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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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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군'이 '시'가 되기 위한 노력은 수십 년간 이어졌다. '시'가 된 기념으로 펄럭였던 플랜카드에는 백 년만의 쾌거! 라는 문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맙소사. 물론 그럴수도 있었다. 읍이 두 개가 되었다. 새로 생긴 읍이 내가 사는 동네였다. 염전이 있던 자리는 어디였는지 알 수도 없게 되었고, 그 자리 멀리, 높은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보며 큰 우유곽을 여러개 세워 놓았구나 생각했다. 어렸고, 봄이었다.

이주단지라고 불렀다. 그 이름은 우리네만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자신을 이주단지에 사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주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공단이 먼저 지어졌고, 달방이 성행하더니 원룸 건물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리 건너' 사람들에게는 희한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파트를 위시한 그야말로 여느 '동'에 버금가는 동네가 형성되었다. 은행, 병원, 미용실, 술집, 빵집, 없는 것이 없었다.  

어쨌든, 옛것과 새것은 쉽게 섞이지 않는다. 스리랑카에 있는 콜롬보 '데사코다' 외곽의 경우, "지역사회는 외지인과 토박이가 분리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도 없고 결속력 있는 지역사회를 구축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인류학자 막달리나 녹이 멕시코의 사례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이다. "전 지구화로 인해 사람, 물자, 용역, 정보, 뉴스, 공산품, 돈의 이동이 늘어났고, 이로써 시골에서 도시의 특징이 나타나고 도심에서 농촌의 특색이 나타나는 일이 많아졌다. " 25

다리 안쪽에 사는 사람들을 옛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여가구가 되지 않는, 청년들이 살지 않는, 가장 젊은 층이 이장일을 보는. 작년에 이장이 된 분은 예순에 가까운 쉰살이었다.  

나는 머잖아 쇠락하고야 마는 동네를 떠난 아이들 중 하나다. 돌아가면 다리 건너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이 이주해왔다. 그들은 땅을 지어먹지 않는다. 대화는 열리지 않는다. 도시사람들이다. 길가를 걷다가 차 창문을 내려 감자 가격을 묻고 휑 가버리는 사람들이다. 길가에 떨어진 밤을 주워 먹는 사람들이다. 그 길가에 난 밤은 모두 주인이 있는 밤나무인데도 말이다. 다리 안쪽의 시골사람들은 다리 건너 이주단지에 가서 장을 보고는 한다. 그곳에서는 돈이 활발하다. 

<슬럼, 지구를 뒤덮다>를 보았다. 그곳에서 농촌의 도시화, 도시 속에 농촌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살고 있는데, 왜 그곳에 사는 것인지 스스로 설명이 어려울 때가 있다. 왜 그들은 그곳에 사는가, 더 나은 곳은 없는가, 그런 궁금증 말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그들이 아니라, 나에게로 돌아온다. 나는 왜 이곳에 살고 있는가. 그것이 내가 선택한 일인가, 선택되어진 일인가, 동시에 일어난 일이라면 어째서 그런 것일까. 신성아파트 102동 위에 뜨는 달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사는 곳에도 달이 뜬다. 그렇다면 저들은 이곳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 조용한 원룸 단지 뒤편에는 더 조용하고 작은 농촌 마을이 있었다. 그곳은 황토색으로 밀어진지 오래고 아스팔트 까는 냄새가 진동 한다. 푸르지오 아파트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밀어진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어디로 갔을까 가끔 궁금하다. 신라면과 참이슬만 팔던 작은 가게는 어디로 갔을까. 달빛에 은은했던 감잎사귀는 다 어디로 갔을까. 이 책이 그런 것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무정부주의 건축가 존 터너의 유명한 말처럼 "하우징은 동사다." 도시 빈민은 주택 비용, 주거 안정, 삶의 질, 출퇴근 상황, 때로는 신변 안전까지 고려하여 최적의 상황을 얻기 위한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house는 주로 주택이라는 명사로 쓰이지만, to house의 어원을 고려하면 산다, 
혹은 살게 한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44

그렇지만 적어도 서로의 위치에 머물기 위해서 복잡한 방정식을 풀었다는 증명은 해주었다. 

