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가 소설이 되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사실 확인이나 검증 없는 뉴스로 인해 억울한 사람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뉴스가 뉴스 관련자에게 휘두른 멍에는 분명 억울함을 만든다. 뉴스에 억울한 사람에게 항변권도 동시에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그 뉴스가 일방적으로 거의가 비슷한 논조의 목소리로 통일된 걸로 나온다면 소위 작전같이 일사불란한 오류라는 판단 미스의 카드섹션이 같아 보여서이다. 노동 신문만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논조가 거의 비슷하다면 난 일단 뉴스의 신뢰성에 의심하게 된다.
사진을 찍으면서 관점이란 것을 생각한다. 다양한 각도와 위치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사진의 프레임과 위치와 화각에서 결정된다. 사진이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담는다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이와 같이 뉴스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뉴스의 논점은 사실이거나 진실이거나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쪽 편의 일방적인 관점의 시선으로 보면, 편견이 작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정치성의 뉴스는 더더욱 그러하다. 객관적 사실은 어떤 시선과 어떤 관점에 따라 진실성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뉴스가 추리 소설이 되면 소설가들이 섭섭해서 운다.
사실을 하나하나 파고들고 자료를 수집하고 증인의 인터뷰를 따며 인터뷰를 다시 확인하고 그래서 종합적인 판단을 언론의 기자가 하는 것을 취재라 하고 이것을 기사로 내는 것인데, 누군가 일방적으로 전해주는 걸로 그것만 전달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하다. 기자 직업이 받아쓰기는 아닐 것이다. 사진은 꼭 현장에 가야만이 찍을 수 있다. 뉴스도 마찬가지로 현장에 가서 찾아 봐야 한다. 만약, 현장에 가지 않고 나온 사진이라면 그것은 사진이라고 하지 않고 이미지 그림이라고 한다. 뉴스가 그림처럼 그려지면, 앞서 말한 억울함이 생기게 된다. 뉴스가 얼마나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으며 기업인들에게 메시지 넣어 개인적 청탁이나 하고 공짜 점심을 그리워했을까? 기름칠한 기자에게 공정성은 너무 오버스럽지 않을까?
"왜요?"라니, 어디서 장난 같아 보이나? 기자 간담회에 증인의 답변에 왜요?라는 기자는 왜요라는 딱 하나의 반응으로 수준을 결정해버렸다. 기사마다 기자의 실명이 공개되어 있는데 기자 이름으로 기사를 검색해보라. 얼마나 이그러져 있는 관점이 편중된 기사인지 아닌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말의 어투뿐만 아니라, 자세와 태도, 그리고 그간에 쓴 모든 저작물과 글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왜요?"라는 질문이 얼마나 개그 수준인지는 뉘앙스와 맥락에서 느껴지기 충분하다. 나는 감정의 절제력이 좀 부족한 사람이다. 받히면 바로 받는다. 뒤끝 작렬이고 욱하는 성격이 있다. 사람 살고 죽는 목숨 걸린 일이 아니면 여간해서는 핏대 세우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한번 '욱'하면 그다음은 결론을 생각 안 하고 저질러 버린다. 살면서 얼마나 조심하며 휘말리지 않으려는 자각을 매번 하고 있다. 그런데 특히 억울함과 울분이 생기면 참기가 참 곤란하다. 누가 실컷 설명했는데 "왜요?라고 한다면?" 이세끼 나랑 싸우자는 거지? 나와 새꺄 한판 붙자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참 대단한 억제력이다. 어디서 본 거 같지 않나?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라고 했다. 맞다. 기자가 막가자고 하는데 막가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참는다. 대단한 절제력이자 인내력이다. 수준 떨어지는 조무래기들에게 질문받는 고도의 인내력은 빛을 발한다. 기자들의 수준은 이미 언론의 수준이었다. '왜요'라니?
