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께 소리로, 70까지는 돈을 벌어야 한다고 와이프가 주장한다. (혹은, 요청이든가 요구이다.) 전기 조선시대나 기원 전후에서부터 유럽 중세 전기까지만 해도 사람의 평균 수명이 30이었는데 이제 수명이 늘어나서 80까지 특별한 질환이 없다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70세까지 벌어야 한다는 것은 수명이 늘어나서 돈벌이로 더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뭘까 싶었다. 더욱이 현대 산업 자본사회에서 자본에 종속된 삶을 죽을 때까지 지속해야 한다는 것은 오래전, 노예들이 평생토록 주인에게 복종하고 무릎뼈가 다 닳도록 일을 하는 것처럼 이젠 주인이 돈으로 바뀐 것이나 다름없음에 대한 슬픔이 크다.
현 편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인생에서 돈 버는 일 빼고, 돈 쓰는 일 빼고 나면 뭘 할 수 있을까. 잠자기와 먹기를 또 빼면 당최 뭘 할 수 있는 인생이란 도대체가 뭘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곤 한다. 일생의 대부분은 돈을 벌고 돈을 쓰다 죽는다. 자본주의 시대에 활동과 삶이라는 두 가지가 따지고 보면 자본적 활동이 거의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돈을 벌다가 돈을 쓰다가 죽는 삶이다. 시답잖게 말하자면 역시 돈벌이가 주된 삶의 활동이다. 성경에서는 이를 노동이라고도 하고 근로라고도 하고 일이라고도 하고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도 한다. 일하지 않는다면 생존하지 말고 살지 말란 소리일 텐데, 그렇다면 인간은 일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견해가 아닐까 한다. 태어난 자는 노동의 숭고함이 자본의 위대함으로 대체된 오늘날의 시대에 과연 노동의 자체에 대한 보람 따위나 혹은 사명감은 없다. 다만 노동이 돈으로 치환되거나 등가교환일 뿐이다. 물론 등가로도 잘 안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태어났으면 일을 해라는 강요이거나 요구이라는 뜻이다. 태어난다는 것은 노동력, 일을 하게 함으로써 부를 축적하는 농경사회의 대표적인 경향이다. 부족사회에서도 강력한 힘은 결국 머리 숫자인 쪽수로 대변되고 무리의 힘이 인구수와 비례한다. 그러니 생산량이 많을수록 권력의 힘은 크다는 것이 인간의 역사였다. 그러니 뭐 빠지게 일을 해야만 그 체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었을 것이고 그러도록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소처럼 일하라는 사명감은 그간의 권력자들이 주장하는 최대의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일반적으로도 신념이 되어 버렸다. 게으름을 터부시하게 뼈가 빠지도록 일을 하는 것이 훌륭한 삶이라고 인식되었다. 이게 노동이 곧 삶이었던 시대의 강박과 편견은 오늘날까지 지속된다. 열심히 일을 많이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편견은 그 과거의 시대에서는 맞는 의견의 지배적 사상이었으나, 지금은 대기업 총수가 어디 노동을 많이 해서 일반 직장인들처럼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는 무조건 일만 많이 한다고 해서 돈을 많이 가지는 것처럼 비례적이지도 않다. 지금은 일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과 전통적인 가치관의 어긋난 초점일 것이다.
누구는 놀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하면 이상하게 쳐다본다. "사람은 일을 해야지"라는 생각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서 일하지 않거나 일하지 못하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이른바 백수. 즉 일을 할 수 없는 무직자를 사람들이 어떤 인식으로 바라보는지 금방 계산이 되는 거다. 그런데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할 때는 어떨까? 현대 산업 자본 사회에서는 특히 점점 사람이 할 수 있는 단순 일자리는 줄어 간다. 출산을 많이 하라지만 일자리를 늘릴 생각이 없다. 사람의 일자리가 기계로 대신할 때라면 사람은 필요가 없다. 그러니 출산이 곧 비용이고 경비의 지출이거나 또는, 담보 없는 투자적 성격이라고 생각하니 출산율을 떨어지지만, 한편으로 출산율을 올리기 위해서 많은 예산을 투입하는 이유가 뭘까. 사람은 점점 필요 없어지지만 일할 수 없는 자도 소비는 해야 하는 물질문명 속에 있다. 핵심은 소비자가 필요하지 경비 투입이 많은 노동자는 필요 없어지는 시대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어떻게 소비할 수 있을까? 노동으로는 현대적인 소비사회를 따라 가기란 솔직하게도 버겁다. 자본의 정점에 있는 주식회사나 투자회사는 이익를 창출하는 사람이 필요하지 경비 지출을 증가시키는 수익 대비 지출이 많은 사람이 필요 없다. 경비를 줄여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좋은 수단이 경비를 많이 들어가는 사람을 줄이는 방법이 첫째가 된 거니까 단순 노동력을 제공할 사람은 쓸모가 없다는 결론이다. 그러니 사람 대신에 경비가 적게 드는 기계가 사람을 대체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소비자로 어떻게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하자면 돈을 벌지 못하는데 어떻게 돈을 쓸 수가 없다는 거다.