도시가 슬럼화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도시가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유하기 때문인 것 같다. - 지타 베르마

나는 가끔 우리 동네 이야기를 생각한다. 길가에 흐드러졌던 뽕나무, 호두나무 집, 그네, 미상이네, 벽돌집, 좀 모자랐던 부부, 윗가게 아랫가게...해질 저녁, 굴껍질을 붓고 오라던 엄마의 심부름이 생각난다. 길가 패진 땅을 살피고 그곳에 자박자박 쏟고는 발로 콩콩 눌러주었다. 그 길은 이제 아스팔트로 까맣고 탄탄해졌다. 굴껍질이 그 밑에 층층이 쌓여 있다. 길을 메꾸던 굴껍질. 예전을 메우고 있는 굴껍질...나는 그런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뷰를 도시와 농촌에 한해서 썼지만 이 책은 다양한 목차를 갖고 있다. 슬럼, 거대하게 존재하는 변두리가 어떻게 도시의 미래가 되고 있는지 냉철하게 따진다. 자본주의-집의 관계에 대한 고찰. 국가가 외면하는 가난과 가난을 외면하게 하는 국제기구의 암(暗)을 이끌어낸다. 흥미롭다. 잘 풀어썼기 때문에 누구나 읽어도 좋다.  


약속한다, 자꾸자구, 쓰레기로부터, 흩어진 깃털로부터, 잿더미로부터, 망가진 육체로부터, 뭔가 새롭고 아름다운 것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한다. -존 버거 rumor 

하나의 장을 시작하는 말머리가 간결하고 아름답다. 마지막 장을 시작하는 말머리. 존 버거의 책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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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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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가 없는 나침반-노인과 바다

 연말, 향초를 선물받았다. 상자에서 꺼내니 불투명한 유리컵에 향초가 가득 차 있었다. 유리컵에 붓고 굳힌 과정이 그려졌다. 액체로 시작해 다시 액체로 돌아가는 은은한 세계. 나는 이것을 한참 살펴 보았다. 코르크 마개를 열자 향내가 났다. 향초는 유리컵의 둘레와 높이를 가졌다. 심지는 중앙에 심어져 있었다. 배꼽 같았다. 향초의 배꼽은 곧게 향초를 관통했다. 심지에 불을 지피자 초가 녹으며 향을 냈다. 초는 타들어가며 자신의 둘레를 녹이고, 높이를 녹일 것이다. 향과 치환되는 순간이다.

 선물한 친구는 향초를 처음 켤 때 기억해야 할 규칙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향초가 가진 둘레를 다 녹일 때까지 불을 꺼서는 안된다는 것. 처음에 녹였던 둘레만큼만 타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 도달했던 둘레를 자신의 끝으로 생각하며 그곳까지만 도착한다는 것이다. 나는 향초를 조금 더 오래 살펴보기로 했다. 

중간에 멈추면 초는 처음부터 탄다바깥을 녹이지 못하고 영영 남는다. 향초의 마지막을 생각했다. 바닥까지 이어진 배꼽, 심지를 다 태우고 나서도 향초는 더 이상 녹을 수 없다. 남는다는 것. 깨끗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누군가 패배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이것으로 답하고 싶어졌다. 패배는 싸우고도 그 자리에 남아 버리는 것이다. 노인이 이렇게 멀리까지 온 연유를 생각했다. 향초가 자신의 둘레를 다 태우는 것을 지켜보기로 했다. 향초와, 내가 동시에 기다리는 것이다.

84일 째, 그가 너무 멀리 까지 온 것은 고기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노인이 잡을 수 있는 가장 큰 물고기가 노인이 최대로 갈 수 있는 둘레 끝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집이 보이는 물가거나, 두 시간 정도면 돌아갈 수 있는 바다에 나가도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자신의 심지를 다 태우기 위해서 그가 갈 수 있는 극단의 둘레까지 나갔다. 자신을 바다의 중앙에 꽂기 위해서. 그래야 더 멀리 다 태워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길 물고기가 뼈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강건한 심지가 물고기를 잡는 것으로도 모자라 한참을 더 타올랐기 때문이다. 방안에 진동하는 향이 이제 몸에서도 나는 것 같았다. 노인의 다리와 뒷목에는 바다의 냄새가 진동할 것이었다. 

