의 개털"이란다. 개털 같은 사진.
털이 빳빳하게 고추 세워진 것처럼 터래기 하나 하나가 모여서 그 짐승의 형상을 이루는 듯이 사진도 지구라는 짐승의 털처럼 털이 이미지였다는
것에서 왜 사진의
털이라며 이야기를 한다.
인간은 진화를
하면서 언제 부터인가 털다운 털을 잃어 버렸다. 솜털같은 털이 있어도 털없는 피부로 나타났던 것이다. 털이 있던 인간과 털이 없어짐으로 인한
인간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자연의 조리와 섭리, 그리고 비완전한 인간의 부조리. 털이 있던 자연의 조리와 섭리로 부터 언젠가 인간은 비완전한
인간의 부조리로 진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의 털은 점점 은밀한 부위로 숨어 들고 감춰지고 보이지 않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참 부조리하다. 참 젠장같아.
2. 세상에 완벽한
도구는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불완전한 도구도 없다. 인간이 만든 도구는 모두 인간의 속을 닮았다. 때론 한계가 엄현히 존재하고 때론 엄현한
한계에 주저한다. 사진은 이런 주저함에서 도구의 한계를 느낀다. 한계가 있음에도 도구는 오늘도 열심히 찰칵거리며 셔터를 눌러대기 바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도구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무던히도 애쓰지만 애쓰면 쓸수록 인간의 불완전함은 짙어만 간다. 사진은 딱 여기에 있는 털일
뿐이다. 이노무 털이 털 속의 불완전해서 아푸다고 소리치며 털이 빳빳히 세워졌다. 빳빳히 세워진 털같은 사진. 이게 노순택 작가의 사진처럼
보였다. 사진들이 아주 아푸다. 그는 사진의 털로 인간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들어 낼 줄 안다. 부끄러운 자화상같은 우리 내부의 치부같은 사진이
털이였다. 그의 사진을 보면 내가 부끄럽다. 젠장.
3.
사람들은 작더라도 뭘 하고 있다며 쪼대고 빌붙을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로 하고 돈도 많이 든다. 그는 사진으로 쪼대고 빌붙혔다. 쉬운 말로
쪼대고 빌붙는다고는 하나 이게 말처럼 결코 쉽지 않다. 현장에서 매체 사진 기자처럼 월급이라도 꼬박꼬박 받아 먹는 직장인의 이것의 안정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을까? 5년만 시간을 달라고 하여 선듯 허락한 그의 아내가 더 대단하다. 보통 여자는 미친놈아 이혼하자라고 끝낸다. 그는
아내에게 빌붙었고, 현장에서 빌붙었고 사진에 빌붙었나 보다. 나도 좀 빌붙기
어떻게 안될까 싶어도 마누라에게 빌붙지 못한 사정이 크다. 대부분 빌붙기 잘하는 멋찐 남자 뒤에는 남자보다 몇배는 더 대단한 악착같은 여자가
있더라. 흔히 소크라테스가 유명해진 것은 철학이 아니라 그의 처 때문이란 오래된 소문이 인정된다. 세상엔 젠장을 극복하는 아내도 있다. 위대하게
쓰리. 총각들은 젠장맞을 여편네를 뛰어 넘는 위대한 아내를 찾아라. 그럼 자신이 위대하게 되리라. 다소 어렵긴 하지만서도.
4. 그런데 참
이상하다. 간혹 사진을 보다보면 점액질이 나도 모르게 나온다. 가수 정태춘이 목에 현수막을 감고 경찰에게 끌려 사진을 보고 코끝이 찡하게
나왔다. 눈물보다 먼저 콧물이 흘렀다. 가수가 노래 부르지 않고 왜 저렇게 끌려가야만 하는 걸까? 사진을 보았더라면 그저 사진일 뿐인데 사진을
읽어 버리니 사진의 겉과 안이 기막혀서 콧물부터 나온다. 울쩍 울쩍 그렸다. 왜냐? 작가는 고작 사진 밖에 찍울수 없는 한계를 내가 읽어 버렸기
때문이다. 차라리 카메라 내평개쳐 버리고 나도 함께 뛰어 들지 못한 우리 모두의 죄책감과 자책감이 카메라를 미워하게 된 사진이였다. 정말 마음이
불편하게 감동적인 사진들이다. 사진한장으로 마음의 모순적인 감동으로 휩싸이는 것은 사진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아, 쒸펄
젠장.