70까지 대체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을까? 당장 지금도 50대뿐만 아니라 40대 초반만 되어도 퇴물이 되고 사람이 나사 개체처럼 교체되기 일쑤인 시절인데 과연 70까지 어디서 무얼 하며 소위 돈벌이를 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도 50이 넘어가는 나이가 되다 보니 그리 썩 좋은 머리가 아닌데 나쁜 머리가 더 나빠지고 돌아가지지 않는다. 기민하게 즉각적인 사고 작용과 신속한 기억력과 판단력의 젊은이들하고는 비교되지 않게 밀린다. 머리도 점점 나빠지고 기억력도 감퇴하고 젊음의 열정도 사그러 들며 20대, 30대 젊은이들의 신체처럼 건강한 것도 아니라 근력도 딸리는데 무얼로 자본주의 체재에서 70까지 일을 해야 한다고 요구를 하는 것일까. 현대 사회는 과거와는 점점 고도화, 지능화, 정보화가 됨으로 살아온 업무의 경력은 소용이 없다. 새로운 것들은 기존의 지식과 경험을 못쓰게 한다. 경험은 낡은 지식으로 전락하고 그렇다고 새롭게 나오는 지식을 습득하기도 쉽지 않다. 경력자의 경력은 그저 살아온 이력일 뿐이지 앞으로의 업무에 도움이 크게 되지 않는다. 타자기를 잘 안다고 해서 스마트폰을 잘 아는 것은 천지 차이인 것처럼 결국 나이 들면 타자기가 된 사람은 설자리가 없어진다는 것. 그런데 돈을 계속 벌어야 한다는 것이 어려운 까닭이기도 하다. 연금이라도 수급할 나이가 아직 멀었고 퇴직이 가까이 오고 은퇴자들의 선택지라는 게 재취업을 노리지만 갈 곳이라고는 패지 줍기나 경비원 자리가 대부분이다. 어디에도 늙은 경력자에게 도움이 크게 되지 않는다. 새로운 것들에게 대해서 기민하게 대처도 못하는데 여기에 비용 지출할 기업이 점점 사라진다. 기업이라고 자선사업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돈벌이에 내몰려 평생 돈만 벌줄 알다가 일을 놓게 되면 낙동강 오리알보다 못한, 오갈 곳 없는 신세로 급진 추락하는 사례는 주변에서 이젠 너무나도 흔하다.