노인이었다. 자신의 경험과 습관에 안전한 둘레 안에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안전을 내다 버리고 멀리 나갔던 것은 노인은 그런 것에 방패 삼아 자신에게 머무는 꼴을 우스워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도 그렇고, 소년에게도 그렇고 진정한 형제인 물고기에게도 그랬다. 그는 자신이 최선을 다해 잡지 않으면 물고기 역시 최선을 다해 잡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먼 곳으로 떠나는 노인에게 나침반은 필요 없다. 그에게 북쪽이 어디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스스로가 나침반이며, 그가 있는 곳이 북쪽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자꿈을 계속 꾸기 위해서 노를 젓는다. 현실이 젖어버리면 꿈속 마저 물이 샌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젖도록 둘 수는 없었다. 매일 짠 물에 상처를 담그고 다 까진 손을 추켜 낚시줄을 끌었지만 초원에는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물에 다 젖어버리고, 젖은 곳을 또 젖는다. 그의 84일은 흠뻑 젖은채로 땅까지 적시며 비탄하게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날이다. 노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도록 두었기 때문에 젖기만 한다는 것도 알았다. 향초의 심지가 이따금 '타닥' 거리는 소리를 내며 액체로 흥건해졌다. 

소년은 노인에게 저녁을 매일 묻는다. 그래서 노인은 매일 노란 쌀밥과 생선 요리 한 냄비를 만들어야 했다. 거짓말을 믿으면 거짓이 참으로 바뀌는 마법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이곳에서 보았다. 노란 쌀밥이나 생선 한 냄비는 없지만 소년의 모른 척으로 노인의 저녁은 매일 배불렀을 것 같다. 노인에게 소년은 자신이 분명히 지나왔으나 기억나지 않는 어제, 결코 오지 않는 미래와도 같다. 소년이 노인을 챙기고 노인이 소년을 그리워 했던 것은 소년과 노인이 서로의 어제이자 미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없는 투망을 매일 빌려갔기 때문에 노인은 짠내 나는 옷을 말릴 수 있었다. 그것으로 그는 정말로 멀리 나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노인이 위대한 것은 소년이 그의 주위를 줄곧 지켰기 때문이었다. 바다가 도망가지 않고 노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큰 물고기는 먼 바다에서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인이 뼈만 남은 물고기를 갖고 도착한 오늘은, 소년의 내일이다.

그렇다고 노인에게 어려운 순간이 없었을까. 노인은 멀리 온 것을 무척이나 후회한다. 물고기에게도 미안해 하고. 혼잣말이 길게 이어진다. 그러나 특유의 긍정으로 위기를 넘긴다. 뭐가 어려운 일이라는 거야? 자네가 별이나 달과 싸우는 것이 아니잖아. 그저 자네 자신하고만 싸우면 되는 일이라고. 자네가 다 타기를 기다리는 향초처럼 말이야. 노인의 목소리가 책 밖으로 넘어오는 것 같다. 

어쨌든 우리가 태양이나 달이나 별을 죽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이야. 바다에서 살아가며 우리의 진정한 형제들을 죽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말이야. 99

심지가 불안정하게 타들어갔다. 불이 꺼지지 않도록 바람이 없는 곳으로 옮겨다 놓았다. 초는 자신의 둘레와 높이를 녹이는 것 뿐이다. 대지나, 바다나, 하늘을 녹이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끝까지 태울 수 있으면 그것으로 위대하다. 그러나 나의 끝을 누가 알려주지? 끝은 끝까지 가보지 않는 이상 결코 확인되지 않는다. 내가 나를 탐험하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 육지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까지 나를 끌고 나가 심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물살마다 올라왔다. 아무도 없는 밤을 새우다가 아침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무시무시한 시간을 생각했다. 향초는 유리벽을 향해 타들어 간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은 재가 되는 순간이 아니라 제대로 타기 위해 바다 한 가운데로 나가야 하는 고독의 시간일지도 몰라. 잘 말리고 곧게 키운 심지. 어느 바다에 꽂으러 갈까 생각해 보았다. 눈이 채 녹지 않았고 일월의 해가 아직 높게 떠 있었다. 어제 하던 작업을 이어서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초의 가장자리가 울렁울렁 거리며 액체로 변했다. 눈가로 맵게 향이 퍼져올랐다.

"바다에서 팔십사 일 허탕 친 것으로도 행운을 사려고 했잖아. 그리고 거의 살 뻔했잖아." 155

노인과 바다의 가장 소중한 목소리는 팔십오 일째 바다에 있다.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85일 째 바다는 내 몫이기 때문이다. 남기지 않고 남겨지지 않는 것. 나를 다 태울 수 있는 둘레를 갖는 것. [싸우는 거지, 뭐.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야. 154] 노인의 중얼거림을 두 귓가에 놓고,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 지지 않았어. 136] 노인의 말을 목에 건다. 방위가 없는 나침반을 꼭 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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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호랑나비를 보았니? 내가 처음 가본 그림 박물관 1
재미마주.목수현 기획, 조은수 글, 문승연 꾸밈 / 길벗어린이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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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벗어린이 책을 읽고 : 민서가 보여준 책-봄날, 호랑나비를 보았니?