사진을 찍어 오면서, 가까웠던 친구에게 한때, "사진의 수준을 높이라"라는 충고 혹은 비난을 많이 그리고 자주 받았다. 친구가 나의 사진을 보고 얼마나 형편없이 봤을까. 사진이나 글을 쓰면서 항상 걸리는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수준을 높이려 하다 보면 이게 또 얼마나 사진의 관념적인 허영이 생기지나 않을까 염려되는 부분이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갈팡질팡. 사진에서만큼은 겸허하자였다. 겸허는 겸손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사진 수준이 형편없는 것은 나의 사진 관점이 형편없어 보였을 것이란 추측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가지지 못한 수준을 무슨 대단한 작가들처럼 끌어 올리기 위한 방편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사진 공부를 꾸준히 하려고 들었으며 사진 책을 자주 읽기 시작했던 건지도 모른다. 예술적인 부분에 대해 수준을 논하는 것은 사건의 진실이나 사실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기에 겸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없는 사실, 없는 진실, 있는 사실, 있는 진실을 역으로 엮으려 들었다면 겸허하기란 참 곤란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진은 참 괴로운 거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수준이 결정될 수도 있고 예술이란 명확히 떨어지는 사실적 관계와는 무관한 것이라서 말이다. 이렇듯이 우리 일상에서도 삶의 태도나 자세, 말과 행동에서 수준은 일반적으로 나온다. 비단 예술뿐만 아니라 고상함과 저급함의 차이는 그 뉘앙스에서 얼마든지 알아차리고도 남는다. 그런데 글로 밥 먹고사는 직업인 기자가 고작 "왜요?"라니 코미디보다 재미는 없었다.
어느 사람치고 완전한 사람은 없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뜻이다. 이는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좌든 우든 별개이다. 아무리 진보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살다 보면 때로는 손에 오물이 묻을 경우가 생긴다. 사람 사는 일이 고고한 산 위의 낙락장송처럼 이슬만 받아먹고살지는 못한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얼마든지 오점이 생길 수도 있다. 실수를 한 번도 없는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대놓고 도둑질하고 부정한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이익을 취하려 하는 것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안타까웠던 노무현 대통령의 사고 소식, 노회찬 의원의 사고 소식은 너무 가슴 아픈 일이었다. 적극적으로 방어도 못하고 스스로의 결벽증에 자신을 먼저 파괴시켜 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누군 태산 같은 부정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고개 쳐들고, 내가 뭘 잘못했니라며 당당하게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모르며 그로 인해 생긴 피해자들이 울부짖어도 모른 척하며 무시하기 일쑤인데, 살다 보면 생길 그 작은 티클 하나가 암 덩어리처럼 자기를 파괴시켜 버리는 것과 어떻게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정한 일에도 계획적이냐 의도적이냐와 실수이냐 과실이냐에 따라 경중의 차이가 크다. 평생 살아온 삶이 가난한 사람을 돌보려 했던 그 진정성이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티클만한 부정에 그동안 삶의 전부를 도매금으로 매도 시켜버리니 스스로의 자괴감은 얼마나 크게 자신을 학대했을까라는 점이다. 누군 당연하게 생각할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본 그들의 삶이 그렇게 부정당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누가 그렇게 살지도 못했으면서 비난하기는 너무나 쉽다. 누구처럼 한 평생 동안 사기꾼같이 산 놈도 안 죽고 뻔뻔하게 사는데 왜 스스로를 죽였을까,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사건이었다. 여기에 언론이란 놈들은 불씨 하나에 기름을 붓고 불을 키우고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처럼 비난 일색이니 이걸 견딜 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 이른바 언론 타살은 그렇게 이루어졌던 것이고 그에 대한 기사를 쓴 기자들의 글에 대한 책임은 결코 적다할 수는 없었으나, 어느 기자 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펜의 힘은 총칼보다 강하다고 한다만은, 펜도 때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심리적 무기나 마찬가지다. 전직 대통령이랍시고 깍듯하게 예우는 못할망정, 버스에 올라타면서부터 고속도로를 달려 청사 앞 포토라인에 서는 전 과정을 헬기까지 띄워서 망신을 주며 있지도 않는 논두렁 시계를 사실인 것처럼 흘려듣고 받아쓰기 한 세끼들에게 어떻게 조져 버려야 마음이 후련할까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건 비단 나뿐만 일까? 당신 본인 자신은 자신에게 퍼붓는 비난을 감내할 힘이 있을지라도 그 주변 사람들 전부 털고 가족까지 먼지 털듯이 뒤져 심리적인 압박을 가한다면 일반 시민에게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는 짓거리가 아닐까 한다.