도시는 자본의 바탕이다. 도시의 집적화된 시장이라서 기업이 도시에서 가까이 있거나 도시 속에 있으려 하는 이유이다. 한적한 시골에서 기업의 매장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장사 잘 되는 곳이 시골보다 도시기 때문이다. 도시는 생산기지이지만 거대 소비시장이다. 생산기지는 시골일 수 있지만 소비시장은 시골일 수가 없다. 소비처가 도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시로 사람은 모여서 바글바글하는 것도 소비와 생산에 있어서 도시가 더 자본적으로 유리한 까닭이기도 하다. 소비자로서의 사람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돈벌이가 되는 소비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소비할 수 없다면 도시는 사람을 배척한다. 문제는 도시에서 살면서 소비하지 않고 자급자족은 불가능하다. 비싼 가격의 토지비, 주거비는 노동력으로는 이제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열심히~! 일해도 도심 근처에 집 한 칸 장만이 불가능한 수익을 내는 노동력이라는 점이다. 지금도 자본이 대자본으로 더 집약시키는 자본주의적 속성에 일부 극소수의 자본가를 제외한 대부분이 허덕거리는 이유이다. 대자본은 작은 자본을 압도하고 더 큰 자본으로 옮아간다. 돈이 돈을 버는 시대라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 자본주의적 체재를 뭉개지 않고서는 노동의 진짜 숭고함은 없다. 이자비용보다 생산하고 소비하는 비용보다 항상 급격히 적어야 한다. 아무리 소비하고 생산해도 자본적인 이자보다 못한 것이라면 누가 일하려 들겠는가. 돈놓고 돈벌이만 하는 시스템 속에서는 열심히 고통스럽게 일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나라 상황을 자본 시장에 놓고 보자.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주의 시장도 유례가 없을 만큼 격변했다. 노동자와 소비자는 항상 동일하다는 가정을 해보자. 인구 대비 출산율이 떨어진다고 앓는 소리를 한다. 이것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최저치이다. 결국 노동자 숫자도 줄어들 것이고 나아가 소비자도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노동자 숫자는 줄이고 싶고 소비자는 늘리고 싶은 목표는 애초부터 계산이 안되는 모순적 항목이다. 그런데 막상 현실은 노동자는 줄이고 소비자를 늘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비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역으로 생각해보면 생산력이 떨어지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내수시장은 점점 축소될 것이 뻔하다. 기존의 사업을 하던 소비자 시장을 노리던 기업들이 매출 감소가 확실할 것이다. 노동자가 줄어들고 소비자도 줄어드는데 어떻게 기업만 계속 이익을 바랄 수 없는 계산이 나온다. 매출 감소는 결국 노동자의 수익 하락으로 나타날 것이고 소비력의 저하로 나타날 것이다. 인구가 줄어드는데 어떻게 이익이 계속 나길 바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개개인들은 여전히 도시에서 소비력으로 지속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점점 가난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도시에서 계속 소비와 생산만으로는 그간의 삶과 비슷하게 유지시키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바뀐 패러다임으로 삶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분명 도시에서의 빈한한 삶을 산 게 된다는 뜻이다.
일요일 이른 새벽부터 교회에서 나눠주는 500원을 받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교회로 찾아가는 궁핍한 삶이 결코 남의 이야기는 아니다. 노동력을 상실하고 노동시장을 잃어버렸는데 도시는 계속 주거비 의료비 때문에 소비를 해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에 축적된 자산이라도 있으면 그 쌓아놓은 자산을 야금 야금 파먹고 살면 문제가 없겠지만 대부분의 노후생활에 대한 보장을 하지 못했다면 별다른 수도 없다.
그래서 자급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되었다. 도시는 끝없이 외부로 에너지나 재화를 공급받지 못하면 유지되기 어렵다. 자급을 할 수 없는 도시의 삶이란 모든 것을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물질문명의 한가운데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는 한계의 불행이다. 도시민의 삶이란 바로 여기에서 숙명이 도사리는 셈이다. 자본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신불구니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물론 능력이 좋아서 젊을 때 열심히 모아 쌓아둔 재산을 까먹어도 충분하다면 모를까. 우리나라의 노후대책이 제대로 된 노인이 그리 많이 되지도 않는다. 도시에서 일반 서민이 살아가는 행위가 축적하고 살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 별로 안된다. 