내가 처음 가본 그림 박물관 시리즈>


1. 민서의 당부: 책 찌찌마~

 민서가 8살 되던 크리스마스에 이 책을 기증했네요. 어디보자지금쯤 민서는 중학생이겠지요

어쩌면 나보다 키가 더 클지도 모르겠어요

'책 찌찌마~'라는 말에서 웃음이 나왔다가 어떤 마음이었을까, 불퉁하게 입이 나온 아이를 그려보기도 했어요

나는 민서를 모르는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죠.

책 찌찌마~ 가장 큰 글씨로 적혀 있었어요그건 아마도 민서 이름이나, 민서가 기증한 날짜보다 더 중요한 목소리였기 때문일까요. 이 책은 민서가 무척 아끼던 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엄마의 권유로 책을 다른 동생들에게 주자,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서운함과 기쁨이 교차된 말이 아닐까 생각해요. 나는 민서의 당부를 따라서 살며시 책을 펼쳤어요.


2. 동화책에 동양화를 보는 비법이?

나는 한 자리에서 이 책을 다 읽었어요.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었답니다. 그리고 부러웠어요. 민서의 8살과 이 책을 어렸을 때 읽었던 수많은 민서들을요민서가 8살 때 기증한 책을 나는 서른이 되어서 볼 수 있었으니까요. 놀랍게도 이 책이 짚어주는 '그림 읽기'는 내가 대학에 가서 배웠던 그림 읽기와 맥이 같았답니다. 그러니까 동양 미술사가 되겠지요. 수업을 듣고, 두꺼운 책을 찾아보고 공부 끝에 배웠던 그림읽기가, 이토록 쉽게, 글씨도 별로 없이, 어려운 설명 없이 쓰여 있었어요. 옛날에 그려졌다는 이유로 다가서기 어려운 것 있잖아요. 한자도 막 써 있고그런 것 훌훌 털고서 '그림하고 놀자~'하는 것이었어요학교에 들어가는 아이가 보기에도 쉬운 책이지만동양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었어요. 옛 그림은 어렵지 않다는 것, 재미있는 이야기는 작게 있으니 자세히 들여다 볼 것, 그곳에 있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을 말이죠

 

3. 그림에서 나온 그림, 아이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다

책의 구성은 단순하지만 아이디어가 있어요. 옛 그림의 원본을 확대하거나, 이야기 해주고 싶은 부분을 잘라서 보여주거나, 재배치하는 것이죠. 과감하게 옛 그림의 배경을 날려버리고 아이들이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나비면 나비, 개미, 귀뚜라미 등만을 포착해 내고 있어요. 사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도 그림을 자세히 보는 것은 어려워요. 확대경이 있으면 모를까, 오히려 그림을 보러 온 사람을 보게 되는 경우도 흔치 않지요. 무엇보다 이 책은 옛 그림이 재미있다!’ 는 것을 알고 있고, ‘재미있는 것을 같이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가득해요. 중간 중간 곤충이나 식물, 동물에 얽힌 속담도 이야기 하고, 그것에 얽힌 설화도 이야기 하고 있지요얼마나 흥미진진 하든지요. 그림으로 꿩이나 맨드라미, 당나귀를 이해할 수 있을 줄 어떻게 알았을까요

 

4. 더 신나게 흔들어요, 더 놀아도 돼요

 책을 보여주는 부모님들은 원본에서 빠져나온 고양이나 참새, 나비를 볼 때 원본이 주는 감동을 훼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원본을 더 재미있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통할 수 있는-어린이 그림책에서만 가능한 순간이 아닐까요? 더 호기롭게 그림에 달려들어도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림 배울 때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배우는 학생으로서 진지하게 그림을 대해야 한다는 마음이 교실에서 함의되었기 때문일까요. 긴 시간을 지나온 그림들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많은 숨을 내쉬었어요. 그것은 만만하게 대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했지요그러나 그런 진지함이, ‘그림과 한바탕 놀아야겠다!’ 라는 앎의 즐거움을 숨죽이게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요. 이 책을 읽고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 실제로 이 그림을 보게 된다면 어떤 감회가 올까요, 저로서는 조금도 헤아리기 어려워요

 

5. 좋아서 보탠 말

지금 이 책을 재판해 낸다면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셈해보니 근 20년 전에 나온 책이었어요지금도 충분히 좋지만 지금의 화려하고 생동감 있는 꾸밈의 책들에 비하면 밋밋한 감이 있지요. 제일 걸리는 것은 활자의 단조로움인데, 캘리그라피가 없거나 익숙하게 사용된 때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가장 아쉬운 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과 함께 약동하려는 구불구불한 활자들은 얼마나 책의 의도를 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지요.