5. 사진은 지독한
의문문이다. 절대 답을 도출할 수도, 답이라고 누군가 제시 할수도 없는 의문문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서 누군가 시원 스럽게 규정을 시켜 낸
위대한 작가를 우리는 찾고 싶다. 그러나 그런 시원스런 규정이 규정으로 안착되는 순간부터 의문은 새롭게 시작된다. 도그마에 빠지고 딜레마에
방황하게 만든다. 이게 사진이 zot같은 이유다. 아 그럼에도 오늘도 뭘 찍을 것인가하고 항상 사진의 규정을 머리 속에 맴돌며 자신 스스로
암시를 걸어 대고 있다. 아 젠장맞을 사진.
6. 선문답과
화두에 사진은 그 가운데 있는듯 하다. 현실의 이곳에서 확실하게 증명됨이 바로 시간의 지나는 순간부터 부재해 버렸다는 지독한, 지독한 악몽같다.
마치 꿈에서 지나쳐 버린 장면에서 우린 헛소리 같은 화두를 붙잡듯 사진 한장을 붙잡고 지독한 악몽을 꾸는듯이 손에 든 사진 한장이 바르르 떨고
있는 것 같다. 사진들이 참 지독한 선문답의 화두를 뿌려댄다. 젠장같은 숨막힘.
7. 제어 안되는
우울증이 되어 버린 사진들. 나는 노래 한곡 들으면서도 그 곡을 부른 가수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것에서 우울증을 느낀다. 프리디 머큐리가
그랬고, 비지스의 깁슨이 그랬다. 어느 가수든지 생후에 듣는 곡은 다 그러하다. 그 곡을 듣고 있노라면 그들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듯
노래를 부르고 해 져무는 황혼의 물들어 가는 색조에 감탄 하듯이 그 노래가 원더풀 월드라며 루이 암스트롱의 걸죽한 허스키 보이스와 비슷한
역설의 사진들을 보노라면 너무나도 슬퍼 온다. 아름다움은 미학의 우울증은 아닐까. 어느 시가 슬프고 어느 시가 아름다운 현재를 구가한들 펜대
굴리는 글쟁이나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작가는 심한 우울증 걸린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진 담을려고 그 속의 아비규환같은 환경
속에서 분노가 지나가고 나면 급기야 터져 나오는 결론의 우울증들. 젠장맞지 않을 수가 없다. 현대의 그 어떤 것들이든 자본의 우울에 자유롭지
못한 자들은 결핍의 우울과도 닮았다. 결국 인간이 자본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털은 점점 사라져 버린 우울증 걸린 환자가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진엔 우울증이 내재되어 있고 모든 사진엔 우울증을 희석시키는 바이그라가 덧발라져 있다. 우울증엔 비아그라가 특효약인지도 모른다.
심장은 오늘도 우울하다. 졸라게 벌떡거리다가 어느 순간에 사진 한장이 꽉 숨을 멎게 하듯이...역설의 비아그라 같은
사진이다.
8. 그의 사진에는
현상에 대한 설명은 없어도 사진을 통해서 촉구를 강요 받는다. 악날한 부조리와 부도덕한 자본에 대하여, 누군가 멀찍히 서서 빈자가 빈자를
가해하고 핍박하도록 자본으로 부조리로 조종하게 만드는 것을 촉구하고 각성하게 만든다. 용역에 동원된 비싼 등록금에 조금이라도 보태고자 몇푼
벌려고 용역업자 업체에서 일당 짓도 역시 가난한 학생들이 아니면 제벌가 도련님이나 갈려는 곳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고 이 용역 깡패짓에 가해를
받는 자들 역시 자본에 휘둘리며 서로가 서로에게 생채기를 입히는 짓에 대하여 촉구한다. 어디서 부터 문제인지 어디서 부터 꼬인 모순들인지 그는
질기게도 촉구하고 각성을 요구한다. 그런 사진의 권리와 의무를 잊지 않는 다큐작가의 카메라는 대체 어떻게 시달리고 있을까 싶었다. 마음이
시달리는 만큼 카메라는 시름에 깊어 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카메라야. 미치지 않겠는가? 아니 도저히 미치지 않고서야 산다 말할 수
있는가? 카메라를 들면 사람들은 조금씩 우울증에 중독된 듯이 미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젠장. 난 안미치고 싶다. 그러나 안미치고는 배겨 낼
제간이라도 있나? 병신아. 그래 조금씩 미쳐가자. 아니 미쳐가고 말런지도 모르는 암시가 엄현하다.