매달 벌어먹고 쓰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는데 언제 모아서 노후까지 대책을 세워야 할 수 있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렇다면 그런 삶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오래전 소로의 책 "윌든"에서 도시의 삶을 버리고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설파한 것이 상당히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여전히 기억나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다. 스티브 맥퀸 주연의 빠삐용에서 마지막 신. 탈옥과 구속을 반복하던 빠삐용이 마지막으로 갇힌 곳이 섬이 감옥인 곳이었다. 결국 빠삐용은 야자수를 담은 포대를 벼랑 위에서 바다로 던지고 자신도 그 바다로 뛰어내린다. 그리고 섬으로부터 멀어지는 장면은 섬의 감옥 동료가 지켜보고는 영화가 막을 내린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더 이상 탈출에 의미가 없을 법도 한 빠삐용의 나이가 70을 넘겼고 다 늙어서까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그 자유에 대한 갈망을 벼랑 위에서 바다로 뛰어내릴 때가 영화가 피날레인 것이다.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 자유로의 의지가 이 영화를 일약 세계적 명화로 거듭나게 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시골로 향해 도시를 탈출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위치나 공간으로써의 시골은 아니다. 시골에서 살면서 도시의 습성대로 산다면 시골에서의 자급형은 어렵다. 따라서 공간적 이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장소만 바뀐 것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시골에서는 도시에서 할 수 없는 자급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만들 수 있는 밑바탕이 있다는 점이고 자급을 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이 자급으로 인해서 현대 물질문명에서 비롯된 것을 최소화시킬 때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수입이 없어도 아니 최저의 연금이나 보험만으로도 자족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70살이 되어도 여전히 젊을 때처럼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은 그야말로 주인이 시키는 대로 죽어라 일하는 노예가 따로 없다. 자본이 시키는 대로 죽어라 일만 하다 죽는 것이 인생이면 정말 슬픈 삶을 사는 것과 뭐가 다를 바가 아니다. 완전히 원시인처럼 모든 것을 자급하고 살 수 없는 생활 습성이 있어도 이런 도시적 삶을 최소화시킴으로써 자본에서 자유롭기를 원한다. 굶어 죽어도 굴복하고 싶지 않은 자본인 까닭이다. 평생을 돈 벌다 죽으라는 운명을 거슬러 이 자본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며 그래서 자유로운 내 삶에 대한 의지가 자급할 수 있는 곳을 원한다.
이제는 자본주의에 대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치킨이 먹고 싶으면 먼저 닭을 키우고 빵을 먹고 싶으면 밀을 심고 밥을 먹고 싶으면 벼를 심어야 하듯이 대규모 공장 생산 방식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삶이 그립다. 도시에서 치킨 한 마리 시켜 먹는데 몇만 원도 들지 않는다. 우리는 전화 한 통으로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배달해 주는 이 도시적 편리함은 먹는 재미도 음식을 만드는 재미도 박탈당한다. 도시에서 자신이 돈을 들이지 않고 먹거리 하나 해결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은 현대인의 치명적인 불행이다. 늘 종속된 삶이라는 게 고대의 노예제나 마찬가지이다. 먹거리도 문제지만 주택비는 또 어떤가. 대기업에서 닭장처럼 찍어낸듯한 아파트 한 채 사느라 평생을 바치고 이마저 다 채우지 못해 은행의 노예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월세 살 듯이 매달 지출해야 하는 원금과 이자비용을 들이느라 자신의 가처분 소득의 큰 부분을 지출하는 것은 자본의 종속 논리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다. 몇 평에 사는 게 삶의 질을 결정하겠는가. 은행 이자로 인해서 삶의 질이 결정될 것인지는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넓은 집에서 산다는 게 공간적 확보이나 심리적으로는 항상 주눅 들어 있는 셈이다. 먹거리, 거주 공간, 이 두 개의 자급적 충족이 되지 못한 삶은 자유의지라고 할 수는 없다. 늘 얽매이는 삶이라는 게 자유의 반대의 개념인 건은 누구나 다 아는 거 아닌가.
인간은 시간의 철새이다. 공간을 타고 시간 속으로 떠돌지 않는 사람이 없다. 언젠가 나도 떠나야 할 필연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필연적 떠남의 존재에 왜 자본의 구속에 안주하는 것이 행복이라 여기는 이 거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착각이 나는 두렵다. 도저히 행복해지지가 않는다. 얽매인다는 거. 운명에 얽매이는 것도 주체할 수 없는 부대낌일 텐데 사회적 현실과 개인적인 자본력의 차이가 운명을 결정하는 부자유는 분명한 고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 떠나자고 생각한다. 빠삐용처럼 마지막으로 벼랑 끝으로 몸을 던지는 듯이 꼭 한 번은 자신이 생각하는 헤게모니를 찾아가야 한다. 묘비명에는 "무한대의 자유를 찾고자 여기서 탈출하다." 이거면 딱 좋겠다. 끝으로 70까지 노예로 살라는 것 아무리 농담이더라도, 지금 죽어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