 

:) 부모님께 알려요!

, 이 책을 본 아이들이 조금 더 큰 후에도 옛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간직한다면 이 책을 추천해 드려요오주석 선생님이 쓰신 우리 그림 읽기의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읽다보면 흥이 나고 궁금해서 끝을 다 보고야 말게 돼요말하는 이의 흥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제 흥에 겨워서 말이지요. 그림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니! 당시의 생활상, 문화는 물론이고 사상까지도 쉽게 접근할 수 있어요.

 


오주석의 한국의 美특강

오주석/솔/2005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2

오주석/솔/2005,2006



 

빙긋 웃고 있는 ''를 찾았나요?

그렇다면 저기 밭을 가는 사람들에 걸린 미소도

찾아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뒷모습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사람의 얼굴도 넉넉히 그릴 수 있을 거라 믿어요.

 

그런데, 저 덩치의 소저 사뿐한 걸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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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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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의 구경꾼들-윤성희


들어가기 전에 : 이것은 소설의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작은 삼촌이 외할머니의 오빠로 변하는 마술
 의도는 곳곳에서 일어난다. 작가는 짧은 문장을 묵묵히, 속도감 있게 붙어서 (쉽게)쓰는 것 처럼 보인다. 독자는 짧은 문장을 읽기는 쉬우나 엮기는 어렵다. 여백이 없는 지면에서 쉴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한 단원이 마감되는 곳 뿐이다. 현재의 대화와 오래 전의 대화가 고작 마침표로 구분되고 좀처럼 줄도 바꿔주지 않는다. '기억 속의 대화'와 '기억 속의 외할머니의 대화'와 '현재 할머니의 대화'를 구분해야 한다. 이 빽빽함에 지쳐갈 때 쯤 오독의 신화가 일어나, 작은 삼촌이 외할머니의 오빠로 변하는 마술을 보았다.

 새벽에 일어난 외할머니는 배를 내놓고 잠을 자는 작은 삼촌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작은삼촌은 양말을 한쪽만 신고 있었다. 양말 한쪽은 동그랗게 말려 소파 밑에 들어가 있었다. 외할머니는 소파 밑에서 양말을 꺼내 오른손을 넣어보았다. 
 ["오빠". 외할머니는 중얼거렸다. 집을 나오기 전, 외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식구들의 양말을 빤 거였다. 빨래를 하고 있는데 학교에 갔다 돌아온 외할머니의 오빠가 양말을 던지며 말했다. "이것도 빨아." 양말 한쪽은 대야 안으로, 다른 한쪽은 수챗구멍으로 떨어졌다. 외할머니는 수챗구멍으로 떨어진, 목이 늘어난, 양말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외할머니는 빨던 양말을 전부 대야에 집어 넣고, 이불 빨래를 할 때처럼, 발로 밟았다. 비누거품이 사방으로 튀었다. 외할머니는 오빠에게 소리쳤다. "나도 손 두 개, 발 두 개야. 오빠도 마찬가지고"]

외할머니는 작은삼촌의 양말을 소파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65p (밑줄, 띄어쓰기, 괄호 모두 봄밤)

 외할머니는 작은삼촌에게 이불을 덮어주다가 한쪽만 신고 있는 양말을 본다. 그 양말 한쪽이 외할머니의 오래 전을 불러와 이야기 하는데, 이것을 이야기 해주는 사람은 언제나 화자인 '나'여서 모든 것을 구경한다. '집을 나오기 전'이라는 설명이 있지만 외할머니가 부르는 '오빠'는 무척 시간을 거슬러 가 이질감까지 느낄 수 있게 된다. 빠르게 쫓다가는, 작은 삼촌이 외할머니의 오빠로 바뀌는 이상한 상황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소설이 정신 없어 보이는 것은 이렇게 작은 매개체-'양말'로도 시공을 엮고 경험이 엮여서 이야기를 짜기 때문이다. 생각을 그대로 써나간다.