9. 지금 밀양
한동네에서 한전에서 시공하는 송전탑 때문에 노쇠한 노구를 이끌고 힘없이 쇠사슬을 몸에 두르고 포크레인 바퀴에 온 몸을 칭칭감고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물론 사진으로 보였다. 대체 그 송전선이 어쨋길래 평생 한번도 시위라는걸 해 본 적도 없던 할매들이 오기로 죽을려고 하는
걸까? 어쩌면 도시민들이 그 할매들을 죽게 하는지도 모르는 도시의 가해가 그 동네를 질곡으로 빠트리게 하고 있다. 물론 사진으로 봤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사진은 냉정할 뿐이다. 그래서 어쨋다는 건가? 그 할매들만 아니였더라면 도시인들은 전기를 그저 더 풍족하게 쓸 뿐이고
그 탑으로 인해 빚어지는 고통은 냉정하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처한 이 비극의 부조리는 다 이런 식이다. 사진도 이런 식이고, 사진은 그저
촉구될뿐 각성을 강제하지도 못한다. 그 어느 도시인도 송전탑이 세워지지 않을만큼 전기를 아껴서 탑이 세워지지 않아도 좋을 그런 생각은 역시
부조리 할 뿐이다. 다 이런 식이다. 어느 도시민의 철거된 상황도, 어느 상황도 다 그런 식이다. 그래서 사진은 어떻다는 건가? 괴롭지 않는가?
그의 사진들 들여다 보면 자학하는 소주 처럼 쓴 이유다. 사진은 촉구하는 반면에 한편의 마비시키는 환각제와 비슷한듯 하다. 아 사진 보면 볼수록
어지러운 느낌이 팍팍 들었다. 오우 쉿. 세상 꼴이 결코 만만찮은 소주 백병 마신 취기의 마비가 전신을 아우른다. 어떻게 이렇게 된거야.
응?
10.
내가 사진 담는
분야와는 한참이나 멀리 있는듯 하였지만 결국은 우리 곁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면에는 항상
분노와 우울이 요동을 친다.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응어리진 우울. 현실에 있어서
빚어내는 투박한 질그릇같은 사진. 바닥에 떨어 뜨리면 조각조각으로 쨍그랑하며 깨져 버릴 것같은 사진의 모순, 모순으로 빚어진 분노.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미래를 투시하게 되는 불편함들. 그래서 사진을 담고
있을까 싶었다. 사진은 과거의 현상을 나타내며 미래를 암시하려 한다. 이순간에 담긴 사진은 곧바로 과거로 전락해 버리는 그 가운데에서 앞으로의
미래를 예시코자 하는 행위가 사진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의 다큐 사진과 함께 에세이 글에서 나타난 과거의 현상을 현재를 반영한 미래의 예시로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닐까 싶었다.
11. 오늘 밤은
소주 맛이 왠지 사랑스러울거 같다. 책 한권이 "젠장이라는 안주"가
된 이상, 안마시고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글쓰기 진짜 어렵네. 이노무 닭대가리...리뷰에 고작 몇자 되지도
않는 글 나부랭이 가지고 책한권 받아 먹고서 쓸려니 또 주루룩 거린다.
괜찮아. 소주 일병
들어가면 영화 "말죽거리잔혹사"에서 권상우(현수역)가 한바탕하고 학교를 뛰쳐 나올 때 일갈성.
"ㅅㅂ ㅈㄲㄹ
ㄱㄹ!~~~
"라고 하면 눈물이 쏙 들어가 버리고 말거야. 흐.
PS : 2013년도 사진 블로그에 써두었던 리뷰를 알라딘 서재에 제게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