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콘 D700 카메라는 처음 출시되었을 때 무척 가지고 싶었던 카메라 기종이다. 당연 Dslr 기종의 풀 프레임 보디(센서가 35MM 필름과 1: 1 비율을 풀 프레임이라고 한다.)이다 보니 설레기도 했던 보디이다. 가격 때문에 구매는 못해 손가락만 빨았던 적도 있다. 그런데 최근에 우연스럽게도 이 기종의 보디 가격을 보니 글쎄 40도 안되는 놀라움. 가격 방어가 파괴된 상태였다. 처음 출시되었을 때보다 가격이 무척 떨어진 걸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이중적인 감정이 흘렀다. 처음엔 200인가 하여간 중급 이상 급으로 기억난다. 카메라 가격은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중급 보디가 초급용의 가격이 되어 버렸다니 놀랍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떨어진 게 약간은 섭섭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한때 Dslr 바람이 불어서 어디 관광지를 가봐도 카메라도 큰 게 종종 보였을 정도로 사진작가가 된 마냥 많기도 했는데 지금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싶을 정도이니 까. 바람은 한때의 바람일 뿐었던가 보다. 사진이 단지 카메라의 기계적인 호기심으로 충족될 수는 없다는 걸 그들은 몰랐을 테니까 말이다. 카메라도 수요가 가격이 파괴될 정도로 수요가 줄었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기종 또 하나가 있다. 올림푸스 카메라.
이 카메라는 마이크로 포서드 마운트의 미러리스 카메라인데 당연 처음 출시될 때도 고급 기종 카메라. 이 카메라 가격도 다나와나 지마켓에서 최저가가 40이 안된다. 카메라 시장은 그야말로 끝물이자 재고 떨이로 전락한 느낌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가격이 추락하는 것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역시나 카메라의 수요가 대폭 줄어들었음을 체감 가격에서 느낀다. 하기야 요즘 어디를 가나 핸드폰에 손톱보다 작은 액세서리로 찍는 카메라가 대세이다 보니 카메라 수요는 없을 수 밖에 없다. 카메라의 대체품이 핸드폰 카메라로 이전되었을 뿐이지 사진 찍는 사람이 줄어든 건 아니다. 다만, 큰 카메라가 작은 카메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카메라의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작품처럼 담겠다고 마음먹으며 찍는 사진은 핸드폰 액세서리용 카메라로 담지 않는다. 게다가 액정 모니터로 보면서도 사진을 안 찍는다. 거의 대게가 뷰 파인더에 한 쪽 눈을 접안 시켜서 찍는 편이다. 이는 카메라의 작동원리가 큰 카메라나 핸드폰 카메라나 거의 같다고는 하나 물리적인 광학의 사이즈가 차이가 무지하게 난다. 특히 빛을 받아들이는 렌즈를 통한 빛의 감광되는 센서가 다르다. 좁쌀보다도 작은 센서의 크기로 무한대의 빛스펙트럼을 다 받아도, 생략되는 빛들이 너무 많다는 뜻이다. 즉 화소 수에 따른 화질의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하게 많이 난다. 물론 문서라든가 기록으로 기억을 해내야 하는 것은 핸드폰이 카메라보다 낫다. 그런데 이미지가 사진의 미학으로 진행하려 들면 핸드폰의 렌즈가 너무 작다. 특히 한 쪽 눈을 감고서 한 쪽눈으로만 찍는 사진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한다. 사각 프레임의 4개의 모서리까지 시선을 옮겨가며 빛을 받아들이는 시각을 보고자 한다. 그 시각에서 생각되는 모든 것을 시처럼 읊조린다. 즉 보이는 것의 너머에 있는 생각과 사진의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찾으려 한다.
사진은 도구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다. 때로는 도구가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명성에 따라서도 감성적인 차이가 난다. 카메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요즘처럼 가성비를 따지기도 하지만 예술 지양하는 도구는 공학적인 경제적인 효율성과는 맞지 않는 분야 중 하나이다. 누가 사용했는지에 대한 명성과 주장하는 바를 적어 내려는 기능과의 조합으로 도구는 결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도구에 의해서 사진은 철저히 종속되는 이유기도 하다. 카메라는 광학이라는 물리적인 특징을 담아 기록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만능이라는 카메라는 없다. 따라서, 가성비를 따지며 좁쌀만한 렌즈의 한계는 사진의 제약으로 드러나는 한계를 보인다. 가끔 아이폰으로 SLR의 효과를 주겠다고 아웃포커싱을 넣은 사진을 보면 아는 사람은 안다. 그거 사기라는 거. 소프트웨어적으로 가공했을 뿐이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같은 아이폰으로 찍었는데 나는 왜 안되는지 궁금했을 거다. 여기서 더 나아가다 보면, 카메라는 현상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사유의 도구이기도 하다. 물론 처음에는 현상적으로 접근하지만 사진을 오래오래 하다 보면 이게 단순히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결국 예술이란 현상에서 사유로 이어지고 현상에서 추상으로 사유가 확장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진은 빛을 감광시키고 감광된 이미지를 본다. 이 빛은 에너지의 욕망이자 허무이다. 빛의 변화와 에너지의 흡수와 방출에 따른 떨림이 곧 허무이다. 우리는 거대한 빛의 욕망과 그 허무에서 산다. 사진의 용도는 허무의 각성이자 욕망을 붙들고 싶은 표현이다. 결국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지고 생성되는 과정 속에 잠시 내가 나를 만난 것뿐인데, 이 변화에서 내가 추출하고 싶은 욕망만을 영원히 붙들고자 하는 부질없음에 저항이다. 결국의 자기 모순들. "안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라는 동요 가삿말은 흡사 사진의 용도를 두고 하는 기막히게도 정확한 표현일 것인지도 모른다. 우린 다 사라질 줄 알면서도 낳고 죽고 살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이다. 소용도 없는 클라이언트가 없는 사진은 불행한 운명처럼 그런데도 불구하고서 말이다. 카메라를 구입하려다가 포기했다.가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카메라가 더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일 것이며, 무슨 용도를 더 확인할 것인가. 단지 돈이 더 들고 안들고의 문제가 아니다. 까짓것 한 대 더 있다 한들 이 무소용의 허무조차 극복할 제간도 생각도 못한다. 욕망이 무력화될 때, 사진을 찍으며 살아가는게 좀 두렵다. 그래도 찍어야지. 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