구경꾼의 성질
 이런 것이 구경꾼의 성질이라 할 수 있다. 구경꾼은 자신이 눈이 닿는 곳을 종횡 할 수 있다.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보는 사람이다. 이야기의 화자인 '나'는 가족 안에 있으면서 바깥에 있는 사람이다. 상황에 개입할 때도, 개입하지 않을 때도, 내가 있기 전의 일에도 와서 거의 모든 이야기를 전한다. 그런데 이런 구경꾼은 한 둘이 아니다. 화자는 '나'로 정해져 있지만, 위에서 보듯이 외할머니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외할머니 또한 '내'가 되어 자신의 오빠 이야기를 전한다.  

 구경꾼들의 이야기는 흘려 들어도 될 만한 이야기가 없다. 문장이 짧은 만큼, 이유도 없이 와서 던지는 이야기들은 나중에 모두 엮이는 소재로 잘 엮인다. 그러나 읽는 중 문장의 인과가 전혀 없는 어처구니 없는 서술을 종종 발견 할 수 있다. 멈칫 하지만 별다른 설명이 없어 다시 이야기가 끄는 곳으로 가기 쉽다. 이를 테면 '어머니는 왠지 그 괘종시계가 싫었다.' 라는 문장이 있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노래를 불러 보자. 이것은 한 문장으로 꾸리는 한편의 서사다. 어머니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던 이유에는 아이와 어머니가 살아왔던 생이 들어 있다.   

미심쩍은 '왠지'를 들어내는 것
그러므로 미심쩍게 걸리는 '왠지'들을 찾아 길게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작가는 무던 하게 다음으로 넘어 가는 것 같지만 아니다. 어머니는 스스로를 풀어 쓸 수 없다. 그것은 어머니가 주인공일 때 가능하다. 그렇다고 '내'가 읽어 줄 수도 없다. 나는 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 지면을 채우기로 했다. 지면에는 티도 나지 않지만. 발견해 주기를, 걸려 넘어지기를, 독자가 그 빈 칸을  읽어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가면 가족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괘종시계를 없애고 거기에 가족사진을 걸어야겠어. 어머니는 왠지 그 괘종시계가 싫었다. 종이 울릴 때마다 어머니는 숨을 죽이고 종이 몇 번 울리는지 숫자를 세었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아주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 어머니는 버스정류장 앞에 있던 사진관에서 사진을 훔친 적이 있었다.  74p (밑줄 봄밤)

 사고 직후 입원 중에 어머니는 괘종시계를 없애고 가족사진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왜 괘종시계가 싫었을까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어지는 문장은, 종이 울리는 것을 셀 때면 하루가 아주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내용이다. 여백이 없지만 얼마나 많은 여백을 독자에게 주고 있는 것인지. 

간격을 넓혀서 읽으면,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집에는 큼직한 괘종시계가 있었다. 없는 살림에 어울리지 않게 커서 거실을 다 차지하는 것 같았다. 식구들을 챙겨 보내면, 북적거리는 아침을 지나 한적함이 찾아왔다. 그럴 때면 내 숨소리보다 크게 들렸던 괘종시계의 초침, 나보다 더 확실한 소리에 작아지며 구석에 앉아 창 너머를 바라보곤 했다. 시간은 빠르면서 더뎠다. 정각이 되면 괘종시계는 가슴을 놀래며 울렸다. 뎅, 뎅, 뎅, 뎅. 놀래는 소리가 싫어 어느 날은 숨을 막고 소리가 지나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금새 울린 만큼의 시간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이후로 나는 정각이 되면 숨을 참기 시작했다. 속으로 속으로, 그러다 보면 하루가, 일 년이, 그렇게 수십 년도 금방 살아 낼 것 같았다. 

라는 이야기를 읽는다면, 작가는 촘촘한 이야기의 여행을 살근히 설명하지 않는다. 왜 일까. 소설이나 삶이나 깊게 파고 들어가야 나오는 것은 손톱 만한 진실인데. 대체로 그 진실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늘어뜨려 장엄할 생각은 없다. 아름답지 않다고 진실을 영영 숨길 수도 없다. 그런 것을 '왠지' 같은 돌로 눌러 놓는다. 그리고 그 돌을 건드릴 수 없는 가족. 아무리 화자가 자기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을 본다고 해도 결국 '현상'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글자놀이와 징검다리, 천천히 건너가야 하는 이야기
 이 와글와글한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읽으면 분량이 세배 쯤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소설이지만 쓰기는 '시'와도 닮았다. 앞에서 말한 괘종시계 이야기에서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적고 다음 문장에서는 화자의 아버지의 이야기로 넘어 온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아버지(외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화자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아버지-아버지)로 이어지는 글자 놀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음 문장은 아버지의 이야기는 어린시절로 '첫째야,' 하고 불렸던 이야기를 하고. 이어 큰삼촌으로 연결된다. '첫째'는 실은 아버지이나 첫째에서 연상 되는 '큰'삼촌의 생각으로 넘어간다. 경계도 없이 규칙도 없이 구경꾼은 자신의 눈을 돌리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모두 그럴만한 징검다리를 건너 가고 있었다.