내가 알고 지낸 사람들의 전부를 알 수는 없다. 가끔 내가 나를 잘 모를 때도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평가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과거의 행동과 결과를 통해서 현재를 유추는 가능하다. 이유 없는 삶은 없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행동이라도 심리적 요인은 다 있기 마련일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현재를 판단하기 위한 과거의 기록이나 언행을 통해 오늘을 유추하는 방법론일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사진을 15년간 틈틈이 찍어 왔다면 오늘날의 판단은 '아 내가 사진을 참 좋아했구나'로 평가받을 수 있는 이치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어떤 행동이나 결과물로 오늘을 따져 보는 것이 차선은 될 수 있기도 하다. 사람은 삶의 무수한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을 추적하다 보면 그 흔적들이 오늘날의 삶의 얼굴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 흔적을 통해서 오늘날의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 어떤 사람의 평가를 얼마나 알고 쉽게 평가할 수 있을까. 어떤 이익을 위해서 관계했던 사람들의 인식이나 기록 등등 이런 것이 중요한 판단의 근거로 평가하는 게 옳은 방법이다. 비록 심리적인 의도를 완벽히 파악할 방법은 없다. 다만 근거의 자료를 증거로 삼아 재단하는 것이다. 선한 삶을 살았는지 악행을 일삼고 살았는지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그와 관계한 사람들의 증언도 물론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어느 한 방향의 일방적인 뉴스에 매몰되어 가치 편향이나 인식 편향이 확립된 경우이다. 이젠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구체적인 것은 직접 찾을 수야 없으나 간접적으로나마 다양한 sns 루트를 통해서 얼마든지 크로스 체크도 가능하고 이젠 심지어 사건의 직접 당사자의 의견도 발표되는 경우도 많다. 교차로 체크된 정보로 접한 정보로 판단해야만 한다. 또한 워낙 SNS나 유튜브나 방송이나 언론에서 검증도 되지 않는 어떤 목적을 가진 왜곡된 정보나 개인적인 편견적 의견이 정보처럼 나도는 것 또한 검증이란 거름망으로 걸러서 받아 봐야 내 판단의 오류가 틀리지 않음을 자신할 수 있다. 틀린 정보나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받아 들이 뉴스로 인해 내 가치관이나 사상이 흔들릴 수도 있다. 그렇게 오해된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이젠 빅데이터 시대라고 한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고 어디서 신용카드를 쓰며 고속도로를 통과하는 등등 구매 기록과 이동 기록 만난 기록 등등 정보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서일 뿐이지 객관화시킬 자료는 어딘가에 분명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의 관계와 과정들을 추적하면 뭔 작당을 벌이는지 무엇에 헌신을 하는지 나온다. 있는데도 찾아 보지 않는 기자라면, 직무유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런 취재라며 하루 종일 종편 TV에서 떠드는 의혹성 뇌피셜의 기사를 가지고 믿을 수는 없다. 사실 확인 진실의 추적 뭐하나 재대로 한 것도 없이 단편적이고 편향된 시각으로 바라본 사람의 평가를 신뢰하는 것은 그래서 더 위험하다. 노인네들의 하루 종일 종편 TV에 빠져 있는 게 차단된 정보와 크로스 체크 검증도 없는 능력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안타깝다는 거다.
