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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보루 -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유족과의 교류
야마카와 슈헤이 지음, 김정훈 옮김 / 소명출판 / 2020년 3월
평점 :
인간의 보루
이 책 ‘인간의 보루’를 쓴 저자 ‘야마카와 슈헤이’는 1997년 골프투어로 제주도를 처음으로 방문한다. 그는 주택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택업계 정보교환을 목적으로 일본내 큰규모의 회사간부사원들로 구성된 ‘영업전략연구회’라는 친목모임의 회원이었다. 이 모임 구성원 4명은 97년 골프여행을 목적으로 제주도에 도착한다. 2일째 되던 날 저자는 전날 막걸리를 많이 마셔서 속이 탈이 난 까닭에 모임의 다른 회원들이 골프를 치러 나갈 때 호텔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홀로 남은 저자는 호텔주변을 배회하던 중 다방을 발견하고 그곳에 들른다. 거기서 그는 우연히 일본어를 잘하는 남자를 만나는데, 그는 해방 전 오사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소재한 대학교 법학과를 다니다중퇴하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김중곤’이다. 그는 해방이후 광주 기마경찰대에 입대했다가, 서울에 처음으로 호국군 서울사관학교가 생기자 1기생으로 입학하고, 졸업 후 원주에 배치 받아 근무중에 한국전쟁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국전쟁에 대해 궁금한 것을 듣던 저자는 김중곤의 여동생에 관해 듣게 된다. 그의 여동생은 근로정신대의 일원으로서 나고야의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중 해방 1년전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공장잔해에 깔려 숨졌다고 한다.
우연한 짧은 만남이후 형식적인 인사인 ‘다음에 또보자’는 말이 저자 야마카와 슈헤이의 인생항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줄을 그 당시에는 몰랐다. 저자는 이를 자신의 운명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없었다면 제주도에 가서 골프를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제주도에 가서 막걸리를 많이 마셔 설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은 없었으리라. 그리고 약속다방의 문을 열지 않았다면 김중곤과의 만남은 전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만남은 우연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는 법이다.”
2개월 후 다시 그는 홀로 제주도를 방문하게 되고 김중곤과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후 그는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시민모임에 가입해 피해자들의 지원에 매진하는 인권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책은 저자가 인권활동가로서 살아온 과정을 쓴 자전적 에세이지만,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단체의 활약상과 근로정신대에 관한 재판과정을 소상히 적고 있어서, 사실을 기록하는 역사책으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이책에서 그는 김중곤을 만난 후 자신이 근로정신대문제에 관심을 가진 계기와, 1998년 일본의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가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이하 나고야 지원회)’을 결성하게 된 과정 그리고 이 모임이 주도한 근로정신대 피해자 소송 진행과정을 소상히 적고 있다.
근로정신대란 흔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오인 하는 경우가 많은데, 조선여자 근로정신대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과 국내의 군수공장 등에 강제 취역됐던 조선의 여성들을 말한다. 당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조선 여성은 약 7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 까지 일본은 수십만명의 조선 남성을 강제로 연행해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전쟁이 확대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여성들까지 징용해 갔다고 한다.
일본은 나라의 정책으로 근로정신대를 계획했으며, 조선의 14세 전후의 소녀들은 일본에 가서 일하면 기숙사에 들어가 급료를 받으면서 여학교에 다닐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일본으로 갔다고한다. 하지만 학교는 커녕 넉넉지 않은 식량상황과 함께 비행기 생산에 종사하여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도난카이 대지진으로 건물이 붕괴함에 따라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고 한다. 김중곤의 동생도 그 때 사망하였고, 그의 부인 복례도 근로정신대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한다.
나고야 지원회 대표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는 게이오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비정규직강사로 일하면서 나고야역사학회에 가입하여 활동중이었다.
어느 날 재일역사학자인 박경식의 강의를 우연히 듣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이 배운 역사와는 다른 역사를 알게 된다. 이후 그는 여러 자료를 통해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피해자들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과 함께 모임을 결성하고 자료등을 수집하여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에도 불고하고, 일본 나고야에서 진행된 소송은 1심과 2심에서 원고패소판결을 받게 된다. 판결의 주된 이유는 일본과 미쓰비시 중공업의 불벌행위책임이 성립하지만 한일청구권 협정이라는 억지 이유를 들어 원고패소판결을 내린다.
한일청구권협정이란 국가간의 책임을 명확히 한 조약이고, 개인간의 청구권을 제한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본법원은 이를 근거로 원고패소판결을 내린 것이다.
항소심에서 원고측 증인으로 나온 서울대학교에서 법과대학에서 법사학을 전공하고 건국대학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던 김창록씨의 증언에 따르면, 한일청구권경제협력협정(이하‘한일협정’)은 영토분리분할에 따른 민사상, 재정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약이었으며, 식민지배에 관한 문제가 포함되는 것에 관해 조약의 당사자인 일본이 명확히 부정했기 때문에 식민지배에 관한 것은 조약의 내용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따라서 어린소녀들을 속임을 당해 끌려와서 자유를 구속당했고 무기한으로 노동을 강요당했다는 이 소송 항소인들의 주장은 식민지배에 관한 문제이므로 한일협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동 협정제2조1항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이라는 문언과 동조 제3항 “어떠한 주장도 할수 없다”라는 문언의 해석은, 협정의 법적효과에 대하여 일본정부의 경우 외교보호권만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정리했으며 1990년부터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주장하는 법적효과를 보아도 개인이 가지는 청구권에 대하여 협정은 어떠한 효력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협정의 성질에 대하여도 협정체결당시 한일은 전쟁상태가 아니었으므로 강화조약이라고 볼수도 없다고 한다.
이러한 증인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일본사법부는 한일협정 원고패소판결의 주요 근거로 들고 있다.
이책 인간의 보루 서두에는 항소심 주요내용을 요약하여 싣고 있다. 저자의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고야 고등법원의 판결내용을 알리고자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아래 판결내용요약을 그대로 옮긴다.
① 국가와 미쓰비시중공업의 불법행위 책임의 성립을 인정하며, 아직까지 미해결된 문제이다.
② 어린 소녀들의 향학열을 역으로 이용해 가족의 품에서 끌어간 행위는 기만 혹은 협박으로 정신대원에 지원하게 한 것으로 인정되며 강제연행이라고 보아야 한다.
③ 소녀들에게는"연령에 비해 가혹한 노동이었던 점, 빈약한 식사, 외출과 편지의 제한.검열, 급료의 미지불등의 사정이 인정되며 게다가 정신대원을 지원하기에 이른 경위 등도 종합하면 강제노동이이라고 보아야 한다.
④ 당시 일본도 비준한 ILO(국제노동기관) 조약29호(강제노동에 판한조 약)를 위반했다
⑤ 국가무답책의 법리 적용에서 명확히 벗어나 미쓰비시중공업이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논거로 삼아 오던 전쟁 전의 미쓰비시중 공업과 현재의 미쓰비시중공업의 ‘별도 회사론’에 대해 실질적으로는 계속성이 존재하므로 불법행위 책임을 질 여지가 있다.
이와 같이 국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엄하게 단죄하고 양자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판결은 한일청구권협정을 이유로 원 고들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논거로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전쟁 피해자 개인의 재판상 소구할 권능을 말살시켰다는 해석과 한일청구 권협정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재판소 입장에서 불법행위 책임의 이행을 명령할 수 없다는 점을 제시하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