 간격을 넓히지 않고 읽으면 쉴 새 없이 종횡 하는 이야기, 가볍고 따뜻하다. 불편한 것은 지그시 돌 아래 눌려 숨어 있다. 넘어 가려면 쉽게 넘어 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책은 훨씬 얇고, 빨리 읽게 될 것이고, 이야기를 구경만 하다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빨리 읽을 수 없는 삶이란 없고, 하물며 대가족의 이야기는 말 할 것도 없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넓혀 그 안에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로 빠져서 돌 조각 같은 것을 애써 읽길 바란다. 그렇게 한 평생을 같이 살았지만 서로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이유를 알 수 없이 겉으로 드러났던 말이나 눈물. 말해지면, 그것이 정말일까? 가족은 한 공간에서 그것들을 열심히 봐왔지만 일어나야 했던 일은 일어났고, 일어난 일을 어쩌지 못했다. 

가족이란 이름의 구경꾼들
-그래서 가족이라는 이름의 구경꾼들 아니었는지, 아니 구경꾼도 못 했는지..그래 구경은 했는지

 일정 이상의 시간을 먹고 자라면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들어올 수 없는 영역이 생긴다. 이것은 어떤 시간과, 눈물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들어올 수 없으며 허용한다 해도 들어 갈 수 없는 공간이다. 이 때가 되면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가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역의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곳을 스쳐 지나 갈 때도 있고 구태여 그것을 건드려 싸움을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구경꾼들, 다만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고 아물어 가는 것을 봐줘야 하는 것. 시간의 곡선이 몸에 들어 가는 변화를 지켜봐야 하는 것, 그러므로 구경꾼들, 가족의 다른 이름은 서로가 구경꾼들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당신 모르게, 가족 모르게, 나도 모르게..일어나야 한다

 우는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줄 수는 있는 것. 어떤 소설의 부분이 구경꾼들 사이로 떠오른다. 이것을 '닦아 주는 대신 몰래 우는 것을 지켜보는 것' 이라 변용해보자. 서로의 공간을 놓아주면서 시선은 떼지 않는 것, 구경꾼들이 말하고 싶었던, 그리고 읽는 이에게 바라고 싶었던 '가족' 아닐까.




작성 : 2013/03/2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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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14
허먼 멜빌 지음, 강수정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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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잡이를 가장한 운명과 인간의 분투기-모비 딕


이를테면 산을 아는 이는, 산의 생김을 설명할 수 있는 이가 아니라 산이 우는 소리를 들었던 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은 머리속에 각인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같은 곳에 올라도 저마다 다른 느낌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이의 감각이 모두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경험은 양보할 수 없고, 대신 할 수도 없다. 산을 직접 올랐던 이와 올라간 이야기를 읽어냈을 뿐인 이를 같은 결코 같은 선상으로 놓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잘 옮겨 놓은 이야기를 듣는 이는 모르는 사람처럼 산을 세모꼴 험준함과, 초록으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대상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와 이야기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는, 경험하지 않더라도 그에 준하는 체험을 미리 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잘 전달된 이야기일 수록 머리속에 각인되기 전에 감각에 와 닿는다. 그래서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는 것이겠지. 합해서 천쪽에 가깝다. '바다'다.

모비 딕은 장황하다. 더 장황할 수 없을 만큼 장황하다. 그러나 그것은 호들갑에서 나온 장황함이 아니라 고래를 잡으러 몇 년 쯤 바다 위를 떠다닌 사람이 간결하게 그간의 일을 압축한 끝에 나온 장황함이다. 상권의 중반에 가서야 포경선을 타는 거사가 이뤄진다(!). 도대체 그 머리가 희다는 고래는 어떻게 등장할 것이기에, 배에 올라타는 것 만으로도 이백 쪽 넘게 쓸 수 있는지. 깊숙이 들어있는 고래의 심장에 가기 위해서 바다 언저리를 크게 그려 놓아야 했던 모양인지, 중얼거리며 책을 들었다. 출렁이니 조심하게! 그러나 바다보다 더 출렁였던 것은 그가 난데 없이 툭툭 던지는 삶에 직면했을 때였다. 갑판에서는 도망칠 곳도 없는데, 그는 이런 말을 가차 없이 쏟아낸다.  

