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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 조선 시대 남자들의 집안 살림 이야기
정창권 지음 / 돌베개 / 2021년 7월
평점 :
조선의 남자들은 살림의 달인!
기록의 나라답게, 조선양반들은 일기 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 날의 날씨부터, 찾아온 손님과 선물들, 노비들의 사소한 사건 사고나 성격, 장 볼 목록과 자식과 손자 손녀들에 대한 교육의 열정, 농사, 양봉, 매매, 재산증식 등 가족일기와 가계부의 역할을 겸비한 글씨기였다.
그들은 조선시대의 야무진 살림꾼들이었다. 그럼 조선의 여성들은? 출산, 그리고 같이 육아를 하고, 길쌈 등을 통해 경제적 활동을 해나갔다. 남편과 같이 가정을 꾸려나간 것.
퇴계이황은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하고, 30세에 안동 권씨와 재혼했다. 안동 권씨는 지적장애인이었고, 이황은 음식과 의복, 농사, 반찬, 노비, 세금 납부, 교육 등 모든 일을 다 해내면서 그 엄청난 공부까지 하면서 책도 쓴 것. 그렇지만 조선시대 그것은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변질되기 전까지는 남자들의 살림은 참여가 아니라, 아내와 함께 당연히 같이 하는 것이었다.
성호 이익은 남성의 살림 참여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며, 이를 비난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 남자들은 닭을 키우고, 양봉을 하고 자녀를 키우며, 주택과 집짓기와 보수와 이상와 집세, 장보기와 반찬거리 제공 등을 당연시했다.
실제로 조선남자들의 수많은 일기와 편지에는, 토지를 사고 뽕나무를 재배하거나, 과일나무를 키우고 채소를 가꾸고, 자녀교육의 힘듦, 노비를 관리하는 바쁜 일상이 담겨 있다
제사 또한 원래 4대 봉사가 아니었다. 6품 이상의 양반가에선 3대 봉사, 7품이하는 2대 봉사, 평민은 부모 제사만 지내면 되었던 것, 또한 이 제사 준비도 대부분은 남자들의 몫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에 너도나도 4대 봉사를 지내자, 성호 이익은 한끼 해결도 힘든 상황에서의 허례허식을 비난했다.
조선 선비들은 자녀교육을 도맡아했고, 딸 교육에도 힘썼다. 그래서 시와 그림에 능한 여인들이 많았고, 이런 딸 혹은 어머니 혹은 아내의 문집들을 발간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부부관계 또한 서로 손님 대하듯 예의와 공경이 당연시 되었다.
실제 추사 김정희는 두 살 어린 아내에게
“저번 가는 길에 보낸 편지는 보아 계시옵니까? 그 사이에 인편이 있었으나 편지를 못 보오니 부끄러워 답장을 아니하여 계시옵니까? 나는 마음이 매우 섭섭하옵니다.”
며 극존칭의 편지를 썼다.
미암 유희춘은 아내에게 술 한 동이와 함께 시를 보내기도 했다.
“눈이 내리니 바람이 더욱 차가워
그대가 추운 방에 앉아 잇을 것을 생각하네.
이 술이 비록 하품이지만,
차가운 속 따뜻하게 데워 줄 수 있으리”
아내 송덕봉은 다음 날 화답시를 보냈다.
“국화잎에 비록 눈발이 날리지만
은대(승문원)에는 따뜻한 방 있으리.
차가운 방에서 따뜻한 술 맏으니
속을 채울 수 있어 매우 고맙소 ”
남자들은 부엌 출입을 금했다?!
영조는 7년간 사옹원(조선시대 궁중음식을 맡아본 관청)에서 숙직하며, 숙종의 병간호를 했다. 음식을 받들고 탕약을 올린 것이다. 궁중요리 또한 대부분 대령숙수를 필두로 남자들이 도맡아했다. 관아 음식 또한 관아 주방의 반빗간이라 불리는 요리 잘하고 칼 잘 다루는 남자 관노의 몫이었다.
박지원 또한 요리를 잘해, 손수 고추장을 담그고 가족에게 보내기도 했다. 오희문은 된장과 식혜를 잘 만들었고, 세조 어의 전순의는 <식료찬요>, 서유구는 솥과 도마란 뜻의 <정조기> 등 여러 권의 요리책을 썼다.
조선 시대에는 자식이 요리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최고의 효였다. 그러니 남자들이 요리를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정원을 가꾸고, 과실수를 심어 제사를 대비하고, 살림을 규모 있게 살며 아내와 상의하는 모습은 우리가 생각했던 조선의 모습과 상이하다.
지금의 가부장적 모습은 일제강점기와 산업화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집안은 공과 사가 함께 하는 공간이며, 열린 공간이자 남녀의 역할 또한 유동적이었다. 일제 식민지의 여자교육의 목표는 황국신민화와 현모양처 양성이었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조작된 현모양처는 조선시대 남성이 담당하는 자녀교육을 여성의 몫으로 바꾸고, 남녀의 역할분담을 안과 밖, 사회와 가정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가정은 그저 쉬는 곳, 소비의 장소이며 바깥보다 중요하지 않은 장소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남성은 직장인이자 군인으로 사회적 국가적인간으로 , 여성은 현모양처로 집안에서 주부의 역할을 하며 어머니와 아내로서 사랑과 헌신이란 정서적 역할까지 강제로 떠안게 되었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이런 역할분담은 고착화되었다. 그저 집안에서 자식과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희생하는 어머니상은 일제가 의도적으로 말살한 우리 전통과도 맞지 않다.
연대하며 가정을 꾸려나가고, 장을 담고 아내에게 반찬과 술을 보내고, 자식교육이 내맘같지 않다며 일기에 하소연을 쓰던, 아픈 아내를 위해 약을 만들고 자식과 손주들 교육에 필요한 책들을 필사하며 밤새던 아버지. 가정을 바로 세워야 나라도 바로 선다고 생각했던, 냇가에서 놀고 싶다는 아내를 위해 천막을 치고 낚시 준비를 하고, 아내의 시들을 모아 문집을 내던 조선시대의 아버지들은 어디로 간 걸까. 어쩌면 우리들도 왜곡된 매체와 책들이 보여주는 모습들에 세뇌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 아래 사진은 조선시대 선비의 일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