요즘의 뉴스를 만들어 내는 언론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 불러주거나 언질만으로도 의혹만 제기하고 의혹을 확인도 없고 받아쓴 기사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없는, 타이틀에 대해 클릭 장사꾼 같은 언론들에게 "국민의 알 권리"라는 사명감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론에서 나오는 70% 기사는 국민이 몰라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또한 기사가 없어도 인터넷으로 찾아 보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공공기관 등에서 나오는 자료들이 홈페이지마다 잘 정리되어 있으니 굳이 언론의 정보가 아니더라도 굳이 아쉬울 것도 없다. 누구나 다 찾을 수 있는 자료라면 굳이 언론사를 통해서 알 필요도 없다. 그들이 가진 존재의 이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돈 벌어서 밥은 먹고 살겠는가? 점점 주목도가 낮아지고 광고 수주도 안되면 점점 매출은 떨어질 것이다. 그동안 쌓아 놓았던 적립된 자본으로 얼마 간은 버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식으로 계속 나갈 경우라면 언젠가 기자들 월급도 못 주는 날이 반드시 온다. 누군가 점점 아쉬워하지 않은 시점이 누적되어 간다. 정보가 언론에 독점되었던 시대와 아닌 시대의 차이가 분명 있을 것이다.
글이 길었으나, 이왕 긴 글에 한 가지만 더하자. 그 당시의 선택은 좋든 싫든 그 나름의 가치관으로써 내린 결정이었다. 그렇다고 누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국민이 확 바뀌지도 않는다.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어너더 뉴 네셔널이 될리가 없는 이유가 다 같은 국민이 선택이었다는 것만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역시 신도 아니다. 실수할 수 있고 잘못이있을 수 있다. 앞으로도 어떤 일로 오명을 받을 수도 있는 불완전한 같은 인간이라는 점이다. 전임이 워낙 어질러진 판에서 새로 선택받았기에 기대치가 어느 전직 대통령보다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산업현장에서는 사고로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여전히 생활고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이 있고 사회적으로도 서로가 이익이 충돌하는 많은 현장에서 각박하며 사회적인 경제적인 모순이 상존한다. 이걸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확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도 오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국민이 얼마만큼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것과 대등하게 스스로가 요구에 준하는 바뀜도 있어야 하는 것을 간과한다. 내가 당신을 선택해서 권력을 줬으니 당신은 내가 준 권력으로 당장 내가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편하게 뭔가를 이루어 내라는 요구가 누적될 것이고 이 요구에 부응이 잘 되지 못하면 다시 권력을 감시하듯 질타할 것이다. 흔히 그랬잖는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 했지 않는가 말이다. 그럼 이게 또 누구 때문일까? "이익 앞에서는 나만 이어야 하는 국민"과, "손해 앞에서는 나만 아니면 되는 국민"과 ""불의는 어지간히 잘 참으면서 불이익은 불같이 나서서 피해에 저항"하는 모습도 이 역시 국민이다. 국가의 미래가 북유럽처럼 바뀌기 위해서 우리들이 해야할 일들이 무엇인지 부터 국민들 제각각의 저마다 주어진 공정함, 공평함에 대해 얼마나 가치롭게 살고 있는지 먼저 자문해봐야 할 문제이지 대통령 혼자서 백날 머리 쮜어 짠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거다. 권력이 바뀌었으나, 국회도 그대로이고 검찰도 그대로이고 언론도 그대로이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는 환경에서 전부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선택하지 않았으나 그를 잃고나서야 지금의 문재인을 얻었다. 이미 북한발 위협이 줄어든 것만으로도 나는 다른 거 다 제쳐두고서라도 만족한다. 몇십 년전의 전쟁의 공포. 이거 하나 막는 것만으로도 점수 이미 반은 채웠다. 부디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으로 갈라진 두 나라라 하더라도 제각각 아프지 않게 오손도손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