인간이란 누구나 포경 밧줄에 싸인 채 살아가는 것을. 모든 인간은 목에 올가미를 건 채 태어나는 것을. 그러나 조용하고 교묘하게 상존하는 삶의 위험을 깨닫는 건 느닷없이 갑작스레 죽음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뿐이다. 상p460

목을 더듬거려도 이상할 것이 없다. 모비 딕은 엄청난 이야기와 함께 고래에 관한 해부학적인 지식으로도 유명하지만, (향유고래는 생애의 7분의 1만 숨을 쉬니, 이를테면 일요일에만 숨을 쉬는 셈이다. 하p142) 그것에 가려진 뭍을 고의적으로 떠난 인간에 대한 연구서의 조명이 아쉽다. 없던 포승을 목에 채우고 사람을 단번에 굴조개와 마찬가지인 신세로 전락하게 하는 이야기를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이런 유연에 골치가 아프다면 우리는 얼마나 단단하게 부착된 삶의 한쪽 면을 굳게 믿어 왔던 것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삼차원으로 비춰지는 바다 속을 유영하는 것 처럼 그는 성능 좋은 카메라로 인간의 삶(뭍)과 바다의 삶을 속도감있게 줌인하고 아웃한다

내가 생각하기엔 이승에서 그림자라고 부르는 게 실은 나의 실체인 듯하다. 또 영적인 것을 보는 우리는 물속에서 태양을 보며 탁한 물을 더 없이 맑은 공기라고 생각하는 굴조개와 흡사하다. 내 생각엔 몸뚱이는 더 나은 실체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몸뚱이 따윈 누구라도 가져가라지. 가져가라니까. 이건 내가 아니라고. 그러니 낸터컷을 위해 만세 삼창을 부르자. 그리고 배나 몸뚱이에는 언제 구멍이 뚫리더라도 상관없어. 내 영혼은 제우스가 온다 해도 뚫을 수 없을 테니까.
상p86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에 손을 들자는 것이다. 이 책을 펴는 곳 어디라도 바다가 부어지고 고래의 분수와 꼬리의 은빛 출렁임이 나타난다. 더욱이 이런 구절이라도 만나다가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저기 있는 향유고래의 표정이 보이나? 이마의 긴 주름이 조금 지워진 듯할 뿐, 죽을 때의 표정 그대로다. 놈의 넓은 이마에는 죽음을 바라보는 무심한 사유에서 유래된 대초원 같은 평온함이 깃든 것 같다. 하지만 또 다른 머리의 표정을 살펴보라. 공교롭게도 뱃전에 짓눌려 턱을 단단히 감싸게 된 저 놀라운 아랫입술을 보라. 머리 전체가 죽음을 바라보는 엄청난 실천적 결의를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나? 내가 보기에 참고래는 스토아 철학자였고, 향유고래는 플라톤주의자였다가 말년에 스피노자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하p88
 
내가 고래를 본다 하더라도 이렇게 고래를 이해할 수는 없으므로 백기. 나는 모비 딕을 백문하고 언젠가 일견하는 날 어떤 고래가 진짜인지 분간할 자신이 없으므로. 어떤 고래가 더 잘 읽어낸 것인지 말할 자신이 한마디로 '없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적어도 모르는 사람처럼 고래를 둥그렇고 꼬리가 아름답고 이따금 분수를 내뿜는 유유자적으로 읽지 않는다는 것. 인간의 행태에 경멸한다는 듯 꼬리로 쳐 부수며 다가오는 굉음으로 기억할 뿐이다. 모비 딕은 고래와 사람의 분투 이전에, 발을 뜰 수 없었던 뭍의 삶에 대한 지리멸렬 한 인사에서, 모든 가치로부터 자유롭고 싶어했던 이들의 험난한 여정이다. 운명과 인간의 분투기다. 껍데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은 언제 뚫려도 좋다는 결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안정된(고정된) 지상에서 발을 떼 바다를 경험하지 않는 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곳에서 지상에서 가장 크다는 동물과 싸우는 것은, 실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과 대적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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